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포커스

김정은 시대의 통치담론
3종 ‘제일주의’로
부실해진 무대 다지는 북한
북한의 경제성장률 추정치를 보면 김정은 위원장이 서 있는 무대는 그리 튼튼하지 않다. 사진은 10월 8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노동당 총비서 추대 22주년을 맞아 평양 노동당 창건 기념탑 앞에서 열린 청년 학생들의 기념 무도회 ⓒ연합

한국 영화 <신과 함께: 인과 연 >에서 집을 다스린다는 성주신은 이렇게 말했다. “나쁜 사람은 없어, 나쁜 상황이 있는 거지.” 사람을 평가하기 전에 그가 처한 상황을 먼저 보라는 가르침을 깊이 새겼다. 이 가르침을 잘 따르면 인내심도 더 커질 것 같았다.
최근 읽은 책 『팩트풀니스(Factfulness)』의 저자 한스 로슬링(Hans Rosling)도 이렇게 주장했다. “비난 본능은 왜 안 좋은 일이 일어났는지 명확하고 단순한 이유를 찾으려는 본능이다. (…) 비난 본능은 개인이나 특정 집단의 중요성을 과장한다. (…) 세계를 정말로 바꾸고 싶다면 누군가의 면상을 갈기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부터 이해해야 한다.”

얼마 전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백두산에 나타나 뭔가 결단을 앞둔 듯 백마를 타고, 며칠 뒤 금강산에서는 남측 시설 철거까지 지시하자 그에 대한 국내외 여론이 빠르게 나빠지고 있다. 김 위원장을 향한 세간의 비난 요지는 이렇다. ‘2018년 들어 보여준 유화적 태도는 역시 진심이 아니었군. 올해 5월에 다시 미사일 쏠 때부터 알아봤다. 핵무기를 포기할 수 있다는 김정은의 말, 이제는 안 믿는다.’
성주신과 한스 로슬링이 함께 가르쳤듯, 김 위원장에게 비난의 화살을 날리고 책임을 묻는 것만으로는 한반도 상황을 바꿀 수 없다. 잠시 비난을 멈추고 김 위원장이 처한 상황을 살펴보자.

지난 10월 16일 김정은 위원장이 삼지연군의 인민병원과 치과전문병원 등 건설현장을 찾았다고 조선중앙통신이 보도했다. 김정은 시대의 북한은 인민제일주의 등 인민을 중시하는 통치담론을 보이고 있다. ⓒ연합

부실해지는 무대를 다지려면

지금 김정은 위원장이 처한 상황은 어떨까? 김 위원장을 배우로, 그가 처한 상황을 무대에 비유하면 현재 그 무대는 튼튼한 상태일까, 부실한 상태일까? 한국은행이 올해 여름 발표한 북한 경제성장률 추정치는 김 위원장이 서 있는 무대가 그리 튼튼하지 않다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

2018년 북한의 실질 국내총생산(GDP)은 전년 대비 4.1% 감소했다. 2017년에도 전년 대비 3.5% 감소했다. 북한 경제가 2년 연속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한 것은 2000년대 들어 처음이다. 북한 대외교역 규모(수출+수입, 상품기준)도 2014년 76.1억 달러로 정점을 찍은 뒤, 2015년 62.5억 달러, 2016년 65.5억 달러, 2017년 55.5억 달러로 떨어졌고, 2018년에는 28.4억 달러로 급감했다. 특히 2018년 수출액은 2.4억 달러로 전년 대비 86.3%나 감소했다. 대북제재로 인해 주요 수출품인 광물성 생산품, 섬유제품 등의 수출이 막힌 탓이다.

이처럼 경제 사정이 나빠지면 북한 인민은 북한 당국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게 될까? 두 가지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하나는 북한 당국이 주장하는 것처럼 경제 사정이 나빠진 건 당국의 무능함 때문이라기보다 미국의 대북 적대정책과 국제사회의 대북제재 때문이라고 생각하며, 당국의 처지를 이해하고 당국 방침을 잘 따르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그렇지 않아도 의식주의 많은 부분을 ‘돈주’가 장악한 시장에서 스스로 해결하고 있는데 도대체 당국은 뭘 하고 있느냐며 속으로 불만을 키워 나가는 것이다.

북한 사회에 직접 들어가 여론조사를 해 보지 않는 한 ‘확신’할 수 없지만, 김정은 위원장이 2017년 신년사 발표 때 “언제나 늘 마음뿐이었고 능력이 따라서지 못하는 안타까움과 자책 속에 지난 한 해를 보냈는데 올해에는 더욱 분발하고 전심전력하여 인민을 위해 더 많은 일을 찾아할 결심을 가다듬게 됩니다”라고 말한 걸 보면, 아무래도 북한 인민들이 당국의 ‘미국 탓 국제사회 탓’ 주장에 고개를 끄덕이며 고분고분 방침을 따르는 것 같지는 않다. 한마디로 경제 사정 악화에 인민의 만까지 더 해지며 김 위원장이 선 무대가 갈수록 부실해질 가능성 이 커지고 있는 것이다.

현 시점에서 김 위원장이 부실해지는 무대를 다질 수 있는 방법도 크게 보면 두 가지다. 하나는 미국과의 비핵화 협상에 성공해 대북제재를 풀고 경제에 다시 활력을 불어넣는 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설득력 있는 통치담론을 고안해 인민의 정치사상적 지지를 붙들어두는 것 이다. 김 위원장이 북한 경제 탓에 미국과의 협상을 중단하거나 마냥 시간을 끌기 쉽지 않다는 점은 필자를 비롯해 이미 많은 분석가들이 주장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글에서는 최근 김 위원장이 어떤 통치담론을 가지고 무대를 다져 나가려 하는지를 알아내는 데 집중해 보자.

