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포커스
북한의 다자외교,
국제규범 수용하며 국제사회 편입 노력
대북제재 하에서 북한은 국제사회와의 협력을 모색하며 자구책을 마련하고 있다. 유엔이 선포한 지속가능한발전목표(SDGs)와 유엔전략프레임워크(UNSF) 등의 사례를 토대로 북한이 국제기구와 어떻게 관계맺기를 하고 있는지 살펴본다.
2016년 초 북한의 제4차 핵실험 이후 국제사회는 그동안의 북한 핵실험 도발에 따른 대북제재보다 한층 격상된 양자간 및 다자간 차원의 총체적인 대북제재 조치를 취해왔다.
대북제재의 효과성에 관한 의견과 해석은 분분하지만, 공통된 평가는 과거의 어떤 대북제재보다 강력한 방식의 제재가 2016년 이후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정확하게 파악할 수는 없지만 계속된 대북제재는 외부로부터의 대북지원 중단 및 규제로 이어져 북한에 엄중한 경제적 피해를 주었을 공산이 크다.
김정은 정권은 2016년 제7차 노동당대회에서 ‘국가경 제발전 5개년 전략’을 발표하고 국가발전전략을 경제· 핵 병진노선에서 경제건설 중심으로 전환했다. 그러나 2020년 8월 당중앙위 제7기 6차 전원회의에서 김정은 위원장은 경제 실패를 자인하며 2021년 1월 제8차 당대회를 소집해 “새로운 국가경제발전 5개년 계획을 제시”한다고 밝힌 바 있다.
이것은 대북제재의 압박뿐만 아니라 하노이 북·미 회담 결렬로 트럼프 행정부에서는 제재의 전면적인 완화를 더이상 기대할 수 없다는 최종 판단의 결과라 해석할 수 있다. 이제 북한은 2021년 초 제8차 당대회에서 새로운 국가노선을 제시해야 하는 중차대한 기로에 서 있다.
대북제재 하 외교 다변화
북한은 전통적으로 미국과의 직접 협상을 통한 안전 보장과 제재 해제를 동시에 해결하는 일괄타결을 외교 정책의 핵심으로 삼고, 대남정책은 사실상 대미정책의 부속품으로 취급하는 경향을 보여 왔다.
그러나 2010년대 초반부터 북한은 미국, 한국, 중국 등 양자외교 이외에 국제사회와 직접 소통하면서 비핵화 문제로 꽉 막힌 딜레마 형국을 다자외교로 풀어나가려는 움직임을 보여 왔다.
「로동신문」에서는 2012년부터 지속적으로 UN의 지속가능발전, BRICS 등의 남남협력, G-77의 활동사항을 기사로 대중화하였으며, 2015년 9월 UN이 공식적으로 지속가능발전목표(SDGs)를 선포한 이후에는 북한의 SDGs 이행을 위한 행보가 점차 강화되고 있는 것을 다양한 경로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기존에 UN 등 국제기 구가 주창하는 글로벌 규범에 깊게 관여하지 않았던 북한이 최근에 인권과 개발 등의 글로벌 규범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다자외교 무대에서 북한의 새로운 위치를 설정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 새롭게 포착되고 있다.
북한이 다자외교를 통해 국제사회와 새로운 관계맺기를 시도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대북제재와 양자외교의 교착상태를 극복하기 위한 자구책일 가능성이 크다. 외교의 다변화를 도모함으로써 대북제재를 우회하여 글로벌 수준의 규범을 통한 대북지원의 정당성을 찾으려는 시도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국제사회 및 글로벌 규범과의 적극적인 소통은 대북제재와 상관없이 부분적 으로나마 북한이 스스로를 국제화하고 국제규범과 원칙을 준수하는, 사회화(Socialization)라는 ‘예상치 못한 결과’를 도출할 수도 있다. 다자외교를 통한 북한 외교의 다변화는 북한의 목적이 무엇이든 간에 국제무대에서 한국이 전략적으로 북한과의 다자협력을 도모할 수있는 정치적 기회공간까지 제공하는 효과도 창출할 수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2010년대 이후 북한이 국제사회와 어떤 방식으로 다자외교를 기획하고 소통해 왔는지, 그리고 대북제재 하에서 다자외교를 어떻게 전략적으로 활용하고 있는지에 대한 분석이 필요하다. 본고에서는 북한이 글로벌 규범과 조우하는 실제 사례를 ‘2017-2021 유엔전략프레임워크(UNSF)’와 2015년 선포된 SDGs를 중심으로 주요 관전 포인트를 정리하고자 한다.
전자가 국제사회를 대표하는 복수의 UN기구가 대북제재 하에서 북한에 인도적 지원을 제공하기 위한 외부 개입의 사례라면, 후자는 북한이 스스로 SDGs라는 글로벌 규범을 이행하기 위하여 투입한 내부 노력을 외부로 발현하는 사례이다. 특히, SDGs는 모든 UN 회원 국이 자발적으로 이행하는 프로세스가 있어 북한이 이에 적극적으로 반응하고 있다는 점에서 보다 유심히 관찰할 필요가 있다.
