평화통일 Vol 2072024.1.

지난해 12월 12일(현지시간) 미국 뉴욕 유엔본부에서 열린 유엔 총회. 이날 이스라엘이 하마스와의 전쟁에서 법적, 인도적 의무를 지킬 것을 촉구하는 결의안이
미국의 반대 속에서도 압도적인 찬성으로 채택됐다. (AP/뉴시스)

국제

글로벌 사우스(Global South)의 부상과 국제 질서

미·중 경쟁 속 정치·외교·경제적 영향력 증가
한국, 선진국과 차별되는 ‘질서 조정자’ 돼야

급변하는 국제 정세 속에서 ‘글로벌 사우스(Global South)’로 불리는 지구 남반구 국가들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글로벌 사우스 국가는 과거 제3세계, 혹은 개발도상국 등으로 불렸지만, 요즘에는 좀 더 포괄적인 의미로 사용된다. 이들 국가가 부상한 배경과 국제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해봤다.

서방 선진국들을 ‘글로벌 노스(Global North)’ 국가로 지칭해 지구 북반구와 남반구 간의 대립을 더욱 강조하는 경향도 나타난다. 서방 진영의 자유주의 국제 질서에 반대하는 중국, 러시아 등을 묶어 ‘글로벌 이스트(Global East)’라고 지칭하기도 해 세계는 이제 3분되는 양상을 보인다는 분석도 있다.

유엔 등 국제기구의 정의에 의하면 글로벌 사우스는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중동, 아시아 등 지역에서 경제 발전 정도가 낮고, 사회·정치적 환경이 불안정하며, 인구가 활발하게 증가하는 국가들을 지칭한다. 이 지역에는 한국과 일본, 호주 등 경제적으로 발전하고 자유민주주의가 정착된 안정된 정치 체제들도 존재하지만, 이들 국가를 제외하면 대부분 글로벌 사우스 국가로 분류할 수 있다.

과거에도 제3세계 국가들은 선진국과 구분되는 정체성을 형성해 공통의 정책을 추구한 경험이 있다. 대표적으로 냉전 시대에 1955년 인도네시아 반둥에서 개최된 비동맹회의는 자유 진영과 공산 진영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비동맹 국가들이 공통의 정책을 모색한 경우다. 그러나 냉전의 와중에 비동맹운동은 커다란 성과를 거뒀다고 보기는 어렵다.

희토류 등 희소 광물 대량 매장
국제 정세가 급변하는 요즘, 글로벌 사우스 국가들이 다시 주목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 과거 30년간 미국 중심의 단극 체제가 약화되고 강대국들 간 경쟁이 심화되면서 이들 국가의 향배가 중요해졌다. 특히 미국과 중국의 전략적 경쟁 속에서 글로벌 사우스 국가들의 정책적 향방은 경쟁의 향방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들 중의 하나가 된 것이다.

많은 국가가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전략적 선택을 꺼려하며 소위 헤징(hedging) 전략을 추구하고 있다. 전략적 선명성을 보이지 않고 미국, 중국 모두와 실용적 관계를 모색하면서 자국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전략이다. 어느 한쪽과 전략적 연대를 강화할 경우 다른 국가와의 관계에서 국익에 손해를 볼 수 있는 상황이 가속화되기 때문이다. 미국 단극 체제에서 강대국 간 지정학적 경쟁 체제로 바뀌는 국제 정세의 변화가 글로벌 사우스 국가들의 비중을 더욱 증가시킨 것이다.

