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단
스가 정권 출범 이후 한일관계,
윈-윈하는 파트너로 발전하길
막 내린 아베 정권
지난 9월 16일, 무려 7년 8개월에 걸쳐 최장수 연속 재임을 기록한 아베 신조(安倍晋三) 정권이 끝나고 새로운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정권이 출범했다. 아베 신조 전 총리는 코로나19 대책에 따른 격무로 심신이 지친 데다, 지병인 궤양성 대장염이 재발하면서 건강상 이유로 사임했다. 그러나 사실상 아베 정권의 역할은 이미 한계를 드러내고 있었다. 아베노믹스는 인위적인 통화량 증가와 엔저 정책으로 수출확대를 추진하면서 일정한 성과를 거두었지만, 성장전략에서 거의 효과를 보여주지 못했다.
일본경제를 받치던 수출과 관광이 급감하면서 지 난 2/4분기 -27.8% 역성장이라는 심각한 위기를 맞이했다. 2018년 약 3,120만 명에 달하던 해외관광객은 99.9% 감소하여 내수경제가 크게 침체되었다. 자신의 정치적 숙원이던 헌법개정을 추진해왔지만, 일본 국민과 공명당의 반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30회가 넘는 러시아 푸틴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도 불구하고 러·일 간 영토교섭은 실패로 끝났고, 자신이 반드시 해결하겠다던 일본인 납치자 문제도 북·일 간 대립으로 전혀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아베 전 총리의 사퇴가 건강상 이유라고 하지만, 실제로 정치적 명운이 소진되었기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베 총리의 사임 발표 후, 자민당 총무회는 갑작스러운 총리 사퇴에 따라 긴급사태가 발생했다고 보고, 현역 국회의원 중심의 약식선거로 총재를 선출하기로 결정했다. 그 결과 9월 14일 오후 열린 자민당 참의원과 중의원 양원 의원총회에서 스가 요시히데 후보가 현직 국회의원 393표와 도도부현 대의원 141표를 더한 전체 534표 가운데 무려 70.6%에 달하는 377표를 얻어 자민당 총재로 당선되었다. 일본 자민당의 고질적인 파벌 역학이 작동했고, 호소다 파벌 98명, 아소 파벌 54명, 니카이 파벌 47명 등, 5대 주요 파벌이 스가 요시히데 후보를 지지하면서 스가 대세론은 이미 결정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일본경제를 받치던 수출과 관광이 급감하면서 일본은 지난 2/4분기 -27.8% 역성장이라는 심각한 위기를 맞이했다. 사진은 도쿄의 한 쇼핑센터 ⓒ연합
스가 총리와 내각은 사실상 아베 2.0?
일본 자민당 국회의원 가운데 세습의원이 무려 40%에 달하고, 최근 10명의 총리 가운데 8명이 정치명문가 출신이었음을 감안하면, 스가 요시히데 총리는 서민 재상임에 틀림없다. 정치가도 가업으로 인식되는 일본에서는 세습이 드물지 않다. 아베 전 총리만 해도 기시 노부스케 전 총리, 그 동생인 사토 에이사쿠 전 총리를 외조부로 두었고, 부친 아베 신타로 전 외무상은 물론, 자신도 최장수 총리, 친동생 기시 노부오(岸信夫)까지 스가 내각에서 방위상을 맡고 있을 정도이다. 자민당 총재선거에서 경쟁한 기시다 전 외무상이나 이시바 전 방위상도 정치 명문가 출신인 데 비하여, 스가 요시히데는 상대적으로 자수성가형 정치가에 속한다. 일본에서 소외지역인 도호쿠 지방 농가에서 태어나, 고교 졸업 후 도쿄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등록금이 저렴한 호세이대학에서 공부한 그는 자민당 정치가의 비서로 들어가서 요코하마 시의원을 거쳐 국회의원 8회 당선을 일구었고, 마침내 총리 자리에 올랐다.
그는 일본인 납치자 문제를 계기로 아베 전 총리와 의기투합했고, 7년 8개월 동안 아베 내각의 관방장관으로 활약해왔다. 그는 자기관리가 철저한 정치인으로서 24시간 내내 오로지 정치를 위해 생활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술을 전혀 하지 않고, 졸음과 포만감을 방지하고자 육식을 피하고 주로 채식 위주 식사를 하며, 팬케이크를 즐겨 먹는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의 내각 관방장관은 한국으로 치면 대통령 비서실장, 청와대 정책실장, 청와대 대변인을 합친 것이다. 내각의 넘버 투에 해당하며 내정과 외교의 중요 사안 대부분에 직접 관여하는 핵심 요직이다. 사실 그는 2013년 12월 남수단 한빛부대에 일본 자위대 탄약 지원 논란, 2014년 6월 고노 담화 재검증, 2015년 12월 한일위안부 합의 등, 한일관계 주요 쟁점에도 막후 조정자로서 활동했으며, 따라서 양국관계를 잘 알고 있다고 하겠다.
스가 요시히데 내각과 자민당 당직은 그야말로 아베 2.0 내각이나 스가베(스가+아베) 내각에 가깝다. 신임 총리 기자회견에서 그는 아베정권의 정책과 이념을 계승한다고 공언했다. 망언 제조기로 유명한 아소 다로 부총리 겸 재무상, 아베 전 총리의 측근 중 측근인 가토 가쓰노부 관방장관, 모테기 도시미쓰 외무상, 하기우다 고이치 문부과학상, 고노 타로 행정개혁상, 아베 친동생인 기시 노부오 방위상 등 대부분 주요 요직은 아베 전 총리의 측근이나 인척으로 채워졌다. 자민당도 니카이 도시히로 자민당 간사장이 그대로 유임되는 등, 내각과 자민당 주요 보직은 새로운 변화를 찾기 어려울 정도이다. 그는 미·일 동맹 강화는 물론, 중·러 등 주변국과 안정적인 관계 지속, 북한 내 일본인 납치자 문제 해결을 언급했지만, 한국은 전혀 거론하지 않아서 코리아 패싱 우려가 일었다.