UNSF와 SDGs 이외에도 북한은 전통적인 개도국 연합체인 G-77과 새롭게 부상하는 글로벌 남반구의 신흥세력인 BRICS, 그리고 아프리카 대륙의 현황에 관하여 지속적으로 「로동신문」과 같은 대중 매체를 통해 전파하고 있다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외교 다변화 전략에 배태된 북한의 의도와 한국이 북한의 다자외교 노력에 어떻게 전략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가를 타진한다.
글로벌 규범과의 조우: UNSF와 UN SDGs
①외부에서 내부로의 개입: UNSF
2017년 유엔과 북한 외무성이 체결한 UNSF는 최초로 시도된 것은 아니다. 이미 2011년부터 2016년까지 1차 UNSF가 진행된 바 있다. 1차와 2차 UNSF 모두 북한에 상주하는 UN Country Team의 상주조정관 주재로 13개의 UN기구와 북한 외무성이 서명한 국제협약에 준하는 문서라 볼 수 있다. 이는 1995년 북한에서 발생한 기근으로 국제사회가 인도적 지원을 시작한 이후 UN이 체계적으로 대북지원을 관리하기 위해 시도한 협약서이다.
또한 북한이 대북원조 프로세스를 UN에 부분적이나마 공개하고 인권중심 접근법과 젠더 요소까지 받아들이기로 합의를 했다는 점에서 북한의 다자외 교에 대단히 중요한 변화가 일어났음을 보여준다. 물론 UNSF를 이행하지 않았을 경우 강제할 수단이 없고 북한도 외부지원이 절실히 필요한 상황에서 UNSF를 거부할 이유는 없다고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북한이 남북 협력 차원의 대북지원을 계속 거부하고 있는 반면 UN 과 같은 다자기구의 개입에는 일정 정도 유연하게 대응 하고 있다는 점에서 새로운 변화를 감지할 수 있다.
1차 UNSF가 상대적으로 북한의 특수성에 무게를 두고 인도적 지원의 전달 방식에 대한 내용이 대부분이라 면, 2차 UNSF는 2015년 UN에서 합의한 SDGs를 토대로 글로벌 규범이 북한의 특수성을 상쇄하는, 한층 진보된 내용이 북한 당국에 의해 승인이 되었다는 점에서 차별성을 갖는다. 북한이 가장 민감하게 반응해 온 인권 이슈를 2차 UNSF의 핵심 이행원칙으로 수용하였다는점은 대단히 진보적인 변화다.
2차 UNSF는 국제사회의 보편적인 규범인 SDGs를 주요 플랫폼으로 사용하는데 이를 북한 외무성도 공식적으로 인정한 것이라 해석할수 있다. 북한이 UNSF를 수용한 맥락은 국제사회와 소통하며 대북제재를 경감하기 위해 SDGs와 같은 국제규 범을 활용하고 이를 이행하는 조치를 일정 정도 성실히 수행하는 모습과 일맥상통한 특징을 보인다고 평가할수 있다.
UNSF는 결론적으로 UN이라는 국제사회의 주체가 북한의 식량난 등 인도적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수원국인 북한 내부에 개입한 사례다. 북한은 UN의 인도적 개입에 수동적으로 대응하기보다 자신들에게 민감한 조건을 그대로 수용함으로써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김정은 체제에서는 대북제재에 규제되는 양자원조보다는 인도적 지원이라는 명목으로 제재를 피할 수 있는 UN의 다자원조를 계속 유지하는 전략을 취하고 있다.
②내부에서 외부로의 전환: UN SDGs
UNSF와 달리 2030년까지 인류공동의 목표인 SDGs 에 대해 북한은 다분히 자발적이고 적극적으로 관심과 이행 의지를 국제사회에 표출하고 있다. SDGs는 17개의 목표, 169개의 세부목표, 그리고 320여 개의 글로벌 지표로 구성되어 있다.
UN 회원국은 4년마다 자국의 SDGs 이행계획과 이행기제를 담은 ‘자발적국별리 뷰(VNR)’를 UN 고위급정치포럼(HLPF)에 제출해야 한다. VNR을 HLPF에 제출하는 것은 자국의 SDGs를 ‘어떻게 이행하겠다’는 약속이기 때문에, VNR은 그 국가의 SDGs 이행 정도를 평가하는 중요한 척도가 된다.
또한 개별 국가는 자국의 특수한 맥락에서 구성되는 국가 발전전략과 보편적인 SDGs와의 정합성을 강조함으로써 자국의 발전전략이 SDGs 이행 차원에서 전개된다는 것을 정당화하는 경향이 강하다. 북한도 VNR을 준비하 면서 2016년 ‘국가경제발전 5개년 전략’이 SDGs 정신에 부합한다고 강조하고 있기 때문에, 2021년 제8차 당대회에서 결정될 신 국가노선도 SDGs와 연결할 가능성이 크다.