둘째, 미·중 전략 경쟁은 물론이고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그리고 심화되는 기후변화 속에서 기존에 존재했던 지구적 공급망이 활발하게 재편되고 있다. 강대국 간 지정학 요인, 또는 기후변화로 말미암아 핵심 광물들과 재생 에너지 생산에 필요한 자원의 공급망이 재편되면서, 글로벌 사우스 국가들이 가지고 있는 자원의 중요성이 더욱 배가된 것이다. 청정에너지 생산과 관련된 배터리 제조에 핵심인 희토류 광물은 물론 리튬, 니켈, 코발트, 망간, 흑연 등 많은 광물이 더욱 중요해졌다. 반도체 생산에 필요한 갈륨, 게르마늄, 인듐, 셀레늄, 탄탈륨, 텔루륨 등도 경쟁의 대상이다. 상당수 자원은 중국을 비롯한 캐나다 등 강대국에 치중돼 있지만, 글로벌 사우스 국가들에도 대량으로 매장돼 있다. 중국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고 탈중국하려는 서방 국가들이 글로벌 사우스에 주목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임시 수용소로 가는 버스를 탄 에티오피아 티그라이 난민들. 2020년 11월 티그라이인민해방전선(TPLF)과 에티오피아 정부군 간의 분쟁으로 수천 명이 숨지고
200만 명 이상이 난민으로 전락했지만 국제사회의 관심은 많지 않았다. (AP/뉴시스)
과거 1970년대에도 산유국들이 석유수출국기구(OPEC)를 결성해 자원 민족주의를 바탕으로 국제 정치적 힘을 발휘한 적이 있다. 지금은 더욱 핵심적인 광물들이 선진국들의 상품 개발과 테크놀로지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들 국가와의 수출입 관계 형성 및 자원 개발 투자 등은 강대국들의 경쟁을 좌우하는 중요한 요소가 된 것이다.

셋째, 국제 정치적 장의 성격 변화다. 비록 국제 정치가 국력에 의해 좌우되는 장이지만 개별 사건에 대한 지구적 공론장의 역할이 중요해졌다. 예를 들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둘러싸고 많은 국가가 다양한 의견을 나타내고 있다. 전쟁 직후부터 수차례 열린 유엔 총회에서 대러시아 제재안은 140여 개 국가로부터 지지를 받았지만, 40여 개 국가는 여전히 지지를 거부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러시아의 침공을 규탄하는 서방 국가들에게 당혹감을 안겨주었다. 물론 글로벌 사우스 국가들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두둔하는 것은 아니지만, 우크라이나 전쟁이 궁극적으로 유럽의 문제이며 이보다 훨씬 심각한 제3세계 지역의 분쟁들이 상존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미국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규탄하고 우크라이나를 보호하기 위해서 많은 자원을 쏟고 있지만, 현재 아프리카 등지에서 벌어지고 있는 내전에 대해서는 충분한 관심과 지원을 하지 않고 있다는 인식이 팽배한 것이다.

실용주의적 ‘유연한 외교’가 대세
글로벌 사우스 국가들의 이 같은 인식은 미국 주도 자유주의 국제 질서의 정당성을 약화시킬 뿐 아니라, 현실적으로도 러시아에 대한 경제 제재에서 많은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사실 러시아 제재에 참여하는 국가는 30개 국가가 채 되지 않는다. 오히려 러시아와의 경제 관계를 증가시키는 국가가 많다. 예를 들어 인도는 우크라이나 전쟁 이전보다 약 4배 증가된 대러시아 무역량을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글로벌 사우스 국가들의 정치적, 외교적, 경제적 영향력은 더욱 증가하고 있고, 미국과 중국, 러시아를 비롯한 강대국들은 이들 국가의 지원을 얻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특히 중국은 글로벌 사우스 국가들의 정치 체제와 상관없이 포괄적이고 광범위한 경제적 지원과 투자를 지속해오고 있고, 글로벌 사우스 국가들로부터 환영을 받고 있다.

이에 비해 미국은 수원국의 정치 체제 등을 고려하고 인권 등 다양한 규범적 기준을 고려해 지원과 투자를 제한하는 경향을 보여왔다. 미국은 현재의 국제 정치 구도가 권위주의 대 자유민주주의라고 보고, 체제가 맞지 않는 국가들에 대해서는 매우 신중한 접근을 해온 것이다. 이러한 상황이 지속된다면 강대국 간 지정학 경쟁에서 글로벌 사우스 국가들의 향배에 따라 예측할 수 없는 결과가 나올 수도 있다.