지난해 8월 15일 서울광장에서 열린 ‘일제 강제동원 문제 해결을 위한 시민 대회’에 참여한 강제징용 피해자 이춘식 할아버지와 양금덕 할머니가
일본대사관으로 이동하고 있다. ⓒ연합
한일 정상회담 개최로 대화 모멘텀 만들어야
그렇다면 강제징용 해법은 물론, 일본군 위안부, 역사 교과서와 독도 문제 등 산적한 한일관계는 어떻게 바뀔 것인가. 한일 양국 국민과 언론이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다. 최근 일본 산업유산정보센터 개관에서 드러난 군함도 강제노역 피해사실 왜곡, G7을 한국을 포함한 G11로 확대하자는 트럼프 대통령의 제안에 대한 일본의 반대, 존 볼턴 전 백악관 안보보좌관 회고록에서 일본이 북·미 간 종전협정 방해공작을 시도한 것 등 국내 언론과 정계에서 대일 비난이 터져 나오기도 했다. 일본의 수출규제가 지속되면서 8월 20일 외교부 대변인은 지소미아, 즉 한일 간 군사정보보호협정을 언제든지 파기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한일 양국이 직면한 최대 위기는 강제징용 쟁점이라고 할 수 있다. 2018년 10월 우리 대법원은 일본 전범기업의 불법적인 강제노역에 대해 피해자들에게 각각 1억 원씩 정신적 위자료를 지급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1965년 청구권협정은 영토적 분리에 따른 채무·채권관계 정리이며, 1910년 강제병합의 불법성을 전제로 한 것이 아니므로, 일본 정부도 인정한 개인청구권에 따라 보상하라는 내용이었다. 이에 대해 일본 정부는 국제질서와 청구권협정을 위반했다며, 한국 정부와 사법부를 비난했다. 그러나 개인청구권은 이미 국제법상 기본원칙이며, 일본 외무성도 두 번이나 확인한 바 있다. 지난 30년 간 일본 전범기업과 피해자가 법정 다툼을 벌여온 결과, 패한 전범기업이 민사소송의 결과를 수용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한일 간 현안을 해결하고자 외교부는 작년 6월 19일 한일 양국 기업이 기금을 모아 피해자에게 보상하는 안을 제시했으나, 일본 정부는 즉각 거부했다. 이후 수차례에 걸쳐서 한국 정부는 일본 전범기업이 대법원 판결을 이행하는 것을 전제로 실질적인 손해가 발생하지 않는 해법을 제시했으나, 아베 정권은 완강히 거부했다. 오히려 한국 정부를 비난하면서 작년 7월 수출규제를 단행하는 등 적반하장 식 대응으로 일관했다. 최근 8월 4일 일본 전범기업에 대한 공시송달이 종료되면서, 일본 전범기업의 자산을 국내법에 따라 처분하는 사법 절차가 진행 중이다. 빠르면 내년 봄에 매각명령이 나오고, 이어서 현금화가 실행될 것으로 보인다.
현실적인 타협책은 일본 전범기업이 우리 대법원의 판결대로 피해자에게 보상하고 사죄하되, 일본 측 기대에 따라 일본 기업의 실질적 손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한일 정부가 최대한 지혜를 짜내는 것이다. 연말에 한·중·일 정상회담이 한국에서 개최될 예정인데, 가능하면 대면으로 한일 정상이 만나 문제를 해결하자는 공감대를 형성하고 내년 상반기 중 구체적 해법을 도출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시나리오일 것이다.
스가 총리는 무려 74%에 달하는 내각 지지율의 고공 행진으로 국내의 지지 기반이 탄탄함을 보여주었다. 연내에 중의원 해산 총선거를 한다면 높은 지지율을 바탕으로 압승할 가능성도 있다. 그럴 경우 아베2.0이 아닌 자신의 정치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게 되고, 스가 정권이 안정되면 한일 양국이 진전된 해법을 모색할 수 있을 것이다.
다행히 한일 외교당국 간 교섭이 이미 진행되고 있다. 한국과 일본의 국가안보실(NSC) 수장인 서훈 실장과 기타무라 국장 간 수차례에 걸친 전화 협의가 있었고, 박지원 국가정보원장과 니카이 도시히로 자민당 간사장은 매우 가까운 사이로 알려졌다. 강제징용 쟁점을 비롯하여 양국 간 난제를 풀어나갈 중요한 파이프라인으로 기대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도 스가 요시히데 총리 취임을 축하하면서 과거사 문제를 슬기롭게 극복하고 미래지향적인 관계를 구축하자고 먼저 제안했다.
이러한 한일 간 외교자원을 활용하여 연내 한일 정상회담을 개최하고, 양국 간 대화 모멘텀을 살려 나가야 할 것이다. 일본 측도 11월 미국 대통령 선거와 미·일 정상회담 이후에 동북아 주변국과의 관계 개선에 나설 가능성이 높다. 내년 7월로 예정된 도쿄 올림픽을 정상적으로 치르려면 한국, 중국의 지지와 협력이 불가결하다. 한일 양국이 대화와 소통으로 양국 관계를 관리해가고, 미·중 G2 체제 하 불안정한 동북아 국제정세에서 든든한 파트너로서 윈윈(Win-Win)하는 관계로 발전하기를 기대한다.
양 기 호
성공회대학교 일본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