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고장 평화 ROAD
독립운동 흔적과
분단의 아픔을 간직한 대구
내 고향 대구. 무엇을 이야기할까? 막상 대구를 떠올려보니 생각나는 것이 딱히 없다. 그럼 사람들이 말하는 대구는 어떤 이미지일까? ‘보수’의 도시. 과연 대구는 그것뿐일까? 시나브로 학창 시절이 스쳐 지났다.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교가에 ‘팔공산’이 빠지지 않았다. 일단 추억 가득한 팔공산으로 향했다.
Course 1. 대구 독립운동 유적지, 팔공산
대구 사람들에게 가장 보편적인 휴식처인 팔공산. 경북 군위와 영천과 이어져 있는 산이다. 여름에는 계곡에서 물놀이를 즐기고, 산세가 좋아 등산으로도 유명한 곳이다. 팔공산 하면 빠질 수 없는 것이 바로 불교문화다. 대표적인 사찰인 동화사 외에도 은해사, 파계사, 부인사, 송림사, 관암사 등이 있으며 비로암, 부도암, 양진암 등 많은 암자도 자리하고 있다. 먼저 동화사로 향했다. 가족, 연인들의 소풍과 데이트 장소이기도 하다. 동화사는 신라시대 창건한 사찰이며 대웅전, 극락전을 비롯 연경전, 천태각 등 20여 채의 건물이 있다. 대웅전을 둘러보니 아주 웅장하지는 않지만, 국화꽃 문양의 문짝이 소박하면서도 아름답게 자리하고 있다.
한 가지 소원을 지극히 빌면 이루어지는 팔공산 갓바위
동화사는 항일 독립운동 유적지이기도 하다. 팔공산은 대한제국 시절 ‘삼남의진’이라는 의병부대가 활동한 곳인데 그중 동화사는 의병장 우재룡이 의병 활동의 본부로 활용했던 곳이다. 우재룡은 의병 활동 중 1907년 8월 일본군에 붙잡혀 종신형을 선고받고 투옥되었다. 또한 동화사는 1919년 3월 독립운동의 결의 장소다. 3·1 운동을 겪은 중앙학림 학생 윤학조가 동화사의 젊은 승려들을 독려해 만세운동을 조직하고 이끌어 갔다. 이후 젊은 승려들은 동화사 아래 미대동과 백운동에서 만세 운동을 펼쳤는데 당시 나이 평균 20세 안팎이었다. 동화사에는 많은 문화재가 있다. 1992년 높이 30m나 되는 석불인 약사대불이 조성되어 있는데 이것은 남북 통일을 기원하며 조성되어 ‘통일대불’이라고도 불린다. 더불어 팔공산에는 한 가지 소원을 지극히 빌면 꼭 들어준다는 갓바위도 자리한다.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기원하는 30m 높이의 약사대불
Course 2. 경산 코발트광산, 2·28 민주화운동과 인혁당 사건
대구는 대표적인 ‘보수의 도시’라고 알려졌지만, 그 역사를 꼼꼼히 살펴보면 분단의 아픔과 민주화와 통일 운동의 역사가 자리한 곳이기도 하다. 1960년 이승만정권의 부패와 무능에 맞서 대구지역 8개 고등학교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2·28 민주화운동이 대표적이다. 대구와 인접한 경산 코발트광산은 6·25전쟁 당시 보도연맹 사건에 관련한 사람들과 무고한 양민들이 군경에 의해서 무참히 죽어간 분단의 아픔이 서려 있는 현장이기도 하다.
경북대학교 사회과학대학 앞에는 인혁당 사건 희생자들을 위한 추모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인혁당 사건은 박정희 정권 시절 중앙정보부가 ‘국가 변란을 목적으로 북한의 지령을 받는 지하조직을 결성했다’고 발표하며, 당시 진보적 인사와 언론인, 교수, 학생 등을 검거한 일이다. 1961년 5·16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한일협정 체결을 반대하는 대규모 학생 시위가 벌어지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대대적인 검거령을 내렸는데 당시 중앙정보부가 시국을 수습하기 위해 만들어낸 대표적인 사건이다.