김정은의 2017년 신년사 ‘공개 반성’이 유례없는 일이기는 하지만, 집권 이후 그가 국내에서 했던 언행을 보면 전혀 뜬금없는 일은 아니었다. 잘 알려져 있듯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체제위기 극복을 위해 선군정치를 실행했고, 이에 따라 ‘군대’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드러냈었다.

김정일의 군대에 대한 각별한 애정은 1990년대 ‘고난의 행군’ 시절 민간 간부들과 인민이 보여준 패배주의, 비(非)사회주의적 행위에 대한 실망감의 반작용이기도 했다. 이와 달리 김정은은 2012년 집권 이후부터 ‘인민’에 대한 경의와 애정을 기회가 있을 때마다 드러내고 있다.

2018년 북한의 수출액은 2.4억 달러로 전년 대비 86.3%나 감소했다. 대북제재로 인해 주요 수출품인 광물성 생산품, 섬유제품 등의 수출이 막힌 탓이다. 사진은 2018년 9월 촬영된 평양 방적공장의 노동자 ⓒ연합

“3종 제일주의를 관통하는 양대 키워드는 북한 당국이 전통적으로 자주 써 왔던 ‘자주(자강력)’와 김정은 시대 들어 부쩍 자주 등장하는 ‘인민’이다.”

김정은의 3종 ‘제일주의’

먼저 김정은은 2012년 4월 6일 당 중앙위원회 책임일꾼들과 한 담화에서 김정일에 대해 “이민위천을 좌우명”으로 삼았던 “인민의 자애로운 아버지”였다고 평가하며, 앞으로 당조직은 김정일의 뜻을 받들어 “인민을 하늘같이 여기고 무한히 존대하고 내세워주며 인민의 요구와 리익을 첫 자리에 놓고 모든 사업을 진행”하자고 촉구했다. 김정일의 생전 권위를 빌려 자신의 통치담론, 정책방향 등을 제시한 셈이다.

김정은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북한 사회의 대표적 통치 담론인 ‘김일성-김정일주의’의 본질을 ‘인민대중제일주의’로 새롭게 규정했다. 2013년 1월 29일 당 제4차 세포비서대회 연설에서 “당원들을 참다운 김일성-김정일주의자로 준비시키는 데서 그들에게 인민에 대한 사랑과 헌신적 복무정신을 깊이 심어주는 데 특별한 주목을 돌려야”한다며 “김일성-김정일주의는 본질에 있어서 인민대중제일주의이며 인민을 하늘처럼 숭배하고 인민을 위하여 헌신적으로 복무하는 사람이 바로 참다운 김일성-김정일주의자”라고 규정한 것이다.

김정은은 2015년 10월 10일 당 창건 70돌 경축 열병식 및 평양시군중시위 연설에서 “인민에게 멸사복무하는 것”을 조선노동당의 “존재방식”으로까지 규정하더니, 2016년 신년사에서 “우리 당은 인민생활문제를 천만가지 국사 가운데서 제일국사로 내세우고 있습니다”라고 천명했다. 한편 김정은의 2016년 신년사에는 ‘자강력제일주의’라는 또 하나의 제일주의가 처음 등장했는데, 김정은은 그해 5월 당 제7차 대회에서 이를 “자체의 힘과 기술, 자원에 의거하여 주체적 력량을 강화하여 자기의 앞길을 개척해나가는 혁명정신”으로 정의했다.

여기에 더해 2017년 말에는 ‘우리 국가제일주의’까지 등장했다. 북한 당국에 따르면 우리 국가제일주의는 “주체조선의 강대성과 우월성에 대한 긍지와 자부심이며 우리식 사회주의 조국의 존엄과 위상을 더 높이 떨쳐나가려는 각오와 의지”다. 북한 당국은 인민이 ‘우리 국가’에 “긍지와 자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 중 하나로 인민대중 중심의 가장 우월한 국가사회제도에서 살며 혁명하고 있다는 점을 들고 있다.

그렇다면 먼저 나온 인민대중제일주의, 자강력제일주의와 우리 국가제일주의는 서로 어떤 관계가 있을까? 현재 북한 당국이 밝힌 목표는 ‘사회주의 강국 건설’인데, 북한 당국은 이 목표 달성을 위해 우리 국가제일주의의 기본요구인 김일성·김정일의 사상과 업적 옹호 ·고수, 김정은의 사상과 영도에 충성, 자강력제일주의, 인민대중 제일주의 등을 철저히 구현해나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요컨대 자강력제일주의, 인민대중제일주의는 우리 국가 제일주의의 4대 기본요구 중 3번째, 4번째 요구로 자리 잡고 있다.

김정은은 2019년 신년사에서 “정세와 환경이 어떻게 변하든 우리 국가제일주의를 신념으로 간직하자”고 강조했다. 이른바 3종 제일주의를 부실해지는 무대를 다지는 수단으로 쓰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밝힌 셈이다. 3종 제일주의를 관통하는 양대 키워드는 북한 당국이 전통적으로 자주 써 왔던 ‘자주(자강력)’와 김정은 시대 들어 부쩍 자주 등장하는 ‘인민’이다. 과연 북한 인민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인민에 대한 경의와 애정을 드러내는 김정은 국무위원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김정은 시대의 새로운 통치담론은 북한 당국에 대한 인민의정치사상적 지지를 붙들어두는 데 얼마나 효과를 발휘할까? 북한 사회의 미래에 관심 있는 이들이라면 지속적으로 관심 가져야 할 질문들이다.

김진환 김진환
통일교육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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