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탈주민 정착 이야기
서울 가양3동 자율방범대 대장 강윤철 씨
평양 호위사령부 대원에서
서울 자율방범대 대장으로
“하루하루 의미 있는 삶이 대한민국이 나에게 준 가장 값진 선물”
서울 강서구 가양3동 자율방범대 대장 강윤철(40) 씨는 2016년 8월부터 올해로 7년째 자원봉사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자율방범대원 30여 명을 이끌며 황금내근린공원, 공영주차장, 한강 주변 등 가양3동 관내를 주 3회 저녁 2~3시간씩 순찰하며 지역 주민의 안전을 지키는 것이 그의 일이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 이 일은 단순히 국가에 보답하는 삶을 실천하려는 자신의 소망과 의지에서 출발했다.
1983년 북한 양강도 혜산에서 태어난 강 씨는 군사전문학교를 마친 후 2002년 김정일을 지키는 정예부대인 호위사령부(936군부대)에 입대했다. 평소 김씨 일가를 위해 공헌해야겠다고 생각하던 차에 꿈에 그리던 평양에서 지낼 수 있다는 얘기를 듣고 망설임 없이 자원했다. 그가 배치받은 곳은 642여단 2대대. 외부인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평양 근교 풍광 좋은 호수를 끼고 자리 잡은 특각(김씨 일가 별장 또는 초대 손님이 머무르는 별장) 여러 채를 경비하는 것이 주 임무였다. 그런데 특각들은 텅텅 비어 있었다. 그런 곳을 수백 명의 군인이 지켜야 하다니….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후 옮겨간 경보대대 상황은 더 황당했다. 중대를 관장하는 사관장이 새로운 소대장이 왔으니 나오라고 소리치는 데도 분대장들이 얼굴을 내비치지 않는 것이었다. 나중에 1분대장(부소대장)이 화가 잔뜩 난 표정으로 나타났다. 1분대장 손에는 권투 글러브 2개가 들려 있었다. 글러브 하나를 사관장 쪽으로 던지며 “오늘 한 판 붙어보자”고 소리쳤다. 나중에 사정을 들어보니 분대장들은 입대 13년 차였고, 사관장은 입대 11년 차에 불과했다. 1994년부터 시작된 고난의 행군 시기에 군 병력이 제대로 충원되지 않자 김정일은 북한군 복무 기간을 10년에서 13년으로 3년을 연장했다. 복무 기간을 마치고도 3년을 추가 근무하게 된 군인들의 분노는 하늘을 찔렀다. 훈련에 불참하는 군인들도 적지 않았다. 갈등의 씨앗이 여기서 비롯된 것이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이런저런 고민에 휩싸였던 강 씨는 위를 잘라내는 수술을 받고 감정제대(의가사제대) 조치를 받았다.
“군 제대 후 고향으로 돌아오니 그새 많이 변했더군요. 북한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돈이 없으면 사람 취급을 받기 어려웠지요. 이런저런 일을 했지만 좀처럼 돈이 되지 않았어요. 어느 날 친구가 중국에서 통나무 한 대를 날라도 1위안(약 182원)씩 받으니 하루에 50위안(약 9100원) 넘게 벌 수 있다며 중국행을 제안하는데, 그 얘기에 귀가 솔깃해졌습니다.”
북한 노동자 10여 명과 함께 한국행 결심
강 씨 일행은 중국으로 건너갔다. 이틀 동안 산에서 들쭉(블루베리)을 따서 중국 상인에게 팔아 80위안을 벌었다. 중국까지 건너와 이 정도 벌이에 만족할 수 없었던 그는 중국 벌목장에서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얘기를 듣고 그곳을 찾아가 일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벌목장에 도착하니 북한 사람 10여 명이 일하고 있었다. 나무를 베고 소와 트럭을 이용해 통나무를 산에서 끌어내려온 뒤 일정한 길이로 다듬고 자르는 작업이었다. 그 일을 하며 일당 40위안을 벌었다.
강 씨는 북한 노동자와 달리 벌목장 사장은 관리 업무만 하는 데도 일당 200위안씩 받는다는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됐다. 너무 불공정하다는 생각에 노동자를 대표해 사장에게 두 가지 조건을 제시했다. 하나는 일당을 50위안으로 인상해달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아파서 근무하지 못해도 식대를 제하지 말라는 내용이었다. 요구 조건을 들어주지 않으면 다른 벌목장으로 옮기겠다며 맞섰다. 그러자 사장은 두 가지 조건을 모두 들어줬다. 그리고 얼마 후 강 씨는 작업장 책임자로 추대됐다.
어려운 일이 닥칠수록 그의 책임감은 더 빛을 발했다. 그가 책임자로 있을 때 북한 노동자들이 중국 공안 단속에 걸릴 때마다 동료들과 힘을 모아 일을 처리했다. 그러자 강 씨를 믿고 따르는 이들이 하나둘 생겼다.
“벌목장에서 매달 평균 1000위안씩 돈을 받고 일했어요. 번 돈을 가족에게 갖다 주기 위해 압록강을 건넜죠. 북한 집에서 지내면서 되돌아봤어요. 중국 벌목장에서의 생활이 만족스러웠기에 참혹한 북한 현실에 대한 회의가 생기더군요. 그렇게 몇 번 중국과 북한을 오가기를 반복하다 끝내 보위부에 붙잡히고 말았습니다. 감옥에서 한 달을 버틴 끝에 가족이 뇌물을 준 덕에 무사히 석방될 수 있었지만, 보위원이 매일 집으로 찾아와 저를 감시하더군요.”
