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4·27 판문점 선언 이후, 극적인 변화에 힘입어 문재인 대통령은 3·1절 100주년 기념사를 통해 ‘신한반도체제’ 비전을 밝혔다. 문 대통령과 정부는 신한반도체제가 “우리가 주도하는 100년의 질서로 국민과 남북이 함께 만드는 새로운 평화협력의 질서, 새로운 평화협력 공동체”로서 “남북관계 발전이 북·미와 북·일관계의 정상화로 연결되고, 동북아 지역의 새로운 평화 안보 질서로 확장됨으로써 한반도 평화로 아시아 번영과 세계 평화 그리고 번영의 질서를 만드는 데 기여하는 체제”라고 설명했다.
신한반도체제를 뒷받침하는 것은 함께 잘 살기 위한 ‘혁신적 포용국가’다. 한마디로 평화와 공존을 지향하는 중진국으로서 나라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고 국민의 생명과 안전, 행복한 삶의 기초를 확보하고 남과 북, 그리고 아시아와 세계에 평화, 공존, 협력, 공동, 번영의 상호 의존적 질서와 규범을 마련해 나가는 데 앞장서기 위한 비전으로 이해된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신한반도체제의 구상을 밝힌 이래, 남북관계도 한반도 문제 해결도 더욱 불투명해졌다. 2019년 이래의 상황 악화에는 여러 요인이 작동하고 있다. 그중 가장 큰 요인은 미국과 북한 관계의 교착일 수 있다. 우리가 어쩔 수 없는 외적 요인만이 아니라 한반도 전환의 운전대를 잡고자 했던 우리 자신의 의지와 방향성에 대해서도 검토할 필요가 있다. 교착의 내적 원인은 2019년 문재인 대통령이 밝힌 ‘신한반도체제 비전’ 속에 존재하는 딜레마 혹은 그 비전이 다루지 않았던 공백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 이 비전의 궁극적 실현을 위해서 보완되거나 분명히 해야 할 것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핵 없는 한반도, 핵 없는 세계로
먼저 핵무기에 대한 정부와 시민의 입장과 태도를 분명히 해야 한다. 핵무기는 사라져야 할 대량살상무기이다. 북한 핵문제의 해결은 지구상에 핵무기 없는 세계를 실현하려는 노력과 연결되어야 한다. 지금까지 한국 정부의 핵무기 정책은 오로지 북한 핵문제에만 집중함으로써 북한의 반발을 부르고, 국제 시민사회의 지지도 얻지 못했다. 국제 핵군축, 특히 핵무기금지조약(Treaty on the Prohibition of Nuclear Weapons, TPNW)에 대한 정부의 입장과 태도를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또한 ‘핵무기도 핵위협도 없는’ 한반도와 동(북)아시아 실현의 비전을 분명히 해야 한다. 북한 핵문제의 해결은 본질적으로 한반도와 동아시아에서 핵무기에 의존하는 군사 전략을 폐기하는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북한이 핵을 포기한 이후에도 핵무기에 의존하는 동아시아 역내 국가들의 군사전략을 포기할 계획을 갖고 있지 않다.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체제 전망을 한반도와 동북아, 나아가 동아시아를 비핵무기지대로 만드는 구상으로 확대함으로써 한반도뿐만 아니라 역내 핵위협 제거에 기여할 수 있다.
2020년 1월 7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시민평화포럼 등 시민사회단체 주최 ‘북·미 대화 재개와 대북제재 완화 촉구’ 기자회견에서 참석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연합
군사 억지 전략 및 동맹 전략 재검토
첫째, 남북관계에서 군사적으로 압도적 우위에 있는 남한부터 선도적으로 위협 감소 조치뿐만 아니라 군비 축소 조치를 함께 취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남한의 연간 군사비는 북한의 연간 국내총생산을 초과한다. 특히 첨단 정보능력, 원거리 정밀타격 능력, 제공력 등에서 한미는 압도적인 재래식 전력 우위를 확보하고 있다. 이를 고려할 때 적극적이고 선도적인 군축의 실천이 필요하다.
둘째, 주변국의 잠재적 위협에 대비한다는 명목으로 이루어지는 원거리 작전 능력 강화, 제주도의 군사기지화, 해군력 및 미사일방어능력의 증강, THAAD 배치 등은 결과적으로 자주국방보다는 미국 주도의 군사협력 (공해전 Air Sea Battle) 강화에 동원되는 방향으로 작동 한다. 침략적 전쟁을 부인하는 헌법 5조 1항의 원칙을 다시금 대내외에 천명하고 이에 충실하게 군을 운용해야 한다.