글로벌 사우스 국가들의 영향력 강화는 한국에도 많은 정책적 과제를 안겨주고 있다. 첫째, 글로벌 사우스 국가들의 전략적 방향과 한국의 전략을 비교할 수밖에 없다. 이들 국가는 소위 거래적이고 실용주의적인 외교정책을 추진한다. 이코노미스트지는 거래주의적 외교를 추진하는 25개 국가(T25: Transactional 25)를 선정하기도 했다. 즉, 사우디아라비아, 브라질, 인도, 인도네시아, 튀르키예, 남아프리카공화국을 비롯해 멕시코, 모로코, 알제리, 이스라엘, 베트남, 카타르, 방글라데시, 콜롬비아, 페루, 이집트, 태국, 필리핀, 칠레, 나이지리아, 싱가포르, 파키스탄, 말레이시아, 아르헨티나, 아랍에미리트(UAE) 등 총 25개국을 지칭한 것이다. 이들 국가는 강대국의 이념이나 가치와 무관하게 자국의 이익에 따라 유연한 외교정책을 추구하는 경향을 보인다.

더욱 중요한 것은 소위 글로벌 스윙(Global Swing) 국가들로 인도와 인도네시아, 브라질과 사우디, 아라비아, 튀르키예, 남아프리카공화국 등을 지칭한다. 모두 G20 국가들이며, 각 지역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이들 국가는 미·중 전략 경쟁에서 어느 한편을 들지 않으며, 자국의 이익에 맞게 매우 유연한 전략을 보이고 있다.

국익 위해 전략적 방향 제시 필요
한국 역시 아시아의 중견국으로 미·중 전략 경쟁 사이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과연 한국이 자유 진영의 가치에 기초한 외교에 주력할 것인지, 아니면 양국 사이에서 유연한 실용 외교를 펼 것인지는 지속적으로 제기될 문제일 것이다.

둘째, 한국이 서방 진영의 입장에 선다면 글로벌 사우스 국가들의 비판에 직면할 수 있다. 최근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에서 요르단이 제출했던 유엔총회의 평화안에 대해 한국은 다른 서방 선진국들과 마찬가지로 기권표를 던졌다. 하마스의 공격에 대한 비난이 빠져 있고, 휴전 조건으로 인질 석방에 대한 명확한 상세 내용이 부족했기 때문에 한국으로서는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중동 국가들은 한국의 정책이 서방 진영의 정책과 일치되어 글로벌 사우스 국가들의 입장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는다는 비판을 제기하기도 한다.

시진핑(가운데) 중국 국가주석이 지난해 8월 24일(현지시간) 남아공 요하네스버그에서 열린 제15차 브릭스 정상회의 마지막 날 중국 · 아프리카 지도자
라운드 테이블에 참석하고 있다. (AP/뉴시스)
한국은 근대 이행기에 식민지를 거쳐 자유민주주의와 경제 발전을 추구해온 국가이며, 문화대국으로 이제 강대국의 반열에 들어서려 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글로벌 사우스 국가들을 충분히 이해하고 한국의 이익과 가치에 맞게 이들 국가를 포용하는 전략적 방향을 제시할 필요가 있다. 과거 한국은 선진국과 개도국 간의 가교 역할을 외교 전략의 핵심으로 제기하기도 했다. 한국의 발전 경험을 글로벌 사우스 국가들에 전달하고, 기후변화 등 핵심 과제에서 이들 국가의 입장을 대변하며 선진국들과 교섭에 힘을 발휘한다는 정책이다. 글로벌 사우스 국가들에 대한 적극적 관심은 비단 가치와 규범이라는 추상적 목표가 아니라 국제 무대에서 한국에 대한 이들 국가의 지지, 경제적 공급망 재편에서 한국의 이익 확보 등 구체적인 국익과도 연결되는 문제다.

더 나아가 한국이 추진하는 국제 질서의 미래를 제시하고 이 과정에서 글로벌 사우스 국가들의 지지를 받는다면 다른 선진국들과 차별되는 질서 조정자의 역할을 할 수도 있다. 가치와 이익의 균형 속에서 단지 글로벌 사우스 국가들과의 관계 설정뿐 아니라 앞으로 다가올 국제 질서에 대해 이들 국가가 공감할 수 있는 전략적 비전을 제시하는 외교를 펼쳐가야 할 것이다.

전 재 성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