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시대 Vol 1612020.03

2019년 6월 30일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판문점 남측 자유의집을 나서며 얘기를 나누고 있다. ⓒ연합

진단

평화프로세스 재가동,
합의 실천과 한·미 협력 중요

2020년 벽두, 국제정치는 미국의 이란군 사령관 살해로 시작됐다. 핵확산금지조약(NPT) 발효 50주년에 접어들며 세계는 북한과 이란의 핵 문제에 동시 대처해야 하는 숙제를 안고 출발했다. 그러나 미국이 두 곳의 핵 문제를 해결할 의지가 있는지 의문이다. 다자 합의에 의한 기존의 이란 핵 동결 프로세스를 트럼프 정부가 파기한 것이나, 싱가포르 북·미 공동선언 이행에 관한 미국의 소극적인 태도로 볼 때 그러한 우려가 과도한 것은 아닐 것이다.

한반도는 비핵화 문제와 함께 강력한 지정학적 자장(磁場)이 흐르는 복합 분쟁지역이라는 점에서 역내 시민들을 긴장시키기에 충분하다. 한·미관계에서는 미래 동맹의 방향성에 대한 공감대 형성이 미흡한 가운데 방위비 분담금과 유엔 사령부의 역할 등 현안을 둘러싼 입장 차이가 나타나고 있다. 트럼프 정부 들어 한·미 간 방위비 분담금 협상은 미국 측의 대폭적인 인상(50억 달러) 요구로 긴 협상의 터널에 들어가 2020년 2월 21일 현재까지 타결되지 못하고 있다.

미국은 한국의 경제성장을 반영한 적정 분담을 명분으로 하고 있지만, 대선을 앞둔 트럼프 대통령의 국내 정치용이라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방위비 분담을 둘러싼 한·미 간 입장 차이가 한·미동맹의 미래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지는 않겠지만, 위 사안과 함께 남북 교류 협력에 대한 유엔사의 비협조 논란, 그리고 영화 <기생충>의 아카데미상 수상을 비난한 트럼프 대통령의 모습은 우리 국민의 대미 인식에 좋지 않은 영향을 줄 것이다.

북·미 협상 교착과 북한의 정면돌파전
북한은 작년 12월 말 열린 노동당 중앙위원회를 통해 ‘정면돌파전’을 새로운 구호로 제시하며 고립주의적 정책 방향을 천명했다. 북한 관영 언론은 정면돌파전을 결의한 배경으로 북·미 협상 교착과 미국의 적대 정책을 꼽았다. 북한 설명에 따르면 정면돌파전은 대외적으로 적대세력들의 ‘반공화국 고립압살책동’에 대항하기 위한 공세전이고, 대내적으로는 국가의 ‘발전 잠재력을 총 발동’하며 그에 방해되는 요소들을 없애기 위한 투쟁 등 두 방향으로 진행된다. 북한 입장에서는 미국으로부터 구속력 있는 안전보장은 커녕 신뢰 조성 차원의 제재 완화도 얻지 못했기 때문에 먼저 비핵화의 길로 갈 수는 없었을 것이다.

스톡홀름 북·미 접촉(2019.10.5.) 결렬 다음 날 북한 외무성은 “미국이 생존권과 발전권을 저해하는 대조선 적대시 정책을 철회하기 위한 실제적인 조치를 하기 전에는 협상할 의욕이 없다”고 주장하기에 이른다. 한편 남북관계에 대해서도 북한은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실패 이후, 남한을 비난하며 대화에 응하지 않고 있다. 북한은 한·미연합훈련, 한국의 미제 첨단무기 도입을 ‘남북 군사합의 위반’이라 주장하며 대남 압박을 가해왔다. 북한은 또 “북남관계 문제를 그 누구의 승인이 아니라 민족자주의 원칙에서 풀어나가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말하자면 북한은 안보 문제만큼은 미국을 주 대상으로 삼아 협상을 추구해왔는데, 핵 능력 향상에 힘입어 경직된 태도를 보인다. 다만, 강력한 제재가 지속될 경우 북한은 고립 타개와 경제적 실리 획득 차원에서 남북 대화에 응할 가능성을 남겨두고 있다.
대북제재와 대화 병행의 한계
지난 2019년을 되돌아보면 미국은 북한과의 비핵화 협상에 적극적인 입장과 소극적인 입장을 동시에 보였다. 그 이면에는 북한의 완전한 핵 폐기 이전 제재 해제는 곤란하다는 보이지 않는 공감대가 형성돼 있다. 대북 협상에 적극적인 흐름은 북·미 정상회담에 응한 트럼프 대통령을 비롯한 대북 협상진에서 시작됐다. 북·미 간 최초의 회담인 싱가포르 정상회담과 그 이후 하노이 정상회담, 판문점 회동 등이 협상의 주요 경과였다. 대북 협상팀은 비건 대표가 주동이 되어 비핵화가 되면 북한에 밝은 미래를 보장할 수 있고, 이를 위해 “타당성 있는 단계와 유연한 조치를 통해 균형 잡힌 합의에 이를 준비가 되었다”며 대화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그러나 북한이 협상의 문턱을 올려놓고 ‘정면돌파전’을 선언한 이상 대북 협상팀의 입지는 넓어지기 어렵다. 미국에서는 대북 협상론보다는 압박론이 우세하다. 북한을 ‘불량국가’, ‘악의 축’으로 보고 압박 위주의 접근을 지지하는 여론이 높다. 대북 압박론자들은 북한의 비핵화 범위에 핵·미사일은 물론 화생방 무기도 포함하고, 북한의 확실한 비핵화 조치 및 그에 대한 검증 이전에 큰 양보는 곤란하다는 입장이다. 북한에 대한 부정적 인 인식과 압박 위주 접근의 선호를 트럼프 대통령도 공유하고 있을 것이다. 그 결과 트럼프 정부의 대북정책은 완전한 비핵화를 목표로 대화와 압박을 병행한다는 입장으로 확립되었고, 이는 트럼프 2기나 정권 교체가 이루어져도 지속될 것이다.

