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시대 Vol 1682020.10

평화 LIFE

대한민국 공주 100년사

-연극 <공주(孔主)들2020>에 대하여

“물어보고 싶었어. 내 엄마한테, 엄마의 엄마한테,
엄마의 엄마의 엄마의 엄마한테.
아빠한테 물어보고 싶었어. 아빠의 아빠한테,
아빠의 아빠의 아빠의 아빠한테.
우리 언제부터 이랬는지.”

-연극 <공주(孔主)들2020> 中

연극 <공주(孔主)들2020>을 간단히 요약하면 ‘대한민국 공주 100년사’이다. 미투 운동을 계기로 지금껏 내가 노출됐던 수많은 폭력의 기원을 찾아보니 나는 1900년 대 초반에 서 있었다. 연극 <공주(孔主)들2020>은 과거부터 지금까지 국가와 사회가 여성에게 어떤 폭력을 행사해왔는지 이야기한다. 나는 이 연극이 지금까지 대한민국에서 살아온 공주들과 앞으로 새로운 세계를 살게 될 공주들의 목소리가 되길 바란다. 아주 오래된 ‘지금’을 통해 질문을 던진다. ‘위안부’ 문제를 비롯한 다양한 성착취 문제들은 과거의 일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일이 아닐까?

끊임없이 반복되는 역사: 성매매 체제의 연속성
연극 <공주(孔主)들2020>은 국가가 국가 폭력의 희생자들에게 저지른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사과하지 않으며, 지난 과오를 끊임없이 반복하고 있는 역사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는 일제강점기의 공창제로부터 시작해 일본군 ‘위안부’ - 한국군 ‘위안부’ - 미군 ‘위안부’ - 베트남 파병 국군 민간인 학살 - 기생관광 - 집결지 - 현대의 성매매 - N번방까지를 다룬다. 이를 통해 연극 <공주(孔主)들2020>은 국가의 성매매 제도에 대한 ‘공인-관리 시스템’이 ‘묵인-관리 시스템’을 거쳐 ‘금지-관리 시스템’으로 변형되어 현재 우리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보여준다. 국가가 과거를 제대로 기억하지 않고 인정하지 않고 사과하지 않으면 우리는 또다시 과거와 같은 고통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제대로 된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이 이루어져야 비로소 잘못된 역사는 반복되지 않을 것이다.

대한민국 여성의 역사:
가부장제 이데올로기 속 강제된 성역할
역사 속에서 대부분의 한국 여성들은 약하고 불쌍하며 희생과 고통을 강요당하는 피해자로 그려졌다. 여기에는 우리 사회의 가부장적 이데올로기가 크게 작용했다. 가난한 식민지의 딸들이 겪어야 했던 조직적인 강간은 누구에게도 말 못할 사적인 체험으로 전락했고, 체계적이고 전략적으로 여성을 성노예화했던 사실은 조직적으로 은폐됐다. ‘순결한 여자’ 혹은 ‘순결하지 못한 여자’라는 구분은 여성의 삶을 더욱 비참하게 만들었다.

연극 <공주(孔主)들2020>에서는 뿌리 깊은 가부장적 이데올로기가 전쟁을 통해 여성에게 폭력을 행사한 방식과, 경제발전이라는 명목을 통해 여성을 물화시킨 순간을 마주한다. 이를 통해 한 개인이 ‘여성’이라는 성역할을 강요받으며 살아가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지 질문을 던진다.

피해 당사자에게 ‘어쩔 수 없음’을 강요하는 사회
듣기에 대한 태도
연극 <공주(孔主)들2020>은 말하고 있는데도 말하지 않는다고 여겨지고, 사회로부터 말할 기회를 박탈당한 피해 당사자들의 이야기다. 한 번도 피해를 당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 평생 피해자인 사람도 없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피해 당사자들이 피해 상황 이후의 삶이 아닌 ‘피해 당시에 머물러 있기’를 강요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리하여 연극 <공주(孔主)들2020>은 피해 당사자들을 대상화시키는, 즉 사회가 받아들이기 편한(피해자의 수난 서사를 소비하는) 방식을 배제하고자 노력했다. 우리는 피해 당사자들의 이야기를 들을 준비가 됐을까? 우리가 듣고 싶어 하는 것만 듣고 있지는 않을까? 피해 당사자들에 대한 우리의 입장은 무엇일까? 또한 연극 <공주(孔主)들2020>은 피해 당사자들에게 스스로를 보호할 ‘말하지 않을 권리’도 보장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2020년 또다시 연극 <공주(孔主)들>, 왜?
연극 <공주(孔主)들>은 2018년 초연, 2019년 재연됐다. 우리는 관객들에게 ‘알고 있었다, 제대로 몰랐다, 처음 알았다’ 등 다양한 피드백을 들을 수 있었다. 우리는 왜 같은 시공간에 살면서 역사를 서로 다르게 인지할까? 대한민국 공주 100년사는 누군가에겐 너무나 상투적이 어서 다 알고 있는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88 올림픽이나 2002 월드컵을 ‘역사’라고 느끼는 지금 세대에게는 굉장히 새로운 이야기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2020년 <공주(孔主)들>을 통해 누군가는 알고 있었지만 관심을 두지 않았던 이야기, 누군가는 전혀 몰라서 관심을 가질 수 없던 이야기를 건네며 더 많은 관객과 더 다양한 방법으로 만나고자 했다. 역사는 누구에 의해 기록됐느냐에 따라 다르게 기억된다. 이제는 더 다양한 관점의 기억이 존재해야 할 때가 아닐까? 그래서 또다시 2020년, 연극 <공주(孔主)들>을 무대 위에 올렸다.

내가 속한 극단 신세계는 25명의 단원이 공동창작으로 동시대 연극을 만들어내고 있다. 불편한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마주하여,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인지 질문을 던지는 작품들을 무대에 올린다. 앞으로도 우리는 불편한 현실을 마주하여 무대 위에 올릴 것이며, 새로운 세상을 기대하기보다는 새롭게 살기 위한 방법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 창작자들이 되고자 한다.

* 연극 <공주(孔主)들2020>은 공식적 기록이 아닌 비공식적 기록으로 존재하는 다양한 여성들의 증언들을 발췌, 참고하여 재구성되었다. 그중 버마에서 일본군 ‘위안부’ 생활을 한 문옥주 님의 증언, 일본군 ‘위안부’에서 미군 ‘위안부’로 살아오며 아들을 베트남에 파병 보낸 사실을 증언한 김순악 님의 증언, 미군 ‘위안부’에서 여성 운동가로 살아온 김연자 님의 증언, 미군 ‘위안부’였던 김정자 님의 증언, 그리고 그 외에 대한민국의 수많은 ‘공주’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창작되었음을 밝힌다.
김 수 정 연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