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2
협력안보와 한반도 평화
남북 모두의 안전을 보장하는
한반도형 협력안보를 모색한다
본 글은 새로운 시각에서 한반도 평화를 위한 현실적 방안이 무엇인지를 고민하면서, 남북의 상호 안전보장을 위해 협력안보의 필요성을 제기한다. 이와 함께 북핵 문제 해결과 남북관계 발전의 연계성을 최소화하는 수평적 접근을 제안하고자 한다.
지난 냉전시대 남북관계는 적대적 의존관계의 틀에 묶여 있었다. 노태우 정부는 북방 정책을 통해 적대적 의존관계였던 남북관계를 청산코자 하였다. 그러나 1993년 북한의 핵확산금지조약 탈퇴 선언 이후 근 30년 동안 남북한의 한반도 정치는 적대적 상호경쟁이라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내지 못하고 있다. 현재 남북관계의 근저에도 여전히 냉전 정치가 작동하고 있다. 남북관계의 한반도 정치가 냉전 정치의 속성을 벗어나지 못 하고 있는 데에는 다양한 이유가 있다. 무엇보다도 북한 핵능력의 고도화와 현실화로 남북한의 안보적 상호작용이 격해졌기 때문일 수도 있고 분단체제의 장기화와 구조화로 새로운 성격의 남북한 체제 경쟁이 시작되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아니면 한반도 평화가 동북아 안보와 연결되어 있어 남북한의 한반도 정치가 본격화되고 있는 미·중 패권 경쟁의 궤도에 편입되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신뢰 기반으로 상호안전을 보장하는 협력안보
나름 다 일리가 있다. 하지만 한반도 안보를 바라보는 우리의 입장이나 시각이 국가안보 패러다임에 매몰되어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국가안보 패러다임은 안보라는 가치를 적성국과 공유한다는 생각을 상상할 수도 없고 또한 인정하지도 않는다. 국가안보 패러다임에서 남북한의 안보관계를 바라보면 우리의 행동은 언제나 선이고 북한의 행동은 언제나 악이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전형적인 거울영상 효과의 악순환이다. 거울을 바라보는 나의 행동과 거울 속에 비친 나의 행동이 똑같은 행동을 하더라도 모양은 정반대인 이치와 같다.
이러한 구도에서는 남북한이 새로운 합의를 하고 새로운 관계를 정립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깨지기 쉬운 관계’에 지나지 않는다.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크고 작은 남북합의가 대략 250건에 이르는데도 남북한이 여전히 적대적 상호경쟁의 악순환 고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도 거울영상구도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거울영상구도에서 벗어나 적대적 상호 경쟁이라는 악순환 고리를 끊어내기 위해서는 안보에 대한 인식과 사고에서 담대한 전환이 필요하다. 우리 중심의, 우리만의 안보가 아니라 상대방의 안보도 고려하는 한반도형 협력안보로의 전환이 그것이다.
일반적으로 협력안보는 주로 국제안보 쟁점으로 부각된 이슈를 둘러싸고 갈등관계에 있는 해당국가들 사이에서 협력적 관여를 통해 당면 안보 이슈를 풀어나가는 접근방법을 의미한다. 이러한 접근법은 우방국이나 동맹국과의 안보협력과는 다른 의미로 안보적 갈등관계에 있는 국가 간의 안보협력에 적용되는 개념이다. 안보 가치의 상대성과 상호의존의 안보 가치를 받아들이는 공동안보의 입장을 수용하는 협력안보 접근법은 매우 포괄적이어서 대상과 수준에 따라 다양한 접근이 가능하다. 예를 들면, 낮은 수준에서의 협력안보 접근법의 초점은 공고한 제도화보다는 상호 신뢰성을 키우고 이를 유지·강화시켜 나갈 수 있는 대화의 습관과 다양한 영역에 걸친 포괄적 상호 관여를 중시한다. 이러한 협력안보 접근법은 갈등관계에 있는 국가들이 서로에 대한 불신의 장벽을 낮추고 궁극적으로 이를 해소하여 새로운 신뢰관계로 발전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는 것이다.