문제는 그런 접근이 북한의 비핵화를 유도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사실이다. 단기적으로 미국은 2020년대 선 가도를 달릴 것이기 때문에 대북 협상에 나설 가능성은 작다. 다만, 북한의 핵·미사일 실험 중단 상황을 지속하기 위한 상황관리 차원에서 북·미 대화에 나서거나 남북 대화, 북·중 대화를 지지할 수 있다. 이는 한국 정부가 남북협력에 더욱 적극적으로 나설 필요성을 시사하고 있다.
한국의 남북, 북·미 협력 병행
한국 정부는 한반도 문제의 당사자로서 남북, 북·미, 한·미 간 소통과 신뢰를 기반으로 남북관계와 비핵화·평화 정착의 선순환적 진전을 이루겠다는 입장이다.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결렬 이후에도 한국은 남북 합의 이행을 위해 미국 측과 긴밀히 협의하는 한편, 남북 대화 제의를 기회 있을 때마다 내놓았지만 북한은 완고한 태도로 일관했고, 지금까지 당국 간 대화는 중단되고 있다. 최근에는 코로나19 사태로 그나마 운용해오던 개성 남북공동연락사무소마저 폐쇄된 상태다.

평화프로세스를 재가동하기 위해서는 불신을 줄이고 신뢰를 높이는 방안을 만들어야 한다. 그것은 2018년 남북이 합의하고 초보적인 실천을 모색한 바를 본격 실천하는 일이다. 그 주요 내용은 문 대통령이 밝힌 5대 제안이다. 이를 위해 한·미 간 긴밀한 소통을 하며 제재와 교류협력을 병행하고 유엔사(곧 미국)가 남북 교류협력의 군사적 보장에 협조하는 것이 중요하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1월 7일 신년사를 통해 북한 에 5대 협력사업을 제안했는데, 그것은 모두 기존에 합의한 내용이다. 5대 제안은 체육협력, 철도·도로 연결 사업, DMZ 국제평화지대화, 개성공단·금강산관광 사업 재개, 김정은 위원장 답방 등으로 사실은 7개 사안이다. 문 대통령의 제안은 한반도 평화프로세스를 남북 협력 주도로 다시 이끌어내겠다는 의지를 담은 것이다. 신년사에서 문 대통령은 “북·미 대화의 성공을 위해 노력하는 것과 함께 남북 협력을 더욱 증진해 나갈 현실적인 방안을 모색할 필요성이 더욱 절실해졌다”고 판단했다. 사실 체육, 보건, 산림 분야에서의 협력은 지금이라도, 아니 시급히 필요한 남북협력 영역이다.
남·북·미 관계 선순환은 한·미 협력에서 출발
핵 능력을 고도화한 김정은 정권이 ‘정면돌파전’을 벌이기 시작한 것은 한반도 평화프로세스에 도전 요소로 작용할 것이다. 대선 국면에 들어선 트럼프 행정부가 본격적인 대미 협상에 나서지 않을 가능성도 그렇다. 2018년 남북 주도의 남·북·미 선순환 관계 형성은 2019년 북·미 협상이 실패하면서 남·북·미 관계 악화로 전환되었다. 새로운 대화 동력을 불어넣어 다시 남·북· 미 선순환 관계의 재등장이 필요한 시점이다. 문재인 정부가 그 역할을 자처하고 나섰다. 그러한 의지에도 불구하고 단기적으로는 위와 같은 이유로 본격적인 평화프로세스 재가동은 어렵다. 최선이 아니면 차선을 택하되 때를 준비하는 것이 상책이다.

관련국 사이에서는 북한이 핵·미사일 실험을 재개하거나 국지도발을 하지 않도록 대화의 계기를 만들고, 비정부 차원에서는 평화프로세스의 경로와 추진 방안에 관한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이 적절한 목표치다. 이것도 가만히 있으면 저절로 얻어지지 않는다. 북핵 협상 유지 하에서 대화 동력을 얻고 여건이 조성되어야 한다.

2020년 2월 25일 미국을 방문 중인 정경두 한국 국방부장관이 24일(현지시간) 워싱턴 D.C. 국방부 청사에서 마크 에스퍼 미 국방장관과 회담을 가진 뒤 공동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
평화프로세스를 재가동하기 위해서는 불신을 줄이고 신뢰를 높이는 방안을 만들어야 한다. 그것은 2018년 남북이 합의하고 초보적인 실천을 모색한 바를 본격적으로 이행하는 일이다. 그 주요 내용은 문 대통령이 밝힌 5대 제안이다. 이를 위해 한·미 간 긴밀히 소통하며 제재와 교류협력을 병행하고, 유엔사(곧 미국)가 남북 교류협력의 군사적 보장에 협조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는 한·미 협력으로 남북, 북·미 협력을 이끌어내는 유력한 방식으로 ‘통미봉남’과 같은 북한의 나쁜 행태를 차단하는 데 그치지 않고 평화프로세스를 본격적으로 가동하는 데 기여할 것이다. 한·미 협력 없이는 남북, 북·미 관계의 선순환이 이루어지기 어렵다는 것을 깨닫는 것도 교착상태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이다.
서 보 혁 통일연구원 평화연구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