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urse. 1 ‘하나’를 향한 큰 걸음이 시작된 곳
기원전 1세기부터 7세기까지 한반도에는 세 개의 나라가 존재했다. 약 800여 년 동안 백제, 고구려, 신라는 저마다 전성기를 누리며 여러 차례 치열한 전쟁을 벌였다. 그리고 마침내 문무 문무대왕릉 대왕 때에 이르러 삼국은 하나의 나라가 되어 ‘통일신라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신라 29대 왕인 태종 무열왕과 김유신의 여동생인 문명왕후 사이에서 태어난 문무대왕은 이름 그대로 문무 (文武) 모두에서 발군의 능력을 갖춘 왕이었다.
‘염원’으로 남은 문무대왕의 자취를 찾아 경주로 갔다.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여명 무렵 찾아 간 그곳은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문무대왕릉 앞은 일 년 내내 문전성시를 이룰 만 큼 많은 관광객이 찾는 곳이다. 동해바다야 어디든 일출 명소지만, 죽어서도 용으로 승화해 나라를 지키겠다던 염원이 서린 수중왕릉에서의 일출을 보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찾아온 이들이다. 여기엔 이색적인 풍경도 더해진다. 각자의 소원을 빌기 위해 무속인과 함께 찾은 이들, 커다란 렌즈와 카메라를 삼각대에 얹고 환상적인 순간을 포착하기 위해 예의주시하는 이들의 눈빛까지 더해져 소란스러운 분위기가 연출된다. 수평선 너머 반짝이는 햇살이 마치 붉은 종이를 찢고 나오는 것처럼 보이는 순간 긴장감은 최고조에 이른다.
문무대왕릉 중앙 웅덩이 ⓒ문화재청
그때를 기점으로 무속인들의 타악기 소리는 점점 더 빨라진다. 누군가는 연이어 카메라 셔터를 누르고, 또 누군가는 합장한 채 쉴 새 없이 허리를 숙인다. 누구 하나 탄성을 내지르지는 않지만 서로의 속마음이 어떨지는 너무나 분명하게 알 수 있는 순간도 바로 그때이다. 다른 배경과 사연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모두 하나의 마음으로 통일되는 귀한 경험을 공유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문무대왕릉과 관련해 흥미로운 학술탐사가 1967년과 2001년 두 차례 진행됐다. ‘수중대왕 릉 안에 정말로 문무대왕의 유해가 있을까?’하는 호기심에서 시작된 탐사였다. 1967년 탐사에서는 대왕암 중앙 웅덩이 아래 유골상자와 같은 석함이 존재할 가능성이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2001년 탐사에서 문무대왕릉의 중앙을 가르는 수로를 모두 막고 물을 뺀 후 정밀 조사를 한 결과, 석함 같은 것을 덮고 있을 것이라 예상했던 커다란 바윗덩어리 아래에는 아무것도 없음이 밝혀졌다. 이와 함께 문무대왕릉이 자연적으로 발생한 암석이 아니라는 증거도 발견됐다. 바닷물이 들고 나는 십자수로에서 물이 더 잘 빠지도록 다듬은 흔적이 발견됐기 때문이다. 특히 정으로 깬 흔적이 뚜렷이 남아 있어 석공들이 문무대왕릉을 다듬었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당시 석공들이 단순히 바닷물의 순환을 돕기 위해 그 길을 다듬었을까? 해답은 자동차로 약 5분 거리에 위치한 감은사지에서 찾을 수 있다.
감은사지 동편, 삼층석탑에서 출토된 사리장엄구 ⓒ국립중앙박물관
Course. 2 새벽, 고고한 석탑과의 조우
경주에는 탑이 많다. 비록 그 유명한 다보탑과 석가탑 과 같은 실물은 볼 수 없지만 황룡사지 9층 목탑이 있던 광활한 터는 그 자체만으로도 존재감이 느껴진다. 고고한 석탑과의 조우는 늘 경이로움을 갖게 한다. 문무대왕과 깊은 연관이 있는 감은사지 삼층석탑에 얽힌 이야기는 특히 흥미롭다.