한편, 높은 수준에서의 협력안보 접근법의 초점은 보다 구체적이고 국가안보와 직접 연결된 안보전략이나 방위예산, 군사력 대응태세 등에 대한 투명성 강조부터 군대배치와 무기획득 등에 대한 규제 합의에 이르기까지 국제적 차원의 협력과 제도화된 규제를 통한 위협 예방을 중시한다. 따라서 낮은 수준의 협력안보에서는 양자적 접근이 용이하고 높은 수준의 협력안보에서는 다자적이고 제도적 접근이 요구된다. 갈등관계를 보이고 있는 국가 간에 협력안보 개념을 적용하여 양국 관계를 미래지향적 협력관계로 전환해 나가기 위해서는 다양한 영역에 걸친 양국 간의 상호관여가 중요하다. 특히 그 과정에서 경제적 인센티브를 매개로 한 상호협력은 매우 중요한 요인이다. 이러한 협력안보의 핵심 요지는 상대방에 대한 투명한 상호억제가 아니라 신뢰에 기초한 상호 보장이다.
지난해 6월 30일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 트럼프 대통령이 판문점 남측 자유의 집에서 나오며 얘기를 나누고 있다. ⓒ연합/조선중앙통신
북한 비핵화 문제에 대한 수평적 접근 필요
이제부터라도 우리는 국가안보 패러다임에서 벗어나 상호 안전보장의 남북관계를 설계해 볼 필요가 있다. 한반도 상황에 부합하는 한반도형 협력안보를 통해 남북한 상호 안전보장을 위한 상호 신뢰의 틀을 만들어나가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한반도형 협력안보는 한반도 평화·안보를 위한 우리의 자율적 정책공간을 만들고 이를 확장시켜 나가기 위한 전략구상이다. 이러한 전략구상이 현실적 실천력을 갖기 위해서는 ‘북핵 우선론’을 경계해야 한다. 즉, 북핵 문제 해결 없이는 남북관계 발전도 없다는 ‘북핵 우선론’의 대북정책이나 한반도 평화프로세스를 지양해야 한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북한의 핵 문제는 북한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우리의 안보에 최대 위협이자 한반도 평화프로세스 작동의 최대의 걸림돌이다. 그렇기 때문에 1993년 북한이 핵확산금지조약 탈퇴를 선언한 이후 근 30년 동안 한국과 미국의 역대 정부는 북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양한 정책과 전략을 동원해왔다. 안타깝게도 북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그간의 과정에서 우리가 목격한 것은 북한의 핵능력이 고도화되었고 현실적 위협이 되었다는 점이다. 한편으로 우리는 북핵 문제의 진전을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북핵 스트레스 딜레마(시시포스 딜레마)’를 주기적이면서도 반복적으로 겪어 왔다. 그때마다 한반도 평화는 심히 요동치고 국민들은 불안감에 떨었다.
