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1
접경지역의 평화경제적 접근
지역주민의 삶에 기반해
평화경제 구현해야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2019년 3·1절 100주년 기념사와 제74주년 광복절 경축사에서 한반도의 운명을 바꾸는 일은 ‘평화경제 실현’에 있다고 밝혔다. 평화경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앞으로 구체화해 나가야 하지만, 문 대통령이 밝힌 평화경제의 실마리는 “분단이 더는 우리의 평화와 번영에 장애가 되지 않게 해야 합니다”라는 연설에서 찾을 수 있다. 평화 경제는 북한이 핵이 아닌 경제와 번영을 선택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여 새로운 한반도의 문을 열어나가는 과정을 의미한다. 결국 분단이 만들어 낸 왜곡된 사회·경제적 환경을 바꿔야 지속가능한 발전이 가능하다.
평화경제,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사회현상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좋은 개념이 필요하지만, 좋은 개념이 반드시 있어야만 사회현상을 분석하고 적절한 처방을 내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평화경제’는 분석적 개념(Analytic Concept)이라기보다는 정책 지향적 개념(Policy Oriented Concept)이며, 비전, 전략, 정책, 실행, 평가 등 종합적인 로드맵에 기초해서 이해해야 한다. 따라서 평화경제는 정책 실행과 평가 및 검증의 절차적 과정을 통해 구성되는 ‘과정으로서의 개념(Concept as a Process)’이자, 정책의 실효성에 따라 유연하게 재구성할 수 있는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개념 (Socially Constructed Concept)’으로 이해할 수 있다.
평화경제는 경제 논리와 평화 중 어느 것이 우선 된다고 주장하기보다 두 가지가 상호보완적인 선순환 관계를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는 주장을 내포하고 있다. 달리 말하면, 평화경제는 전쟁과 분단으로 왜곡된 삶의 환경을 청산하고, 분단의 고통을 치유하는 과정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평화경제 개념에 기반한 정책들은 물리적 평화가 경제적 평화로 전환하는 적극적 평화의 구현이라는 목표를 추구한다.
2020년 1월 16일 설 연휴를 앞둔 경기도 파주시 문산자유시장이 아프리카돼지열병(ASF)에 따른 비무장지대(DMZ) 관광 중단으로 한산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연합
정부의 정책은 구상과 선언의 형식으로 발표되지만, 그 성패에 대한 평가는 정책이 현장에서 어떻게 구현되는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평화경제라는 정책적 개념을 경험적으로 관찰하고 평가하기 위한 프레임이 요구된다. 아직 합의된 지표나 범주가 없기 때문에 다양한 분야에서 그에 대한 논의가 이뤄져야 한다.
남북 접경지역의 평화경제 효과
정책 평가를 위하여 우선 평화경제의 물질적 편익을 고려할 수 있다. 국가 간 관계에서 평화경제는 정치적 갈등의 해소와 경제적 상호의존의 불확실성 감소 등과 같이 (신)기능주의적 입장에서 논의되어 온 개념적 요소 들을 바탕으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개성공단 사업의 재개, 금강산관광의 재개, 그리고 민간차원 교류사업의 활성화 등을 통해서 발생하는 편익을 평화경제의 효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것으로만 평화경제를 평가한다면 물질적 편익으로 나타나는 긍정적 효과는 단 기간에 찾기 어렵다.
평화의 경제적 효과에 대한 공간적 범위를 남북관계의 시각에서 벗어나 한국 사회 또는 국제관계의 차원에서 바라볼 수도 있다. 남북한이 한반도에서 평화를 구축해 나가는 과정에서 국내에서도 다양한 형태로 남북협력의 정책적 효과가 나타날 수 있다. 즉, 2018년의 남북 정상회담과 이어진 실무회담에서 논의된 군사적 대결 해소를 위한 정책이 남북에서 실현된다면 독자적인 효과를 낼 수 있을 것이다. 구상과 선언에 제시된 것이 실제 정책으로 이어져야 남북관계 개선을 위한 정치적 결단과 집행도 국민들의 지지를 받을 수 있다.
평화경제의 사례로 당장 내세울 것은 많지 않지만, 접경지역을 중심으로 나타난 변화를 긍정적으로 평가해볼 수 있다. 우선 남북한의 군사적 합의에 따른 조치를 통해서 2019년 4월부터 서해 5도에서 조업 규제가 완화 되어 어장이 확대되고 조업 시간이 연장되었다. 이로 인하여 이 지역의 경제적 가치가 10% 이상 증가할 것으로 예상되며, 추가적인 어로 확대가 이어진다면 더 많은 경제 효과가 있을 것이다.
군사적 이유로 접근이 통제되었던 지역에 민간인의 출입이 허용되면서 지역의 경제적, 사회적 생태가 달라지는 곳도 있다. 일반적으로 접경지역은 육상의 DMZ를 접하고 있는 지역을 의미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철책으로 가려진 해안선들도 접경지경으로 이해될 수 있다. 강원도 동해안의 정동진과 심곡항을 연결하는 ‘정동심곡 바다부채길’은 2년여 동안 100만 명 이상의 관광객이 다녀가면서 마을 경기가 부양되었다. 한반도의 군사화로 접근이 불가능했던 이 공간이 민간경제 활성화의 주역으로 거듭나고 있다.
