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시대 Vol 1682020.10

평양 시내 ⓒJen Morgan/Fli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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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인류학자의 눈에 비친 북한 ③

행복을 교시하는 나라

“우리는 행복해요” 유치원 정문에 높이 걸린 알록달록한 글씨가 인상적이었다.
잿빛 건물들 사이 작은 마당엔 빛바랜 놀이시설이 있었다.
겨울의 혹독한 한기가 채 가시지 않은 2000년 3월 초,
평양에서 음악교육으로 유명하다는 유치원을 찾아갔다.

현관 중앙에는 어린아이들을 안고 활짝 웃고 있는 김일성과 김정일 부자의 대형사진이 보이고, 좌우 벽에는 붉은 현판에 황금빛으로 새긴 ‘말씀교시(敎示)’가 걸려 있었다. 냉기가 가시지 않은 콘크리트 건물은 높은 천장때문에 더 춥게 느껴졌다.

유치원 건물에는 피아노, 바이올린, 첼로, 해금 등 다양한 악기를 단체로 배우는 교실과 개인별로 지도받는 연습실들이 있었다. 아주 어려서부터 소질이 있는 아이들을 선발해 집중적으로 교육하고 있다고 했다. 유치원 교사 중에는 유아용 기악교육 교재를 직접 저술한 전문연주가들도 여럿 있다고 자랑했다. 서너 살부터 이런 전문가들에게 직접 배운 아이들은 과연 놀랍도록 수준 높은 솜씨로 연습하고 있었다.

우리와 다른 ‘행복’ 노래하는 아이들
방마다 아이들은 목청껏 노래하고, 온몸으로 연주했다. 싸늘한 넓은 방에서 여섯 살쯤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가 무용곡에 맞춰 춤을 추고 있었다. 소비에트 시대의 남자 무용수를 연상시키는 현란한 발레 동작으로 하얀 입김을 내뿜으며 힘차게 돌았다. 음악뿐만 아니라 미술, 무용, 체육 같은 예체능 특기교육은 물론이고, 수학이나 과학 영재교육도 개별 가정이 아닌 국가가 담당하는 공교육 사업이다. 아주 일찍 유아기부터 재능개발을 시작한다고 한다.

원장선생이 이끄는 대로 우리를 맞이하기 위한 노래 연습이 한창인 위층 강당으로 올라갔다. “우리는 행복해요” 한 여자아이가 오른손을 쭉 펴서 뺨에 대고 고개를 갸우뚱하며 맑고 높은 목소리로 노래했다. 넓은 방을 가로질러 가슴을 찌르듯이 소리가 울려 들어왔다. 작은 무대의 막이 열리며 아이들이 놀랄 만큼 우렁찬 목소리로 합창을 했다. 성악 발성법을 익힌 듯했다.

온 나라가 받드는 우리 아버지 / 아~아 장군님 우리 아버지 / 천년만년 높이높이 모셔 갈래요 / 정말정말 기뻐요 / 행복 넘쳐요, 행복 넘쳐요


아이들은 양팔을 벌리고 어깨를 으쓱대다가, 일제히 몸을 앞으로 쑥 내밀고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다시 “행복 넘쳐요, 행복 넘쳐요” 합창을 한다. 정말 행복에 겨워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이다. 나는 기가 딱 막혔다. 행복은 무슨 행복이란 말인가. 지금도 먹을 것이 없어서 아이들이 굶고 있고, 노래를 부르고 있는 저 평양의 아이들조차 제대로 먹지 못해 마르고 핏기 없는 얼굴들이 여럿 보이는데.