최근 스톡홀름의 국제평화연구소(SIPRI)가 발간한 『SIPRI Yearbook 2020』 보고서에 따르면, 북한의 핵탄두 수는 30~40개에 달한다. 북한의 핵능력이 우리에게 현실적 위협으로 다가온 것이다. 국가안보 패러다임에 입각한 우리의 대응 논의는 아마도 다음과 같은 내용이 주를 이룰 것이다. “한미동맹의 군사적 대북억제와 추가적 사드(THAAD) 배치를 통한 미사일방어체제를 강화해야 한다. 이제는 주한미군의 전술핵무기 한반도 재배치를 진지하게 검토해야 한다. 이참에 우리도 핵보유국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 한미공조를 통해 더 강력한 대북제재를 취해야 한다. 북한의 비핵화를 끌어내기 위해 대북제재와 관여를 동반하는 강압외교를 보다 적극적으로 펼쳐야 한다.” 이러한 다양한 목소리를 반영하여 우리 나름의 북핵 대응책을 마련하는 것은 응당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다만 우려되는 것은 거울영상구도가 지속되는 한, 어떠한 대응책을 채택하더라도 국민들의 불안감을 완전히 해소할 수 없다는 점과 우리는 또다시 ‘북핵 스트레스 딜레마’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남북한의 상호 안전보장을 구축하고 칼날 위의 한반도 평화를 일상의 평화 상태로 전환시켜 나가기 위해서는 이제부터라도 대안적 안보 시각과 사고로의 전환이 이루어져야 한다. 국가안보 패러다임에 입각하여 북한에 대한 강력한 억제력 못지않게 한반도형 협력안보에 바탕을 두고 불신의 장벽을 낮추어 남북한 상호 신뢰를 높여나갈 수 있는 대안적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북한의 비핵화는 우리가 양보할 수 없는 사활적인 국가안보라는 사실은 추호도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우리만의 사고와 해법으로는 ‘북핵 스트레스 딜레마’에서 빠져나올 수 없는 것도 엄연한 현실이다. 한반도형 협력안보 시각에서는 중장기적으로는 북한의 비핵화를 추구하면서도 중단기적으로는 현실화된 북한의 핵능력을 ‘불용의 핵’으로 만드는 대안적 정책개발과 접근이 필요하다. 한반도형 협력안보에 기초한 남북관계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북한의 비핵화 문제를 남북관계 발전을 위한 다양한 전략과제들과 동일선상에 놓고 다른 현안 쟁점들과 수평적으로 접근해 나갈 필요가 있다. 북한 비핵화 문제의 수평적 접근방법은 남북관계 발전 을 위한 다른 전략 과제들과 북한 핵 문제와의 연계성을 최소화해 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북핵 문제의 수평적 접근은 북한의 비핵화와 관련하여 한반도형 협력안보의 첫걸음이자 남북한 상호 안전보장을 위한 새로운 접근이다.
2018년 5월 25일 북한 함경북도 길주군 풍계리 핵실험장 폐기 당시 현장을 취재하는 취재진들 ⓒ연합/조선중앙통신
미·중 패권구도 속, 자율적 정책 공간 마련해야
북·미 비핵화 협상의 교착과 국제사회의 엄격한 대북제재로 남북한 한반도 정치가 멈춰 섰다. 비핵화라는 관문을 지나지 않고서는 한반도 평화가 있을 수 없다는 자조 섞인 목소리가 강화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며, 무엇을 해야 하는가? 북·미 비핵화 협상 재개를 위해 적극적으로 중재자 역할을 해야 하는가? 북·미가 비핵화 협상을 재개할 때까지 손 놓고 기다리고만 있어야 하는가? 한반도의 평화와 운명이 남북한에 달려 있다면, 우리는 아무리 현실이 버겁고 힘들다 하더라도 한반도 평화를 위한 우리의 해법을 찾아 나가야 한다. 설사 국제사회의 대북제재와 미·중 패권구도에 한반도가 갇혔다 하더라도 최소한의 자율적 정책 공간을 확보하기 위한 우리만의 해법을 만들어야 한다. 또다시 한반도 문제에서 코리아 패싱을 경험해서는 안 된다.
남북한 안보관계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통해 멈춰선 한반도 정치를 작동시켜야 한다. 한반도형 협력안보는 북한 비핵화의 정책 일관성을 유지하면서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대안적 접근법이다. 정책의 일관성 여부를 판단하는 기준은 궁극적인 정책 목표의 변화 여부에 달려 있는 것이다. 정책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대안적 접근법을 모색하는 것은 결코 정책의 일관성을 포기한 것이 아니다. 서울로 가기 위해 꼭 자가용이나 KTX를 이용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한반도형 협력안보 접근법으로 북한의 비핵화라는 목표를 추구하면서 현실화된 북한 핵을 ‘불용의 핵’으로 만들어가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이 수 형
국가안보전략연구원 학술협력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