셋째, 궁극적으로는 한반도 평화프로세스 진행 과정에서 군사적 억지력, 특히 주한미군이 제공하는 억지력에 대한 실체적-심리적 의존도를 지속적이고 단계적으로 낮춰가는 것이 필요하다. 일차적으로는 미군의 핵 억지력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고, 단계적으로 재래식 공격 능력에 대한 의존도를 줄여나갈 필요가 있다.
넷째, 군사적 문제를 주도적으로 해결해 나가는 바탕 위에서 남북 간 대화와 협력을 일상화하고 교류협력을 제도화해야 한다. 정치군사적 문제에 대해 한국 정부가 보다 적극적이고 선제적인 조치를 취할 경우, 남북 간 대화와 교류협력도 훨씬 실질적으로 진전될 수 있을 것이다.
한반도와 동아시아 평화체제 비전 연결
먼저, 한반도 정전체제에서 평화체제로의 전환과 더불어 동아시아 전후체제를 공동안보평화협력체제로 바꾸려는 노력을 병행해야 한다. 한반도 평화체제로의 전환은 냉전과 함께 시작된 동아시아 전후체제의 평화적 전환과 긴밀히 연결될 수밖에 없다. 이를 위해서는 한미 군사동맹의 배타성을 완화하고, 군사동맹에 의존하는 질서를 역내 공동안보협력체제로 전환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둘째, 한반도 평화체제 형성과 일본 평화헌법체제의 유지를 동아시아 평화체제의 축으로 삼아야 한다. 미· 중 간의 갈등 관계 속에서 미래 동아시아 평화를 유지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두 축은 한반도 평화체제와 일본의 평화헌법체제라 할 수 있다. 정부는 일본이 추구하는 집단적 자위권에 대해 분명한 반대 입장을 표명해야 한다. 또한 일본이 미국, 인도, 호주 등의 보수우파정부들과 추진하는 대중국 인도-태평양 전략과는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 이는 THAAD 배치 과정에서 한국 정부가 중국 과 약속한 ‘한·미·일 협력이 군사동맹으로까지 나아가지 않는다’에도 부합한다.
셋째, 해양의 군사화를 방지하고 영유권 분쟁 등 갈등을 평화적으로 해소하는 데 능동적으로 역할해야 한다. 영유권 분쟁은 분단된 한반도와 더불어 동아시아의 군사적 긴장감을 키우는 또 다른 발화점이 돼왔다. 한국 정부는 영유권 및 해양 안보와 관련된 문제를 평화적, 다자적 협의를 통해 해결해야 한다는 일관된 입장을 견지하고 이와 관련된 정부 간, 연구자 간, 지방자치단체 간, 시민사회 간 중층적 대화와 협력체계 건설을 지지할 필요가 있다. 특히 남중국해 등지를 둘러싼 영유권 분쟁 의 해결방안으로 최근 추진되는 Code of Conduct 합의 시도 등 적극적으로 협력할 필요가 있다.
평화지향 포용국가의 정체성 강화
한국 정부는 국제평화유지, 인도적 지원 활동에 기여 하되 평화유지 활동 이외의 다국적군 활동을 엄격히 제한해야 한다. 인도적 지원, 전후 복구, 해양안보 등을 명목으로 불필요하게 군이 동원되는 일을 최소화해 원조의 군사화를 경계해야 한다. 최근 미국이 요구하는 호르무즈 파병은 거부해야 한다. 같은 맥락에서 이라크 파병, 베트남 파병 등에 대한 국가의 공식평가서를 작성하고 국제평화유지 활동의 국가적 기준을 확립하여 대내외에 분명히 하는 것이 필요하다. 미국과 영국 등이 이라크 침공에 대해 국가 및 의회 차원의 공식평가서를 발행한 반면, 한국은 아직 공식평가서가 없다. 객관적인 기록과 성찰적 평가에 기초한 공식평가서는 이후 유사한 압력 앞에서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지키는 중요한 준거점을 제공할 수 있다.
또한 개발협력 정책의 도구화를 경계해야 한다. 신남 방정책 등 아시아 공동체 관련 정책에서 사람, 평화, 상생·번영이라는 가치를 내세움으로써 규범 외교의 가능성을 제시했지만, 여전히 국내 대기업의 시장 진출 등 국내 성장 동력 확보, 방위산업 수출 증대와 미국 주도의 군사협력 강화 등 과거의 패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1)을 경청할 필요가 있다.