도저히 ‘행복’할 수 없는 상황에서 ‘행복하다’고 노래하는 것을 보면, 일단 의심할 바 없이 그렇게 시킨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받은 반공교육에 따르면 당연히 그렇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까지 그렇게 노래하도록 강제하는 어른들을 가증스럽게 여기기 쉽다. 그런데 현장에서 보면 어른이건 아이건 모두 진지하게 몰입해서 진짜 행복한 것처럼 노래하고 있다는 것을 바로 느낄 수 있다. 여기서 혼란이 시작된다. 모두가 놀랍도록 완벽한 연기를 하고 있거나, 아니면 진짜로 그렇다고 믿고 있을지도 모른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어쩌면 우리와는 다른 ‘행복’을 노래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어느 사회나 부잣집과 가난한 집이 있다. 가난한 집이라고 해서 행복하지 않은 것은 아니라는 사실은 우리 모두 잘 알고 있다. 방글라데시나 부탄 같은 가난한 나라에 사는 사람들이 남한은 물론이고 선진 부국 사람들보다 행복지수가 높다는 UN의 보고도 있었다. 북한은 현재 세계에서 몹시 가난한 나라에 속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곳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불행할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형제간에도 살다 보면 잘사는 집, 못사는 집이 있는데, 조금 잘산다고 해서 못사는 집을 보고 끼니도 잇기 어려운데 무슨 행복 타령이냐고 윽박질러서는 안 될 것이다.

지난해 5월 24일 조선중앙통신이 보도한 평양 중구역 대동문유치원 원생들의 음악수업 모습 ⓒ연합/조선중앙통신
우리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그들의 방식
행복심리학에서는 ‘행복’을 단순히 고통이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은 아니라고 밝히고 있다. 행복은 지극히 주관적인 것이며 소유보다는 경험, 경쟁보다는 관계가 중요하다. 인간은 문화적인 존재이기에 동물적 생존욕구를 넘어서는 의미와 가치를 중요하게 여긴다. 행복한 ‘의미 있는 삶’은 일, 사랑, 영혼, 초월의 과정이라고 한다. 소명의식과 성취 경험, 목표 추구를 위한 절제가 어우러진 삶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세상에 도움이 되는 가치 있는 일을 하면서, 세상을 이해하고 자신의 존재 이유를 알아가는 삶을 의미 있다고 느낀다. 개인의 단기적 욕망 충족을 넘어, 가족과 사회관계에서 이타적이고 공동체적인 ‘품격 있는 삶’이 안정적인 행복의 기본요건이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들의 ‘행복’과 ‘장군님’은 도대체 무슨 관계가 있는지, 그리고 ‘장군님’을 왜 ‘아버지’라고 하는지 궁금했다. 그저 그렇게 앵무새처럼 말하도록 훈련받아서 그렇다고 생각해버리면 그만이지만, 그것은 이 사람들 모두를 스스로 생각하지 못하는 백치이거나 자기 생각과는 다른 말을 하는 겁쟁이로 간주하는 일이 된다. 이들 나름대로 그렇게 말하고 생각하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수령과 아이들 간에는 무언가 특별한 관계가 있는 듯했다. 어려서부터 반복 학습한 결과만이 아니라, 역사적, 사회적, 문화적으로 거듭 다져진 의미체계가 있어 보였다.

주체논리에서 보면 이들은 스스로를 항일유격대의 전통을 잇는 존재로 여기고 있다. 아직도 완전히 독립하지 못한 민족을 해방시키려는 투쟁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수령을 중심으로 굳게 뭉쳐 고난을 견디며 바른 길을 가고 있다고 주장한다. 지금은 압도적인 외세에 의해 완전히 포위되어 가난하고 괴롭지만, 올바른 길을 가는 자신들이 언젠가는 승리해서 통일을 이루고 민족을 해방시킬 영광스러운 존재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아이들이 노래하는 ‘행복’은 우리가 생각하듯 물질적인 것은 아닐 것이다. ‘세상에 부럼 없어라’나 ‘우리식대로 살자’든가 ‘조선이 없으면 세계도 없다’라는 표어도 남한식으로 해석해서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이다. 그들 나름의 도덕원리에 바탕을 둔 정신주의적 표현이기 때문이다.