경산 코발트광산 희생자 위령탑
1974년 4월 민청학련 사건이 발생하자 1차 인혁당 사건 관련자들을 다시 구금하여 수사했다. 5월 비상보통 군법회의는 민청학련사건과 관련해 인혁당 재건위가 민청학련을 배후에서 조종했다고 발표하며, 23명에 대해서 내란 예비와 음모 등의 혐의를 추가하여 기소했다. 1974년 7월 11일에 열린 비상보통군법회의 공판에서 재판부는 7월 8일 군검찰부가 구형한 그대로 인혁당 재건위 사건 관련자 23명 가운데 서도원, 김용원, 이수병, 우홍선, 송상진, 여정남, 하재원, 도예종 등 8명에 대해 사형을 선고했고, 1975년 4월 8일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상고를 기각하여 이들의 형량을 확정하여 판결이 확정된 지 18시간밖에 지나지 않은 1975년 4월 9일 8명에 대한 사형을 바로 집행했다. 국제앰네스티는 다음날인 4월 10일 사형 집행이 ‘사법살인’이라며 항의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2000년 의문사신상규명위원회는 인혁당 사건을 재조사하여 2002년 인혁당 사건이 고문에 의해 조작, 과장된 것이라고 밝혔다. 그해 인혁당 재건위 사건의 피해자들과 유족은 재심을 청구했고, 2007년 서울중앙지법은 사건에 연루되어 사형이 집행된 8명에 대해 무죄를 선고하였다. 당시 여정남, 도예종 등 8명의 사형수 중 5명이 대구 출신이었다.
대구 동성로 2·28 공원에 있는 2·28 찬가 기념비
또한 1946년 미군정의 수탈에 맞선 10월 항쟁도 대구에서 비롯됐다. 9월 노동자 파업 이후 10월 1일 시위에 대구 시민 1만여 명이 모이자 경찰은 시위대를 향해총구를 겨눴다. 이들은 산으로 들어가 좌익 활동에 나섰다. 대구 팔공산의 일명 ‘야산대’는 6·25전쟁 전 좌익 빨치산 활동의 시초 가운데 하나다. 대구는 ‘조선의 모스크바’라고 불리기도 했다.
경북대 사회과학대 앞에 있는 여정남 공원
Course 3. 시대와 삶을 노래한 가객 김광석의 고향, 대구
그럼 대구를 대표하는 문화예술인은 누굴까? 몇 년 전 조성된 ‘김광석 거리’가 생각났다. 최근에는 외국인 관광객까지 찾아오고 있다는 ‘김광석 다시 그리기 길’. 대구 대봉동 방천시장 골목에 위치한 김광석 거리는 그의 삶과 음악을 주제로 조성한 벽화 거리다. 약 350미터 길이의 벽면을 따라 김광석의 모습과 그의 노래 가사들이 다양한 벽화로 그려져 있다. 매년 가을이 오면, ‘김광석 노래 부르기 경연대회’를 개최하여 김광석을 추억한다.
1964년 대구에서 태어난 김광석은 1982년 명지대 대학 연합 노래패에서 본격적으로 노래를 시작했다. 민주화운동이 활발했던 당시의 시대정신과 청년들의 저항정신을 노래로 표현했고, 노래 동아리 ‘새벽’과 ‘노래를 찾는 사람들’에서 활동했다. 이후 동물원에서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 <거리에서> 등의 메인 보컬을 담당했고, 이후 활발한 솔로 활동을 이어가다 1996년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했다.
가객 김광석 거리
학창시절 김광석 노래를 많이도 듣고 불렀다. 사랑과 이별을 주제로 노래하면서도 그만의 철학이 있었다. 그는 시대를 이야기하면서도 공감과 위로를 전해주는 가수였다. 김광석의 노래는 북한에서도 인기가 많다고 한다. 박찬욱 감독의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의 영향 때문이다. 영화 속에서 한 인민군 병사가 <이등병의 편지>,<부치지 않은 편지>를 부르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로부터 몇 년 후 북한에서 열린 남북음악회에서 김광석의 노래를 따라 부르는 평양 시민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팔공산과 경북대를 둘러보니 대구는 독립운동과 분단의 흔적을 담고 있는 곳임을 알 수 있었다. 더불어 김광석 거리를 다녀보니 ‘시대의 아픔을 담고 있는 대구를 위로하기 위해 그가 이곳에서 태어나 여전히 사람들의 마음을 노래하고 위로하고 있는 게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봄이다. 겨울을 이겨낸 새로운 생명이 다시 기지개를 켜고 태어나는 계절이다. 3·1 운동 101주년. 격동하는 2020년, 한반도의 평화를 기대하며 내 고향 대구에 따뜻한 ‘평화의 봄’이 오길 기대해 본다.
+ Information
팔공산 도립공원(동화사) : 대구광역시 동구 팔공산로 199길 6-1
김광석 다시 그리기 길 : 대구광역시 중구 달구벌대로 2238
[대구시티투어버스] 연중 운행(09:00~17:50, 60분 간격, 1일 7회)
도심순환형코스 : 동대구역 → 대구국제공항 → 삼성창조캠퍼스/
오페라하우스 → 김광석다시그리기길 → 동성로 → 근대문화골목 →
청라언덕역/서문시장 → 이월드·두류공원 → 안지랑곱창골목 →
앞산전망대 → 수성못 → 국립대구박물관
김 성 헌
사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