“북한의 외교 다변화가 한국에 주는 함의는 지금까지 남북한 간의 양자 관계에 천착해서 남북협력을 구상했던 방식에서 탈피해 북한이 추구하는 보편적 규범의 공간에 한국이 어떻게 개입하고 협력할 수 있는가에 있다.”
북한은 2019년 VNR를 제출하겠다고 약속했다가 1년 연기하고, 코로나19 발생으로 2021년 7월로 제출 기한을 재연장한 상태이다. VNR은 SDGs 중 특정 목표를 중점적으로 이행할 계획, 국내 이행을 위한 전략과 추진체계 등으로 구성되기 때문에 북한의 VNR 준비과정과 그내용 분석을 통해 북한의 의도와 경향을 보다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 북한은 VNR 제출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UNESCAP에서 개최하는 SDGs 지역포럼에 세 차례 참석하여 SDGs 국내이행과 관련된 주요 목표와 이행기제 등을 발표하고 국제사회의 피드백을 받는 등 적극적 으로 이를 홍보하고 국제사회와 소통을 시도하고 있다.
북한과 같은 취약국가에게는 SDGs가 국가 발전전략에 있어 중요한 전략자산이 된다. 북한이 SDGs 이행에 적극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는 원천적인 동기를 다음의네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SDGs 국내 이행을 강조함으로써 보편적 규범을 준수하는 국제사회의 일원임을 홍보할 수 있다.
둘째, 대북제재로 막혀 있는 대북원조 및 국제협력을 북한의 발전전략과 연계하여 일정 정도 숨통을 여는 계기로 활용할 수 있다.
셋째, 북한의 발전전략이 북한 특유의 폐쇄적인 경제발전 노선이 아니라 글로벌 수준의 보편적 규범인 SDGs와 맥락을 같이 한다는 점을 강조할 수 있다.
넷째, 북한 내부에 국가발 전전략의 정당성을 홍보할 때 SDGs라는 글로벌 규범의 일환으로 발전전략의 가치와 중요성을 강조할 수 있다.
요컨대, SDGs는 북한에게 다자외교의 새로운 채널을 열어주는 정치적 기회구조의 촉매제로 활용된다. 북한 스스로 내부의 특수한 발전전략을 사회주의의 이념이 아닌 인류 전체가 공유하는 보편적인 SDGs 규범과 연계하여 국제사회에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경우는 북한 외교사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사례일 것이다. 이는 대북 제재와 미국과의 협상 결렬 등에서 발생하는 딜레마를 다른 방식의 외교전략을 통해 풀어나가려는 합리적인 선택이며, 앞으로 SDGs를 활용한 국가발전전략과 다자 외교가 당분간 지속될 것으로 전망된다.
글로벌 규범 준수를 통한 사회화 가능성과 한국의 전략적 접근
북한의 SDGs에 대한 적극적인 접근은 북한이 고려한 대북제재의 현상타파와 상관없이 국제사회와의 접촉 확장을 통한 국제사회로의 편입으로 진행될 수 있다. 대북 제재가 강화될수록 북한은 다른 채널을 통해 제재국면을 극복하려고 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앞으로 다자외교를 통한 북한의 외교 다변화는 계속 이어질 공산이 크다. 이는 대북제재의 의도치 않은 결과라 할 수 있지만, 북한의 다자외교가 확장되고 국제사회와 조우할 수 있는 기회의 공간이 넓어지는 긍정적인 결과라 평가할 수 있다. 문제는 북한의 다자외교 선회를 국제사회가 어떻게 수용할 것인지, 한국은 어떠한 전략적 접근을 통해 북한과 국제무 대에서 보편적 규범을 토대로 협력할 수 있는가를 타진하는 것이다.
북한의 외교 다변화가 한국에 주는 함의는 지금까지 남북한 간의 양자 관계에 천착해서 남북협력을 구상했던 방식에서 탈피해 북한이 추구하는 보편적 규범의 공간에 한국이 어떻게 개입하고 협력할 수 있는가에 있다.
북한은 현재 SDGs 이행이라는 보편적 미션을 수행하기 위해 보편성이라는 가치를 일정 정도 수용하는 한편, SDGs 이행을 국가발전전략과 맥을 같이하며 최대한 북한의 특수성을 보편성과 일치하게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앞으로 한국의 대북정책은 대북제재와 비핵화를 동시에 해결하기 위한 물리적 노력과 함께 다자외교를 통한 글로벌 규범을 활용하여 북한과의 협력을 모색 하는 노력이 병행되어야 할 것이다. SDGs가 종료되는 2030년까지 대북제재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북한은 다자외교를 전략화할 것이다. 한국도 이러한 북한의 변화에 보편적 규범을 이행하는 차원에서 접근하는 혜안이 필요하다.
김 태 균
서울대학교 국제대학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