한편, 남한 아이들은 광고에 나오는 음식을 먹고, 유행하는 물건을 살 때 행복감을 느낀다고 한다. 소유하고 소비하는 이런 ‘행복’ 개념의 단순성과 극단적인 물질주의를 그들은 이상하게 여길 수도 있다. 우리가 북쪽 어린아이들의 재주에 놀라면서 너무 일찍 훈련시키는 것 아니냐고 염려하면, 그들은 취미도 재능도 없는 아이들에게 엄청난 돈을 들여 경쟁적으로 특기교육을 시키는 남한 부모들을 딱하게 여길지 모른다.

노래를 마치고 아이들이 달려나와 남쪽에서 온 손님들의 손을 잡는다. 조그만 손이 놀랍게 차다. 난방이 안 되는 방에서 얇게 입고 오래도록 준비를 한 탓이리라. 그 아이에게는 난로같이 뜨거웠을 내 손이 민망했다. 조금이라도 녹여주고 싶은 마음에 입으로는 칭찬을 하면서 양손을 붙잡고 감싸 주물러줬다. 얼른 다른 방으로 가자는 원장선생의 재촉에 마지못해 손을 놓았다. 아쉬워하면서 신기한 듯 쳐다보는 아이에게서 차마 눈을 뗄 수 없었다. 아이들과 선생님들이 모두 ‘활짝 웃으며’ 잘 가라고 손을 흔들었다.

지하철을 이용하는 평양 시민들 ⓒMario Micklisch/Flickr
문득 그리워지는 소박한 노랫말
<세상에 부럼 없어라>는 국제사회가 북한을 ‘Korean Miracle’이라고 평가하던 1961년에 만든 노래다. 전쟁의 폐허에서 단기간에 나라를 일으켜 세웠다는 자긍심이 넘치던 시대였다. 그러나 온 나라가 대기근을 겪었던 1990년대에도 그때의 노래를 계속 불렀다. ‘부럼 없어라’는 ‘부럽지 않다’는 고백이 아니라 ‘부러워하지 말라’는 명령이 되었다. 실제로 바깥세상을 본 사람들은 이 노래에 환멸을 느끼며 부끄러워하기도 했다.

요즘은 장마당에서 바깥세상에 대한 정보가 은밀하지만 폭넓게 유통되고 있다. 한류 드라마, 영화, 음악을 통해서 북한이 상대적으로 얼마나 가난한 나라인지 온 나라 사람들이 아는 시대가 되었다. 지금도 아이들은 손에 손을 잡고 입을 크게 벌려 밝은 노래를 부르고 있다. 어떤 마음으로 이 노래를 부를까? 다시 그 가사를 음미해 보았다.

하늘은 푸르고 내 마음 즐겁다 / 손풍금 소리 울려라 / 사람들 화목하게 사는 / 내 조국 한없이 좋네


어디에도 물질적 소유나 경쟁과 비교를 뜻하는 내용이 없다. 자연, 심리, 예술, 인간관계를 통해 느끼는 ‘주관적 행복’을 노래하고 있을 뿐이다. 되풀이되는 후렴구는 아버지, 집, 친형제라는 상징을 통해서 ‘가족국가’의 관계와 소속감을 다지고 있다.

청소년기에 남한에 와서 20년 가까이 살아온 탈북청년이 무심코 이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왜? 그리워?” “아뇨. 근데 그 이상한 행복이 그리울 때가 있어요.”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이곳에서 가장 힘들고 고통스러운 것은 바로 경쟁과 비교라고 했다. 모두가 탐욕적으로 일하고 소비하는 끝없는 경쟁사회 속에서 차별과 소외감 때문에 불안하다고 했다. 냉정한 인간관계로 늘 외로운 이곳에서, ‘사람들 화목하게 사는’, ‘우리는 모두 다 친형제’라는 그 돌아갈 수 없는 곳의 소박한 노랫말이 문득 그립다고.
* 연재를 마칩니다.
정 병 호 한양대학교 문화인류학과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