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2
노동당 75주년으로 본 북한의 길
인민 감성 호소한 당 창건 행사
南 향해 손 내밀고,
美 향해 전쟁억제력 강조
지난 10월 10일은 북한 노동당 창건 75주년이었다. 이날 북한은 전례 없이 야간에 창건 행사를 진행했고, 김정은 위원장의 연설에서도 이전과 다른 모습들이 포착됐다. 노동당 창건 75주년 행사를 통해 바라본 북한의 대내외 전략을 알아보고, 이를 통해 향후 북한의 길을 진단한다.
북한은 2020년 10월 10일 0시 평양 김일성광장에서 조선노동당 창건 75주년 행사를 진행했다. 올해 기념식은 전례 없이 야간행사로 진행됐고, 생중계 대신 조선중앙TV를 통한 녹화중계로 국내외에 행사의 주요 내용이 소개됐다.
이번 노동당 창건 75주년 기념식은 매우 엄숙하게 진행된 이전 행사와 달리 다양한 각도의 카메라와 화려한 조명, 남녀 사회자의 현장 내레이션, 불꽃놀이, 드론을 이용한 항공촬영 등 시각적 효과를 극대화했다. 또한 김정은 위원장이 연설 도중 감정이 복받쳐 눈물을 보이며 울먹이는 모습까지 보여주는 등 인민들의 감성을 자극했다. 물론 여러 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올해 북한이 직면했던 국내외적 도전들이 어려웠음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어진 열병식에서 북한은 신형 대륙간탄도미사일(ICBM)과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등 전략무기와 초대형방사포 등을 공개함으로써 ‘전쟁억제력’을 강조했다.
이처럼 노동당 창건 75주년 기념행사는 화려하게 마쳤지만, 올해 북한이 직면한 국내외적 도전은 북한이 나아가야 할 길을 여러 측면에서 제약하고 있다. 더욱이 북한은 현재 자신들이 직면한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전 국가적 역량을 결집시키고 있다. 내년 초 예정된 제8차 당대회는 바로 이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따라서 본 글에서는 올해 북한이 직면했던 다양한 국내외적 위기의 원인을 설명하고, 이를 토대로 김정은 위원장의 노동당 75주년 기념연설 내용과 연계하여 향후 북한의 길을 예측해 보고자 한다.
코로나19 사태로 인한 경제정책 방향 수정
북한은 2019년 2월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결렬 이후 자신들이 나아가야 할 ‘새로운 길’을 결정하기 위해 당 중앙위 제7기 제5차 전원회의를 2019년 12월 28일부터 31일까지 4일간 개최했다. 파격적으로 신년사까지 생략하고 채택한 결정문에서 김정은 위원장은 2020년 북한이 나아가야 할 길을 ‘정면돌파’로 제시했다.
김정은 위원장은 “시간은 우리 편”이라면서 미국의 태도 변화를 요구했으며, 현 상황의 원인이 미국의 ‘대북적대시정책’ 때문이라며 전략무기 개발의 정당성과 함께 “새로운 전략무기를 목격”하게 될 것이라고 공언했다. 더 나아가 전략무기 개발을 앞으로도 계속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2020년 1월 중국으로부터 확산된 코로나19 사태로 북한은 정권의 생명줄인 북·중 국경을 폐쇄할 수밖에 없었으며, 그 결과 김정은 위원장이 야심차게 추진했던 주요 사업들이 좌초 위기를 맞게 되었다. 북한은 이미 2017년부터 국제사회의 대북제재로 인해 국내 경제성장률이 마이너스(-) 3~4%로 추락했으며, 무엇보다 달러 공급원인 수출이 90% 이상 감소하면서 김정은 위원장을 비롯한 핵심 엘리트의 통치자금 공급에도 여러 문제가 제기되었다.
