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조되는 미·중 간 세력 다툼
트럼프 시기 미국의 대중 정책은 ‘포용’에서 ‘견제와 대립’ 위주로 그 기조가 바뀌었다. 이러한 기조는 미·중 세력 전이 상황이라는 구조적인 변화를 반영하고 있어 post-트럼프 시기에도 쉽사리 바뀌지 않는다는 게 정설이다. 트럼프 집권 이후 2017년 12월 출간된 『국가안보 전략(National Security Strategy)보고서』는 중국을 미국의 ‘전략적 경쟁자: strategic competitor’, ‘현존 국제 질서의 도전자: revisionist power’로 규정했다. 이는 1972년 美 닉슨 대통령의 중국 방문 이후 지난 45여 년 동안 지속해 온 대중 정책의 기조를 바꾸는 근본적인 조치였다. 그간 대중 정책의 핵심은 ‘포용’이었다. 최근 들어 본격화한 ‘포용적 견제(Hedging)’ 전략 역시 그 방점은 여전히 포용에 있다.
트럼프의 대결적인 대중 정책은 이미 후진타오-오바마 집권 말기부터 본격화한 긴장과 갈등을 반영한 것이다. 이는 중국의 급속한 부상, 불공정 행태에 따른 불만, 시진핑의 강대국화 추진전략에 대한 미국인들의 점증하는 우려와 두려움을 반영하고 있다. 최근 10여 년간 중국의 부상 속도는 미국의 예상보다 훨씬 빨랐다. 시진핑 주석은 2012년 등장 이후 2049년까지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위한 중국의 꿈을 실현하겠다고 선언하였다. 미국의 패권적 지위를 위협하기에 이른 것이다. 게다가 중국의 정치·경제 발전 전략은 미국이나 서방의 가치나 제도와는 유리된 방식을 추구한다는 인식이 분명해졌다. 이념 전쟁의 특색이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이러한 중국에 대한 트럼프의 대결 정책은 워싱턴에서 진보와 보수를 넘어 고른 지지를 받고 있다.
낙관론 우세한 미·중관계, 유동적인 한반도 정세
2018년부터 본격화한 미·중 전략 경쟁은 지난 2019년 12월 미·중 간의 제1단계 무역 협상이 타결됨에 따라 잠시 숨 고르기에 들어갔다. 그러나 이 휴전은 잠정 적일 것이란 분석이 지배적이다. 트럼프 행정부는 2020년 들어 중국의 제도와 법을 바꿀 것을 요구하는 제2단계 무역 협상으로 진전시킬 것을 중국에 요구하고 있다. 중국의 대응 전략은 일단 ‘시간벌기’다. 국민들의 강력한 열망은 물론이고 강력한 경제력, 인구, 영토, 자원, 문화 등을 두루 갖춘 중국은 소련과 같이 붕괴하지 않고 오히려 중장기전에서는 더 유리하다는 판단을 하고 있다.
2020년 미·중관계는 일단 비관론보다는 낙관론이 우세하다. 대선 정국에 들어간 트럼프가 지지기반에 타격을 줄 무리한 대중 무역전쟁을 추진하지 않는다는 게 일반적인 예상이다. 미·중 무역전쟁으로 이미 취약한 경제 기반이 흔들리고, 신종 바이러스의 창궐로 사회 불안 정성이 높아진 중국이 무리해서 미국과 갈등적인 정책을 추진하지 않을 것으로 분석하는 것도 합리적이다.
다만, 한반도 상황은 대단히 유동적이다. 강대국들은 직접적인 충돌 대신 제3의 지역에서 포석전과 대리전을 하려 하기 때문이다. 미국과 중국은 각기 북한과 한국을 자국의 영향권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지정학·전략 게임에 들어갔다고 볼 수 있다. 그 결과는 새로운 국제 질서를 형성하고자 하는 미·중의 심리나 주변 국가에 대단히 상징적인 일이 될 것이다. 현재 중국의 입장에서 한반도 관련 최적의 시나리오는 중국의 영향력 우위와 생활권을 확보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북한의 친미화를 반드시 방지해야 하고, 동시에 의미 있는 수준까지 북한의 도발을 방지하고 지역의 안보 상황을 안정시켜야 한다. 차선은 동아시아 분할 방안이다.