문무대왕릉에서 멀지 않은 곳에 지어진 감은사는 문무대왕이 직접 창건을 명했던 곳이다. 사후(死後) 용이 된 자신의 안식처로 삼기 위해 지은 절이었다. 그래서 『삼국유사』에도 “금당 돌계단 아래에 동쪽을 향해 구멍을 하나 뚫어두었으니, 곧 용이 절 안으로 들어와 돌아다니게 하려고 마련한 것이다”라는 대목이 적혀 있다. 지금은 논밭에 둘러싸여 있지만, 당시에는 바닷물이 금당 아래까지 들어왔다고 한다. 이는 2007년 토양 분석을 통해 밝혀낸 사실이다. 다시 말해 문무대왕릉에 조성한 인공수로는, 문무대왕이 감은사까지 자유롭게 오갈 수 있도록 만든 통로였던 셈이다.
감은사 터에 남아있는 삼층석탑
현재 감은사 터에 남아 있는 동쪽과 서쪽의 삼층 석탑은 아주 오래된 전설을 마치 어제의 사실처럼 묵묵히 품고 있다. 그 모습을 새벽시간에 마주하면, 어디에서도 경험할 수 없는 독특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를 쓴 유홍준 교수는 그 매력에 매혹돼 감은사지 삼층석탑에 대한 애정을 유감없이 드러내기도 했다. “편집자가 조건 없이 허락해준다면 감은사에 대한 답사기를 원고지 처음부터 끝까지 ‘아! 감은사, 감은사탑이여. 아! 감은사, 감은사탑이여’라고 쓰고 싶다”고 표현할 정도였다.
감은사지 앞에 덩그러니 서면, 유홍준 교수가 왜 그렇게 짝사랑과도 같은 감정을 품게 되었는지 일견 이해가 되는 순간이 찾아온다. 괜스레 두 개의 탑을 천천히 돌고 싶다는 마음이 솟아오르는 것도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그럴 때면 새벽의 고요함이 깨지 않도록 조용한 발걸음으로 탑 주위를 돌아보자. 문무대왕처럼 원대한 염원을 품지 않았더라도, 자신이 진정으로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선명하게 드러나는 신기한 경험을 하게 될지도 모르니 말이다.
Course. 3 만파식적의 선율을 찾아서
감은사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이견대가 있다. 이견대는 신문왕이 자신의 아버지이자 선왕인 문무대왕의 참배를 위해 찾았던 곳이다. 현재의 건물은 신라 건축양식을 참고해 현대에 재건축한 것이라 세월에 대한 감흥은 떨어질 수밖에 없지만 이곳에 깃든 전설은 여전히 생생하다.
이견대 ⓒwikipedia
신문왕 2년(682년), 해관이 동해에서 솟아난 작은 산이 감은사로 향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했다. 이 소식을 들은 신문왕은 천문과 점성을 담당하는 신하인 일관에게 점을 치게 했다. 일관은 용이 된 문무대왕과 신이 된 김유신이 나라를 지킬 보물을 주기 위해 다가오는 것이니 그것을 받아야 한다는 점괘를 내놓는다. 신문왕은 크게 기뻐하며 이견대에 올라 만파식적을 받았다. 한 번 불면 왜구가 모두 물러가고 백성들의 근심이 사라지게 만든다는 신비로운 피리였다. 그래서 통일신라시대 왕실에서 주관하는 다양한 제례에서는 항상 만파식적이 연주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보물을 노리는 사람과 세력이 결코 적지 않았다는 사실. 만파식적은 이미 여러 차례 분실되고 되찾는 일이 반복되었는데, 현재는 그 실물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경주라면 으레 첨성대와 계림, 천마총, 오릉 등의 명소를 떠올리는 게 일반적이다. 하지만 토함산을 넘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다면, 경주를 더 특별하게 만드는 이야기들이 훨씬 풍부해진다. 그중에서도 문무대왕과의 만남은 매우 특별하다. 스스로 깊고 거친 바다 속으로 들어가 영원히 한반도를 지키겠다는 ‘위대한 염원’과 마주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 염원은 천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파도와 함께 숨쉬고 있다.
+ Information
문무대왕릉 | 사적 158호, 경주시 양북면 봉길리 30-1
감은사지 | 국보 제112호, 경주시 양북면 용당리 55-3
이견대 | 사적 159호, 경주시 감포읍 동해안로 1480-12
신경주역에서 7번 국도를 따라 울산방면으로 향하다가 남경주IC에서 동해고속도로를 타고 10분 정도 더 들어가면 문무대왕릉에 도착한다. 뚜벅이 여행자는 경주시내에서 150번, 160번, 150-1번 버스(배차간격 확인 필수)를 타고 대왕암입구(봉길해수욕장)에서 하차하면 된다.
여행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