국제사회의 대북제재하에서 북한 경제는 관광과 밀무역, 그리고 시장으로 버텨왔지만, 코로나19 확산 위험에 따른 국경폐쇄로 인해 북·중 간 인적 교류가 사실상 중단되자 김정은 위원장이 기대했던 ‘원산갈마지구’와 같은 관광특구 사업마저 좌초될 위기를 맞게 된 것이다. 결국 김정은 위원장은 올해 4월 당 정치국회의와 제14기 제3차 최고인민회의를 연속 개최하여 작년 12월에 결정했던 ‘정면돌파식’ 경제정책을 “새롭게 조성된 현실에 맞게” 수정하도록 지시했다. 이에 북한 최고인민회의는 코로나19 사태 극복을 위한 ‘국가비상대비태세’ 확립과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내각의 경제정책 과제를 집중 논의했다.
하지만 북한 당국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경제성장률 하락 폭은 2019년뿐만 아니라 올해 더 추락할 것으로 예상되어 김정은 위원장의 위기의식은 더 높아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결국 북한 경제의 암울한 예측이 통치 스트레스와 함께 김정은 위원장의 위임통치 논란으로 확대된 측면이 없지 않다고 본다.
지난 10월 7일 함경북도의 피해 복구 현장을 시찰하는 박봉주 부위원장.
북한은 핵심 간부들을 파격적으로 노출시켜 인민들에게 이들이 국정의 일부를 책임지고 있다는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 ⓒ연합/조선중앙통신
위임통치 논란 속 최고지도자의 존재감 드러낸 김정은 위원장
지난 2020년 4월 15일 북한의 최대 명절인 ‘태양절’ 행사에 김정은 위원장이 집권 후 처음으로 불참하면서 국내에서는 ‘김정은 신변 이상설’이 제기됐다. 이 논란은 5월 1일 김정은 위원장이 순천린비료공장 준공식에 참석하면서 사그라졌으나, 김정은 위원장의 여동생 김여정 당 중앙위 제1부부장의 역할이 부각되는 등 통치행위를 둘러싼 잡음이 끊이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지난 8월 20일 국가정보원은 국회정보위원회 비공개 회의에서 김여정이 북한 국정 전반에 있어서 ‘위임통치’를 하고 있다고 보고해 국내에 적잖은 파장을 일으켰다. 그러나 곧바로 김정은 위원장의 건강에는 문제가 없으며, 여전히 절대권력을 행사하고 있고, 위임통치가 곧 김여정의 후계자 통치가 아니라는 점을 확인했다. 다만 김정은 위원장의 위임통치가 지난 9년간 누적된 통치 스트레스 경감과 정책 실패 시 책임회피를 위한 조치라는 것이다.
김정은 위원장은 올해 4월 코로나19 사태의 장기화로 작년 12월 당 전원회의에서 결정했던 경제정책의 수정을 지시했는데, 설상가상으로 올해 6월 이후 집중된 수해로 인민경제가 다시 큰 타격을 받게 되자, 8월 19일 제7기 제6차 당 전원회의에서 경제정책 실패를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아마도 김정은 위원장의 통치 스트레스가 이 시점에서 최고치에 이르렀다고 예상해 볼 수 있다.
사실 김정은 위원장은 이미 올해 초부터 김여정을 국정의 전반에 내세워 책임을 부여했다. 선전선동부 제1부부장에서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으로 재임명했고, 당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선출했으며, 대남과 대미 메시지를 김여정 명의로 내보냈고, 급기야 김여정이 지난 6월 남북연락사무소 폭파를 직접 지시하는 등 실질적 2인자 역할을 수행하도록 만들었다.
또한 김정은 위원장은 박봉주 부위원장과 리병철 부위원장, 그리고 김덕훈 내각총리 등을 수해 피해지역에 보냈고, 이들의 현지 활동 장면은 「노동신문」 1면 상단좌우측에 컬러 사진으로 보도됐다. 즉, 핵심 간부들을 파격적으로 노출시켜 인민들에게 이들이 국정의 일부를 책임지고 있다는 메시지를 보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김정은 위원장의 위임통치 논란은 이와 같은 국정운영방식의 변화와 깊이 연관된 측면이 있다.