강 씨는 척박한 현실에서 자유를 갈망했고 그제야 가야 할 길이 보였다. 고민 끝에 그는 ‘중국에 정착해 살자. 다시는 북한으로 돌아오지 말자’고 결심했다.
2015년 9월 마지막으로 압록강을 건넌 뒤 본격적으로 중국에서 벌목장 생활을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한국 영화와 드라마, 라디오 방송을 접하며 대한민국을 알게 됐다. 한국에 대한 호기심이 날로 커졌지만 한국행은 불가능한 일이라 여겼다. 그런데 아는 중국인으로부터 ‘당신도 한국에 갈 수 있다. 한국에서 일하면 매달 만 위안 이상 돈을 벌 수 있다. 국적도 주는데 왜 여기서 고생하느냐’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이즈음 몇 년 전 한국으로 탈북한 지인이 강 씨에게 연락해왔다. 그 지인은 교회를 주선해주며 한국으로 오는 길을 알려주려 애썼다. 브로커 비용을 받지 않는 대신 중국에서 3개월 동안 성경을 공부해야 한다는 단서가 붙었다. 대한민국 입국을 마음에 둔 건 이때부터다. 강 씨는 벌목장에서 생활하며 알고 지내게 된 북한 노동자들을 모아 성경 공부를 시작했다. 그리고 2016년 5월 마침내 일행과 함께 대한민국에 도착했다.
노력한 만큼 삶의 질 결정되는 사회
신산한 삶에 지친 사람은 쉬이 병을 얻게 되고 정서적 어려움에 처할 수 있다. 초기엔 강 씨도 여기저기 몸이 아프기 시작했다. 1년 넘게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서야 어느 정도 몸과 마음이 회복했다.
“제 나름 마음을 굳게 먹는다고 했는데도 처음엔 힘든 면이 없지 않았어요. 일단 몸이 여기저기 아프기 시작했죠. 북한에서 척박한 환경에만 있던 저에게는 따뜻한 물이 콸콸 쏟아지는 한국 아파트가 좀 낯설었어요. 북에 두고 온 가족이 생각나 눈물이 그치지 않는데,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싶은 순간들도 있었어요.”
2018년 취직한 회사에서 운전직으로 일하며 모은 돈으로 1톤짜리 용달 트럭을 사서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그 경험 덕분에 올해 1월 강서구시설관리공단 운전기사 겸 차량 담당 정규직(공무직)으로 취업할 수 있었다. 그가 경험한 대한민국은 어떤 사회일까.
강윤철 씨는 서울 강서구 의용소방대 대원으로 4년째 자원봉사를 하고 있다. 사진은 소화기 점검을 하는 모습 (강윤철 제공)
“대한민국은 본인이 노력한 만큼 삶의 질이 결정되는 행복한 사회라고 생각해요. 저를 대한민국 국민으로 받아준 나라이고요. ‘나에게 새로운 인생을 선물해준 대한민국에 어떤 보답을 할 수 있을까’, ‘몸으로 국가를 섬길 수 있는 일이 뭘까’ 고민했죠. 마침 동네 이웃이 자율방범대 자원봉사를 제안해 흔쾌히 수락했습니다.”
강 씨는 성실함과 책임감을 인정받아 2022년부터 가양3동 자율방범대 대장으로 추대됐다. 또 강서구 의용소방대에 가입해 4년째 봉사도 하고, 가양3동 주민자치회 회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제20기 민주평통 자문위원으로 위촉돼 서울 강서구 청년분과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그러는 사이 강 씨 자신도 참 많이 변했다.
“자원봉사를 시작한 뒤 가장 많이 하는 말이 ‘고맙습니다’예요. 예전에는 이런 말을 할 일이 별로 없었어요. 그런데 여기선 제가 대원들에게 할 수 있는 일이 먼저 인사드리는 것, 그리고 마음을 다해 감사를 표현하는 것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먼저 인사하고 고맙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표정이 많이 밝아졌다는 얘기를 들어요.”
“따뜻한 물이 콸콸 쏟아지는
한국 아파트가 좀 낯설었어요.
북에 두고 온 가족이 생각나
눈물이 그치지 않는데,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싶은 순간들도…”
대한민국이 탈북자에게 준 선물
그는 탈북민을 돕는 일에도 앞장섰다. 2022년까지 북한군 출신 탈북민 단체인 숭의동지회 부회장을 맡아 활동했다. 지금도 주말마다 강서구에서 탈북민들이 모여 족구 동호회 활동을 하며 화합을 다진다. 이곳에서는 탈북민의 생활을 돌보고, 관계 부처를 수소문해 문제를 해결하거나 지원책을 소개받도록 하는 등 갖가지 도움도 제공한다.
서울 강서구 가양3동 자율방범대 대장 강윤철 씨가 서울 한강 일대에서 순찰 봉사를 하고 있다. (강윤철 제공)
“대한민국에 정착해 사회생활을 시작하는 탈북민에게 동네에서 봉사활동을 하며 지역사회에 녹아들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봉사를 하면서 느끼는 뿌듯함과 소속감은 곧 자신감이 됩니다. 그리고 봉사를 하면 사람들과 어울리게 되니 정신건강에도 좋고 몸을 많이 움직이게 돼 생활에도 도움이 됩니다.”
김씨 일가를 지키는 호위사령부 대원에서 대한민국 지역 주민의 안전을 책임지는 자율방범대 대장이 된 강 씨. 그는 “하루하루의 삶이 의미 있고, 이것에 감사할 줄 알게 된 것이 바로 대한민국이 나에게 준 가장 값진 인생의 선물”이라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