2017년 11월 9일 트럼프 미 대통령과 시진핑 국가주석이 중국 베이징에서 만나 대화를 나누고 있다. ⓒ연합
중국의 우위가 불가능하다면 미국의 우위를 방지하는 균형화 전략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 북한의 대중 종속화, 한국의 중립화, 일본의 복합외교 수립을 추진할 것으로 예상된다. 중국 역량의 열세를 고려한 차차선책이자 현실적인 방안은 현상 유지로, 미·중 전략 경쟁에 다른 변수가 작동하지 않게 하는 것이다. 여기서 북한의 도발 억제는 필수조건이다. 중국에 최악의 시나리오는 동아시아·서태평양 지역에서 대중 동맹 결속이 확고해지는 것이다. 중국이 추구해야 할 방안은 당장은 차차선책일 것이다. 그러나 역량 의 변화에 따라 중국은 이미 차선책을 동시에 모색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중국은 이제 두 가지 시나리오에 대비하고 있다. 하나는 미국이 중국을 더 곤혹스러운 상황으로 압박할 개연성에 대비할 것이다. 미국은 조만간 중거리 탄도미사일의 서태평양 지역 배치, 중국의 핵심이익인 대만 문제에 대한 개입 강화, 홍콩 사태에서 보듯이 민주, 자유, 인권 등의 가치문제를 바탕으로 한 중국 권위주의 정부에 대한 내부적 압박 강화 조치를 할 개연성이 있다. 다음 시나리오는 더 중장기적인 것으로 미국의 퇴조에 따른 새로운 동아시아 질서 구축 시나리오다. 두 개의 시나리오에서 북한은 중국의 완충지대이자 안전판이고, 한국은 중국이 반드시 타개해야 할 린치핀(Lynchpin)이 된다. 2020년 중국은 시진핑 방한을 비롯해 리커창 총리의 3국지도자 회의를 계기로 한 방한 등 한국과의 관계 강화를 적극적으로 추진하려 할 것이다.
2019년 국제정치 무대에서 가장 중요한 변화 중 하나가 중·러관계 강화였다. 트럼프 대통령의 미국 우선주의가 강화되자 중·러는 ‘신시대, 전면적 전략 협력 동반자’ 관계라는 새로운 협력관계를 정립하였다. 중·러는 경제적 상호의존을 강화하여, 2018년에 무역액이 사상 최초로 1,000억 불을 돌파했다. 중국은 9년 연속 러시아의 최대 무역국이고 러시아는 중국의 제10대 무역국이 되었다. ‘신시대’ 즉, 미·중 전략 경쟁의 시대에 중·러는 거의 준 군사동맹에 달하는 관계로 발전한 것이다. 이는 당연히 한반도 문제에도 적용된다. 중·러는 한반도 문제에 대해 공동 대응을 강화할 것이다. 김정은 위원장은 2019년 하노이 회담 이후 전통적인 방식의 중·러 시소게임을 통해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고자 했다. 그러나 러시아 푸틴 대통령과의 블라디보스토크 회담에서 크게 좌절하였다. 중·러가 공동의 보조를 강화하여 이제는 그럴 여지가 거의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한반도 문제는 중국이 주도하는 대로 러시아가 동참할 개연성이 더 커졌다. 북한의 ‘제3의 길’은 중국과의 관계 강화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미·중 전략 경쟁 시대에 한국은 미·중 사이에서 한쪽을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해 있다.
북한의 비핵화는 요원하다. 북한은 핵과 무력 역량 강화를 통해 상황을 반전시키려 할 것이다.
경제발전만 가능하다면 충분히 한국을 압도할 수 있다고 볼 것이다.
중국과 관계 개선 모색하는 일본
일본의 외교는 대단히 흥미롭다. 미·일 동맹 강화에 적극적이다. 동시에 미·중 간의 무역 분쟁이 격화되는 가운데도 일본은 2018년 2월 6년간 중지된 중·일 군사 당국 간 교류를 재개하였다. 8년간 중단된 중·일 고위급 경제 대화도 재개했다. 6월에는 안보 당국 간에 해상과 공중에서의 연락 제도를 운용하기로 했고, 10월에는 아베 총리가 직접 500명의 경제계 인사들과 함께 중국을 방문했다. 중·일 간 ‘평화우호조약’을 체결하고, 40주년을 기념하면서 중국과의 관계 개선을 적극 추진한 것이다. 이러한 아베의 태도는 항상 미국과 대중 정책의 행보를 같이하던 기존의 일본 대외정책과는 확연히 구분 되는 일이었다. 시진핑 주석은 이를 가리켜 “중·일 간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다”고 선언했다. 중·일은 기존 4개 정치 문건의 정신을 재확인하고, 제3국 경제 사업에 공동으로 협력하기로 했다.