그러나 8월 이후 최근까지 김정은 위원장이 다시 국정의 전면에 등장하면서 이러한 위임통치 논란은 점차 수그러들었다. 김정은 위원장은 8월 한 달 동안 당전원회의(제7기 제6차)뿐만 아니라 세 차례의 정치국 확대회의(제15차·제16차·제17차회의)와 두 차례의 정무국회의(제4차·제5차)를 연이어 주재하면서 경제계획의 실패를 인정하고 국가비상사태를 대비한 코로나19 사태 해결방안을 모색하며 수해·태풍 피해 복구를 재촉하는 등 국정의 최고책임자로서 존재감을 더욱 확고히 부각시켰다.
특히 김정은 위원장은 지난 6월 남북연락사무소 폭파로 인해 남북 간 군사적 긴장이 고조될 때 당 중앙군사위원회 제7기 제5차 예비회의를 개최하여 총참모부가 제기한 ‘대남군사행동계획’을 보류시킴으로써 김여정의 대남 사업에 직접 제동을 가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최근 서해북방한계선(NLL)에서 일어났던 우리 국민의 총격사살에 대해 북한 통전부가 김정은 위원장의 직접 사과를 담은 전통문을 즉시 보낸 것은 모든 것을 직접 결정하는 북한 최고지도자의 국정운영방식에 본질적 변화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조치라고 볼수 있다. 결과적으로 김정은 위원장의 통치방식과 관련하여 현재까지 변화는 사실상 없다고 봐야 한다.
지난 10월 10일 열린 북한 노동당 창건 75주년 기념 열병식에서 북한군이 김정은 위원장의 연설을 들으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
참가자들은 모두 마스크를 쓰지 않은 모습이다. ⓒ연합
제8차 당대회 이후 대내외적 변화 예상
김정은 위원장은 노동당 75주년 열병식 기념 연설에서 대내, 대남, 대미를 고려한 나름의 메시지를 언급했다고 볼 수 있다. 먼저 인민들을 대상으로 올해 극심했던 방역과 수해를 잘 극복해줘서 ‘고맙다’는 인사말을 반복하면서 잠시 눈물을 보이는 등 인민들의 감성을 자극했다. 다음은 남한 동포들에게도 따뜻한 마음을 보낸다며 다시 두 손을 잡게 될 날을 기대한다는 유화 메시지를 보냈다. 마지막으로 열병식 현장에서 개량된 신형전략무기를 공개하면서 누구도 넘보지 못할 ‘전쟁억제력’을 갖췄다며 미국을 향해 압박 메시지를 보냈다.
김정은 위원장의 이러한 메시지는 현재 북한이 직면한 세 가지 상황을 잘 반영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무엇보다 김정은 위원장이 직접 인민들의 감성에 호소해야 할 만큼 북한이 직면한 상황이 어렵다는 뜻이다. 그리고 대남 유화 메시지는 우리 국민에 대한 총격 사살 이후 악화된 남북관계를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는 생각이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전략무기를 공개한 것은 11월 미 대선 이후 미국과의 새로운 협상을 위한 준비가 마무리되었다고 볼 수 있는 조치였다.
김정은 위원장은 향후 북한이 나아가야 할 방향과 구체적인 목표를 내년 1월 개최 예정인 제8차 당대회에서 제시하겠다고 밝혔다. 지난 2016년 제7차 당대회에서 결정했던 국가경제계획이 실패했다고 밝힌 이상 새로운 국가경제계획을 제시할 것이며, 더 나아가 남북관계를 비롯해 대미 협상의 방향 또한 재설정할 가능성이 있다. 또한 김정은 위원장의 위임통치 논란에서 보았듯이 제8차 당대회 이후 북한 권력 내부에서 변화도 예상된다. 북한의 실질적 2인자로 평가되는 김여정의 위상 변화와 함께 당규약 개정, 2001년 ‘7·1 경제관리개선조치’와 같은 개혁조치들이 단행될 가능성이 열려 있다. 결과적으로 내년 제8차 당대회 이후 그동안 북한이 해왔던 방식에서 벗어나 국내 정치적 측면뿐만 아니라 대남과 대미 관계에서도 큰 변화가 예상된다. 이에 대한 우리 정부의 전략적 대비가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이 승 열
국회입법조사처 입법조사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