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ROAD

글과 독립의 길 함께한 평생의 동지
충청북도 청주·괴산

남북한 독자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은 『임꺽정』의 작가 홍명희. 그리고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명언을 남긴 역사학자 단재 신채호. 삶의 궤도에서 접점이 없을 것 같은 두 사람이지만, 둘의 인생은 꽤 여러 곳에서 하나로 합쳐지고 또 갈라진다. 1880년 몰락한 양반의 가문에서 태어난 신채호와 1888년 명문 양반가에서 태어난 홍명희는 중국 베이징에서 독립운동단체 동제사의 일원으로 처음 만난다. 잠깐의 만남이었지만 이후 둘은 평생의 우정을 나누게 된다. 두 사람의 흔적을 찾아 충청북도로 향한다. 벽초 홍명희의 고향인 괴산과 단재 신채호의 고향 청주다.

내가 단재와 사귄 시일은 짧으나 사귄 정의(情誼)는 깊어서 나의 50반생에 중심으로 경앙하는 친구가 단재였습니다. -1936년 홍명희, 「상해시대의 단재」

단재 신채호 사당 ⓒ신채호기념관

제월대 앞에 세워진 홍명희 문학비

“죽을지언정 친일하지 말라” 고택에 남은 애국의 혼

괴산버스터미널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홍범식 고택, 또는 홍명희 생가는 괴산읍을 가로지르는 동진천 바로 옆에 위치해 있다. 1730년 즈음 건축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가옥은 대문을 지나면 중문을 사이에 두고 안채와 사랑채가 나누어져 있는, 조선 후기 중부지방 양반 가옥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건물이다.

홍명희의 부친 홍범식은 1909년 금산군수로 부임했는데, 다음해인 1910년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기자 이에 항거하며 “죽을지언정 친일을 하지 말고 먼 훗날에라도 나를 욕되게 하지 말라”는 유언을 장남 홍명희에게 남기고 자결했다. 이후 홍명희가 독립운동에 뛰어든 것은 이러한 부친의 영향이 어느 정도 있었을 것이다. 고종의 국장을 보기 위해 상경한 그는 3·1운동을 목격하고 괴산에 돌아와 자신의 집 사랑채에서 손수 독립선언서를 써 유인물을 제작하고, 3월 19일 장날에 만세시위를 벌이기로 모의했다. 충북에서 최초로 진행된 만세 시위였다.

나라를 잃은 슬픔에 자결한 홍범식과, 충북지역 최초의 만세시위 발생지라는 역사적인 의미를 지닌 곳이지만 홍범식 고택이 제대로 관리되기 시작한 것은 2002년에 들어와서부터다. 1984년 중요민속문화자료로 지정되었으나 관리가 제대로 되지 못해 일부 건물이 훼손되고 안채와 사랑채, 광채 등만 남게 됐다. 아무도 돌보지 않아 문화재로써의 가치도 잃게 되었던 것을 괴산군이 매입해 복원한 후 충청북도 민속자료로 지정했다.

홍범식 고택 바로 옆으로 흐르는 동진천을 따라 올라가면 괴산을 휘둘러 흘러가는 괴강(달천)과 합쳐진다. 괴강 주변은 예부터 풍경이 뛰어나 이 주변에 경관이 아름다운 곳을 모아 고산9경이라 불렀다. 홍명희는 종종 달천을 따라 고산9경의 하나인 제월대에 올랐다고 한다. 이곳에는 홍명희를 기리는 문학비가 세워져 있는데, 그 주변에는 평화와 통일에 대한 소망을 담은 디딤돌이 문학비를 받치고 있다.

사실 홍명희의 흔적은 우리보다는 북한에서 찾는 것이 더 쉬울지도 모른다. 1948년 월북한 그는 6·25전쟁 이후 북한에서 부수상 자리까지 올랐다는 이유로 역사 속에서 잠시 행적을 감췄다. 지금도 그의 생가와 문학비 옆에는 북한에서의 그의 행적을 규탄하는 현수막이 붙어 있고, ‘홍명희 생가’보다 아버지인 ‘홍범식 고택’으로 더 알려져 있을 정도니 말이다.

홍명희 문학비를 찾아가는 길도 결코 쉽지 않다. 지도에도 표시되지 않고, 주소대로 찾아가도 펜션건물 옆에 작고 초라한 ‘제월대’라는 간판만 보일 뿐이다. 펜션 주차장 한쪽에 세워져 있는 문학비는 쓸쓸해 보이기까지 한다. 문학비가 세워지는 데까지 우여곡절도 많았다. 해방 후 그의 행적을 두고 찬반 의견이 강하게 대립하며 1998년 세워졌던 문학비가 한 차례 철거되고 2000년에 다시 세워진 것이 지금의 문학비다.

