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통일 Vol 2072024.1.

서울에서 안락한 삶을 꿈꾸는 20대 탈북 여성의 도시 생존기를 그린 영화 ‘믿을 수 있는 사람’. (찬란 제공)

예술로 평화

이방인에게 바치는 영화 ‘믿을 수 있는 사람’

정착 꿈꾸는 20대 탈북민의 서울 생존기

2023년 11월 26일 막을 내린 60회 금마장영화제는 ‘중화권의 오스카’로 불리는 권위 있는 대만 영화 축제다. 경쟁 부문인 ‘아시아영화진흥기구상’은 뛰어난 작품성과 독창적 콘셉트를 가지고 있는 영화를 선보이는 자리로, 역량을 갖춘 영화인 발굴의 요람으로 알려져 있다. 올해 이 부문에 선정된 영화 중 주목도가 단연 으뜸인 작품은 곽은미 감독이 연출한 ‘믿을 수 있는 사람’(2023년 10월 18일 국내 개봉)이다. 눈 뜨고 코 베인다는 도시 서울에서 안락한 삶을 꿈꾸는 20대 탈북 여성의 도시 생존기를 담담하고 고요한 시선으로 바라본 수작이다. 주인공 한영(이설 분)은 여행객에게 서울을 소개하는 여행안내원으로 일하지만, 정작 자신의 삶은 안내하지 못한 채 겉도는 인물로 그려진다.

영화는 배우의 열연으로 빛을 발한다. 배우 이설은 중국어와 탈북민 특유의 억양이 자연스럽게 배어 나오는 연기로 2023년 5월 세계적인 독립영화제인 24회 전주국제영화제 시상식 한국경쟁 부문 배우상을 수상하며 연기력을 인정받았다.

반어적 제목으로 탈북민 처지 강조
곽 감독의 뛰어난 연출력과 탄탄한 이야기 전개 등 작품성도 영화가 호평 받는 비결이다. 1981년생인 곽 감독은 네 편의 단편 영화를 통해 전 세계 영화제를 휩쓴 실력파 감독이다. 그동안 여성과 청년 캐릭터를 주인공으로 한 단편영화를 작업해왔다. 임신 중절을 위해 중국으로 떠나야 했던 ‘갈 거야’, 데이트에 나서는 17살 일본군 위안부 소녀 이야기 ‘첫 데이트’, 체육대회 단체줄넘기에 자원한 미란과 그를 제외하려는 담임교사 채영의 신경전을 그린 ‘열정의 끝’, 대자보를 작성한 일로 교수에게 고소당한 혜리와 친구 민영의 이야기 ‘대자보’ 등 주로 현실을 다룬 작품을 연출했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은 곽 감독의 첫 장편영화다. 이번 작품으로 한국영화아카데미 공모전에도 당선돼 곽 감독은 장편영화 데뷔 신고식을 화려하게 치르게 됐다. 영화는 2023년 10월 부산국제영화제에선 도담도담 관객상을 수상한 데 이어 북미 최대 규모인 밴쿠버국제영화제, 일본 아이치국제여성영화제, 뉴욕아시아영화제에 초청되는 등 해외에서 잇단 호평을 받았다. 그렇다면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어떻게 만들어지게 됐을까. 2018년 지하철에서 탈북민으로 보이는 두 여성이 서툰 한국어로 대화하는 모습을 본 곽 감독은 대학 졸업 후 영화판 주변을 서성이고 있다고 느꼈던 자기 모습과 남한 사회에 정착하지 못하고 겉도는 탈북민이 둘 다 소속 없는 처지라는 점에서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생각을 표현한 결과물이 바로 이 작품이다. 곽 감독은 “탈북민을 포함해 자신이 이방인이라 느껴지거나 어딘가에 소속되지 못한 채 불안해하는 모든 이들에게 바치는 작품”이라고 소개했다.

영화 ‘믿을 수 있는 사람’을 연출한 곽은미 감독. (찬란 제공)
영화 ‘믿을 수 있는 사람’은 탈북민의 처지를 그대로 반영한다. 직장 동료는 한영을 따돌리지 않지만 자기 기준에서 벗어나는 한영의 언행에 대해선 거침없이 지적한다. 한영을 챙겨주던 보호감찰관은 갑자기 전근을 가게 된다. 서울이라는 낯선 도시에서 한영이 유일하게 믿고 의지하는 남동생은 남한 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나머지 돌연 자취를 감춘다. 친구 정미는 이민을 떠나게 되면서 한영과 작별을 고한다. 설상가상으로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 방어체계) 사태 여파로 중국 정부가 중국인의 한국행 단체관광 금지 조치를 내려 한영은 생계유지에 큰 타격을 입게 된다. 영화는 한영의 처지를 남산 타워가 보이는 서울에서 캐리어를 끌고 정착지를 찾아 헤매는 주인공 모습과 ‘정착을 꿈꾸는 20대 이방인의 서울 생존기’라는 수식어에 각각 빗대 탈북민의 처지를 그려낸다. 그러면서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반어적 제목을 통해 탈북민의 처지를 효과적으로 강조한다.

캐나다·일본 등에서도 영화 호평 잇따라
탈북민에 대한 선입견을 영화가 바꿔가고 있다. 영화를 본 많은 관객들이 ‘탈북민은 사회에 적응하기 어렵다’는 편견을 버리고 그들이 가진 진정성에도 관심을 기울인다. 곽 감독은 “작품을 집필하기 위해 탈북민의 특성과 고민을 조사했다. 파면 팔수록 그 엄청난 생활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탈북민의 남한 정착기를 담은 영화가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에서 주목을 받은 것은 남북 관계가 세계인의 관심사라는 증거다. 국내에서는 2030 관객 반응이 좋고, 해외에서는 중·장년층이 공감하는 경우가 많다. 캐나다 밴쿠버 상영 때는 ‘북한에서 남한으로 가는 게 어려운 일이냐’, ‘남한에선 정말 탈북민을 차별하냐’ 등 수많은 질문이 쏟아졌다고 한다. 일본 상영 땐 오전 10시 30분에도 객석이 다 차 곽 감독조차 놀랐다. 4월 전주국제영화에선 ‘이것은 내 이야기’라며 공감하는 국내 거주 외국인들을 보며 이방인의 마음은 어디에서나 동일하다는 걸 확인했다.

곽 감독은 한영을 사회 부적응 상태에 머무는 뻔한 인물에 가두지 않는다. 스스로 자립하기 위해 고민하고 결심하면서 오히려 어려움을 이겨내고 성장하는 인물로 조명한다. 동시에 마지막 장면을 우리 사회에 숙제로 던져준다. 곽 감독은 “공항으로 향한 한영이 어디로 갈지는 나도 모른다. 자신의 삶을 개척하기 위해 남한에 왔던 것처럼 좀 더 나은 곳으로 가지 않을까 싶다. 영화를 통해 우리 사회가 더 나아지길 바란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