강원도 동해안의 정동진과 심곡항을 연결하는 정동심곡 바다부채길
철책으로 가려진 해안선들도 접경지경으로 이해될 수 있다.강원도 동해안의 정동진과 심곡항을 연결하는 ‘정동심곡 바다부채길’은 2년여 동안 100만 명 이상의 관광객이 다녀가면서 마을 경기가 부양되었다. 한반도의 군사화로 접근이 불가능했던 이 공간이 민간경제 활성화의 주역으로 거듭나고 있다.
지금은 아프리카 돼지열병 때문에 사실상 중단된 상태이지만 고성, 철원, 파주의 DMZ 평화의 길은 지역경제 활성화에 기여하고 있다. DMZ의 평화적 이용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고조되면서 걷기 대회의 형식을 빌린 현장 탐방의 기회가 늘어나고 있다. 현장 탐방의 내용도 남북한 대결의 현황을 이해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지역의 생태환경 및 인문·지리적 특성을 이해하기 위한 것으로 채워지고 있다. DMZ 평화의 길이 계속 주목을 받을 수 있다면 과거 안보체험의 공간이었던 DMZ를 어떻게 평화적으로 활용할 것인가에 대한 담론 활성화에 기여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지역주민의 삶을 위한 평화경제 필요
남북한의 평화 분위기 조성은 접경지역의 행정 조직을 변화시키고 변화와 사업의 성격을 바꾸기도 했다.각 지방자치단체가 평화발전 또는 남북교류를 키워드로 남북협력과 지역 재생을 연계하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다. 국가정책의 관심에서 멀리 떨어져 있던 접경지역의 주민들은 지역의 비교우위가 있는 상품, 산업, 환경을 재평가하고, 장기적인 발전전략을 수립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물론 제안되는 많은 사업이 중앙정부의 재정지원을 필요로 하기에 정책으로 구현되는 사례가 많지 않다며 정책 개발에 신중해야 한다는 비판도 있다. 그런데도 접경지역 지자체가 해당 지역의 현황을 파악하고 미래전략을 주도적으로 구상해볼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이러한 현상을 평화경제의 또 다른 긍정적 측면이라고 볼 수 있다.
2020년 2월 10일 평창 알펜시아 컨벤션센터에서 평창평화포럼 평화경제 세션이 한창이다. ⓒ평창평화포럼 공식 홈페이지
남북한의 화해무드는 국가 안보라는 명분으로 피해를 감내해야 했던 접경지역 지자체와 주민들에게 많은 기대를 품게 했지만, 아울러 실망감도 안겨주었다. 고령화가 빠르게 진행되면서 마을 소멸의 위기를 겪고 있는 접경지역 주민들에게 통일이라는 장밋빛 미래도 중요하지만, 지금 당장 마을을 살려 나가는 것이 더욱 절실하다. 접경지역의 국제적 평화지대화를 추구하는 많은 정책이 한반도 평화 구축에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렇다고 접경지역에서 오늘을 살아가는 주민들의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는 관심을 가 지지 않으면서 거대 담론만을 반복적으로 논하는 것에 대해서 정책전문가들이 진지하게 반성할 필요가 있다. 정책의 갑작스러운 전환으로 피해 받는 사람들의 삶은 회복되기 어렵기에 평화를 담보로 이 지역에서 정책을 실험하는 것에 대해 신중해야 한다.
평화경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사람마다 다르게 이야기할 수 있다. 또 아직 평화경제를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인 정책들이 무엇인지도 분명하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평화경제의 구현이라는 정책 목표의 타당성에 대해서 섣불리 평가하는 것도 적절하지 못하다. 그러나 접경지역 주민들의 문제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먼 미래의 당위적 문제만을 설파하는 통일담론과 평화담론은 더 설득력을 가질 수 없다는 점은 분명하다. 통일과 평화경제 관련 정책이 지역의 현안과 어떻게 연계될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이 병행되어야 한다.
평화경제, 지속 추구해야 할 정책의 과정이자 목표
통일정책과 대북정책은 청와대와 중앙정부가 주도하는 의제이지만 평화경제라는 프레임으로 접근하고자 한다면 선언적이고 당위적인 정책을 제시하는 것을 넘어서 현장에 기반을 둔 실험적 정책이 요구된다. 남북관계 또는 대북제재 상황에 상관없이 추진할 수 있는 남북한의 합의 사항을 이행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런데 접경지역 주민들이 중앙정부의 정책이 언제든지 바뀔 수 있다는 의심을 거두지 않는 한 구태의연한 통일 또는 평화 만능론적 접근은 접경지역 발전의 동력이 될 수도 없고 평화경제의 확산도 기대하기 어렵다.
접경지역을 넘어서 전국 단위에서 평화경제는 어떻게 구현될 수 있을까? 평화경제는 앞으로도 계속 추구해야 할 정책의 과정이자 목표라는 점에서 대부분의 문제를 제재 탓으로 돌리는 환원론적 프레임은 더 유효할 수 없다. 지금은 평화경제의 기반 구축과 확산을 위해 현장의 상황을 충분히 고려할 줄 알고 정치적 비용을 감수할 수 있는 정치적 리더십이 현실론적 리더십보다 더 크게 필요한 시기이다.
송 영 훈
강원대학교 통일강원 연구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