문학비 앞에는 제월대로 오르는 길이 있다. 조선 선조 때 충청도 관찰사로 왔던 유근이 이곳의 풍경에 푹 빠진 나머지 이곳에 만송정이라는 정자를 짓고 이후 고산정으로 개칭했다고 한다. 아래쪽으로는 괴강이 흐르고 앞으로는 자연 경관이 수려해 현재 충청북도기념물로 지정돼 관리되고 있다. 지금은 2칸짜리 팔짝지붕 정자만 우두커니 정상을 지키고 있다.

단재신채호기념관 및 사당 ⓒ신채호기념관

청주예술의전당 앞에 조성된 단재 신채호 동상

문학비 아래 평화통일의 염원을 담은 디딤돌

짧은 만남, 평생의 인연

홍명희는 부친의 3년상을 마치고 1912년 중국으로 향한다. 중국에서 그는 ‘동제사’라는 독립운동단체에 가담하며 본격적인 독립운동의 뜻을 품었다. 독립운동 활성화를 위해 청년 교육에 특히 힘썼던 동제사는 1913년 상하이에 박달학원을 설립하고 중국 동포 자녀들의 독립운동을 고취하는 데 주력했다. 이때 홍명희는 신채호, 박은식, 조소앙 등을 만나 교류하며 친분을 쌓았다.

특히 신채호와의 우정은 특별했다. 홍명희가 7년간의 해외 생활을 청산하고 귀국하면서 두 사람은 다시 만나지 못했으나 1936년 신채호가 옥사한 후 홍명희가 쓴 「상해시대의 단재」에서 그는 ‘자신의 생에서 마음으로 경앙하는 친구가 단재였다’고 고백했다.

신채호가 태어난 곳은 대전 중구 어남동이지만, 그가 일곱 살 되던 해 부친이 사망하자 그의 조부가 가족들을 데리고 청주로 이사했다. 그가 어린 시절을 보낸 집터(현재 귀래동 도드미 마을)에는 신채호기념관과 사당이 세워졌고, 그 옆으로 신채호의 묘소가 조성돼 있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던 신채호는 한번 슬쩍 본 것도 내용을 복기할 정도로 기억력이 좋았다고 한다. 아홉 살이 되던 해 「자치통감」을 해독한 것을 기념해 그의 할아버지가 심은 모과나무는 지금도 신채호의 묘소 옆에서 해마다 모과 열매를 맺는다.

신채호기념관에는 그의 업적을 정리한 자료들과 유품이 정리돼 있는데, 그가 생의 마지막을 보냈던 뤼순 감옥에서의 생활을 담은 사진, 수형표·수형모자, 허리를 굽히지 않고 세수를 했을 만큼 강직했던 그의 성품을 보여주는 세숫대야, 중국 곳곳을 오가며 집필한 「독사신론」, 「조선상고사」 등 역사서와 「꿈하늘」, 「을지문덕전」 등의 문학작품들을 만나볼 수 있다.

충북도청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 주택이 즐비한 오르막길을 걷다보면 나오는 ‘충북문학관’은 원래 충북지사의 관사로 사용되던 건물이다. 1939년 건립된 건물에서 2010년까지 71년간 총 28명의 도지사들이 거주했다. 일재의 잔재였던 이곳은 2012년 9월 충북의 문화와 예술을 담은 충북문학관으로 용도를 바꿔 개관 했다.

충북문학관 문화의 집에서는 충북의 각 지역을 대표하는 문인 12명을 한자리에서 만날 수 있다. 청주의 신채호·신동문, 괴산 홍명희, 증평 김득신, 충주 권태응 등 각 지역 대표 문인들의 삶의 궤적과 작품 감상과 함께 관사로 처음 건립되었던 당시의 건축을 그대로 보존해 건축의 역사도 함께 감상할 수 있도록 했다.

문화의 집 옆으로는 숲속갤러리, 야외공연장 등이 조성되어 있어 지역 주민들이 찾아와 여가를 즐기기에 안성맞춤이다. 근처에 충북도청과 향교 등 충북의 역사와 문화를 볼 수 있는 곳도 있으니 시간을 내 충북의 역사를 둘러보는 것도 좋겠다.

같은 시대, 같은 지역에서 나고 자란 홍명희와 신채호는 글과 독립, 애국과 역사라는 공통의 관심사로 마음을 나눴다. 두 사람 모두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단신으로 타국에 건너가 새로운 곳에서 나라의 독립을 꿈꾸기도 했다. 함께 보낸 시간은 짧았으나 이런 공통점이 있었기에 평생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인연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홍명희와 신채호의 인연을 보며 다시 한 번 생각해 본다. 어쩌면 함께 보낸 시간의 양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시간의 밀도가 아닐까.

청주예술의전당 앞에 조성된 단재 신채호 동상

문학비 아래 평화통일의 염원을 담은 디딤돌

7, 8 충북문학관 문화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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