일본은 시진핑 주석이 미국의 인도·태평양 구상에 대응하여 세계적인 전략으로서 공을 들이고 있는 ‘일대일 로’ 구상에 참여하는 문제에도 긍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리고 2019년 4월에는 중국 측과 6명의 장관을 참석시킬 정도로 더욱 확대된 고위급 경제 대화를 북경에서 개최했다. 더구나 11월에는 중국이 미국의 TPP 다자협 정에 대응해 공들인 RCEP 설립에 동의했다. 중국이 주도하는 지역 다자경제협력체 형성을 추인한 것이다. 물론 추후 인도의 동의를 조건으로 내세웠지만, 중·일 간의 접근 노력은 2020년에도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중·러는 이미 2020년 4월 시진핑의 방일에 합의한 바 있다. 일본의 입장에서는 미·중 전략 경쟁 시기에 불필요한 지역 내 긴장을 완화·관리하고, 2020년 동경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르는 게 중요하다. 이를 위해 중국은 물론이고 북한과도 관계 개선과 대화 재개를 추진하고 있다. 그리고 지역 강대국으로서 자신의 위상을 위협할 한국과의 갈등이나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에 대해서는 어느 정권보다 단호한 태도를 보인다. 이러한 일본의 입장은 역내 강대국으로서의 역할 강화로 나타나면서, 남북한에 대해서도 이를 인정하라는 강한 원칙적인 입장을 유지할 것으로 보인다.
2019년 12월 2일 러시아 동시베리아에서 생산된 천연가스를 중국에 공급하는 ‘시베리아의 힘’ 가스관 개통식이 러시아와 중국 양측에 TV 화상으로 연결돼 진행되고 있는 가운데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오른쪽)이 흑해 휴양지 소치에서 화면을 보며 개통식에 참석하고 있다. ⓒ연합
도전받는 한반도, 낙관론을 넘어서야 한다
2020년 주변 강대국들의 한반도 정책은 남북한 모두에게 상당한 도전을 안겨주고 있다. 미·중 전략 경쟁은 강대국들의 정책 우선순위에서 북핵이나 한반도 평화체제 사안을 후순위로 미뤄버렸다. 트럼프의 미국 우선주의는 북한의 비핵화 추진을 위해 미국이 필요한 대가를 치를 생각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김정은 위원장 역시 중·러 사이 전략적 움직임을 통해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북한의 전통적인 외교 방식 역시 추진하기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다. 결국, 제3의 길로 ‘경제적 자력갱생, 핵·미사일·전통 무력 강화, 중국과의 관계 강화’라는 전략적 결단을 내렸다. 북한은 이제 한국을 ‘파트너’라기보다는 책략의 대상으로 여기는 것 같다. 따라서 남북한 관계 개선과 남·북·미 대화를 통해 한반도 비핵화와 한반도 평화체제를 구축하려는, 문재인 정부의 노력은 어려움에 직면해 있다.
미·중 전략 경쟁 시대에 한국은 미·중 사이에서 한쪽을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다. 북한의 비핵화는 요원하다. 북한은 핵과 무력 역량 강화를 통해 상황을 반전시키려 할 것이다. 경제발전만 가능하다면 충분히 한국을 압도할 수 있다고 볼 것이다. 전통적인 우방인 미국과 일본과의 관계는 가시밭길이다. 중국과 러시아와의 신뢰관계 구축도 쉽지 않다. 모든 당사자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이대로 간다면 한반도는 강력한 불신과 대립, 군사적 압박과 군비경쟁의 강화, 경제적 파탄의 희생물이 될 가능성이 크다. 막연하고 근거 없는 의지나 낙관론을 넘어서야 한다. 어느 정치지도자도 한국의 외교·안보가 직면한 도전과 미래에 대해 해법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진지한 고민의 시간과 반추의 흔적도 보이지 않는다. 당혹스러운 2020년의 시작이다.
아주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