1) 김형종, ‘문재인 정부 신남방정책 평가와 과제’, 참여연대, 한국동남아학회 공동주최 <문재인 정부 신남방정책, 이대로 좋은가> 토론회 발표문, 2019. 5. 16
지난해 9월 4일 울산지역 시민들이 참여한 가운데 사회적 대화가 열렸다. 군사안보 위주의 논의구조를 시민의 우선순위에 맞게 평화적으로 재구성해야 한다.
이뿐만 아니라 군 인권을 개선하고 군비를 축소해 국 제적인 군축 및 갈등 예방 논의를 선도해야 한다. 군사 법제도를 개혁하고 군대 내 인권, 군의 투명성을 강화하는 한편, 양심적 병역거부와 대체복무제를 보장하되 징벌적 성격을 축소해야 한다. 징집기간을 12개월 이내로 대폭 축소하거나 모병제로 전환해야 한다. 징병제도의 완화와 군 인권 증진은 한반도 평화프로세스에 대한 동의 기반 형성에도 매우 중요하다. 더불어 군대 대신 전문적 방재소방인력 형성, 국제 긴급구호인력 육성, 국제군 축 평화기구 유치 등에 투자하여 평화지향국가의 정체성을 강화해야 한다.
그리고 혐오, 차별을 민주적으로 통제하고 다양성과 포용의 문화를 형성해야 한다. 외부의 위협과 공포를 과장하고 내부의 문제를 외부로 전가하는 혐오와 배제의 논리를 정부와 시민사회가 함께 넘어서야 한다. 북한이 탈주민, 이주자와 난민, 이슬람, 여성, 그 밖의 다양한 정 체성을 가진 이들에 대한 차별과 폭력을 예방할 제도와 규범을 확충해야 한다. 사회적 국제적 갈등에서 사람을 중심에 두고 평화롭게 해결하는 것을 국가의 대내외 정체성으로 확보해야 한다. ‘Leave No One Behind’를 구호로 내건 유엔의 지속가능개발목표(SDG, Sustainable Development Goal)와 포용국가의 비전을 연결시키는 것도 바람직하다.
마지막으로 이런 보편적 규범을 국내외에서 추구하는 바탕 위에서 한일 과거사 문제, 특히 일본군 성노예, 강제징용 등과 관련된 논란도 한국 정부와 시민사회가 피해자 중심의 관점에서, ‘인권 기반 접근’을 통해서 제기해 나가야 한다. 같은 맥락에서 우리나라의 침략행위 지원이나 인권 침해 행위 등에 대해서도 반드시 반성해야 한다.
안보 위주 구조를 시민우선 평화구조로 재구성해야
시민 스스로 냉전대결 시대의 고정관념과 금기에서 벗어나 새로운 상상력을 발휘해야 한다. 현재 우리 정부와 시민사회의 논의 속에서는 북한뿐만 아니라 우리 스스로 무엇을 포기하고 어떻게 변화해야 할지에 대한 사회적 정책적 논의나 의제화가 매우 부족한 실정이다. 상대를 존중하고 상대의 입장에서 문제를 살펴보는 ‘역지사지’의 태도가 필요하다. ‘핵을 포기하면 고기 먹여주겠다’ 또는 ‘채찍과 당근을 골고루 사용해야 한다’는 식으로, 상대를 우리 측 의도에 따라 동물적으로 반응하는 존재로 업신여기는 태도는 바람직하지 않다. 상대방을 극복 혹은 절멸의 대상으로 보는 냉전대결적 태도도 넘어서야 한다. 이는 남북 간에도, 남한 시민사회 내에서도 모두 필요하다.
지난 2018년 이래 보수, 중도, 진보 시민단체와 종단이 진행하고 있는 ‘평화통일 비전 사회적 대화’는 정부나 ‘안보전문가’만이 아니라 시민이 역지사지를 실천할 수 있고, 갈등해결의 주체이자 주역이 될 수 있음을 잘 보여주는 사례다. 정부와 전문가들이 소위 ‘여론’을 고려해 결코 꺼내 놓지 못하는 의제를 시민사회 차원에서 본격적으로 안전하게 토론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이제 시민들이 앞장서서 지금까지 과대평가되어 온, 비현실적인 군사안보 위주의 논의구조를 시민의 우선순위에 맞게 평화적으로 재구성해야 한다. 안보전문가 가 아니라 평화전문가가 일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이제 평화에 기회를 주어야 한다. 사회적 대화는 그것을 위한 가장 좋은 수단이자 원칙이다.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운영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