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시대 Vol 1692020.11

기획_코로나19 이후...

코로나19와 종교:
‘한몸’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다

코로나19의 시대, 종교가 가야할 길은 무엇일까. “모이지 말라”는 시대적 요구를 어떻게 받아 안으며 종교 공동체를 이어가야 할까. 코로나19가 묻는 종교의 정체성과 역할은 무엇인지 고민해 본다.

재앙과 재해, 그리고 종교의 함수 관계는 낯설지 않다. 역사적으로 종교는 재앙과 재해가 불러온 새로운 문화에 적응하며, 혹은 적응을 거부하며 변화해 왔다. 그러나 코로나19가 종교에 던지는 문제는 과거와 양상이 전혀 다르다. 감염병 확산 상황에서 사회가 종교에 요구한 것은 단지 “모이지 말라”는 것이었다. 더구나 감염병 확산의 배후로 일부 종교가 지목되기 시작하면서 종교는 합리성, 효율성, 투명성, 공익 등 질병과 싸우기 위해 사회가 갖춰야 할 기본적인 덕목과는 반대의 가치를 고수하는 방해물로 여겨지게 되었다. 방역 의무를 준수했든 거부했든, “모이지 말라”는 요구가 각 종단들에 남긴 파장은 크다. 이제 방역 단계가 완화되어 어느 정도 모임이 가능해졌다 하더라도, 이 요구는 종교의 정체성과 존재 방식을 고민하는 깊은 성찰로 이어져야 한다.

“모이지 말라”는 요구를 도전과 위기로 받아들이기까지
종교는 믿음을 공유하는 이들로 이루어진 모임, 즉 신앙공동체다. 이 공동체들의 결속과 지향을 표현하는 가장 흔한 비유 중 하나는 ‘한몸’이다. 신앙공동체의 구성원들은 모임을 통해 자신이 속한 종교의 세계관을 공고히 하고 생활을 나누며 ‘한몸’이 된다. 그런데 나는 요즘 이 ‘한몸’ 비유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신자유주의 시장경제, 세계화가 이제껏 구축한 신속하고 촘촘한 연결망 덕에 감염병 또한 동시다발로 함께 겪어야 하는 시대에 ‘한몸’이란 사실 얼마나 조심스럽게 사용해야 하는 단어인가. 비대면 문화가 확장되어 몸의 만남이 축소되고 제한된다면, ‘한몸’ 비유를 어떻게 상상하고 사유해야 하는가. 더구나 지금의 한국 사회는 ‘한몸’이란 단어가 정치적 욕망, 종교적 행위와 결합할 때 어떤 파괴력을 가지는지, ‘한몸’이기에 다른 몸들과 상생을 거부하는 몸들이 얼마나 많은지, ‘한몸’에 속하지 못하는 몸들은 또 얼마나 많은지를 너무도 확연하게 보여주고 있다. ‘한몸’이란 과연 누구의 몸인가.

몸은 모든 인간을 ‘인류’로 묶는 보편성의 토대인 동시에 인류를 세분화하는 개별성의 토대이기도 하다. 단지 생물학적 차원을 넘어, 인간의 몸은 정치, 경제, 문화적 맥락에서 정신을 구획하고 통제하고 훈육해 왔다. 성별, 인종, 연령, 친족, 민족, 국가, 계급 등과 같은 차이와 경계에 의해 형성된 개인의 고유한 정체성이 고정되어 있다고 믿었던 근대 사회는 몸의 동질성을 강조했다. 특성을 공유하는 몸들이 집합적 범주로 마치 한몸인 것처럼 묶이고, 그 범주 안에서 몸을 구분하고 통제하는 규율이 발생했다. 몸의 서열과 우위가 결정되었으며, 성별, 연령, 인종, 계급에 따라 무엇을 입고 먹을 것인가가 결정되는 문화적 코드가 만들어지고, 행위와 사고방식의 특성들이 선입견과 만나 전형으로 굳어졌다. 같은 몸 안에서 공유되는 문화적 규정력을 벗어나거나, 자신의 몸이 가진 경계를 초월하여 다른 몸과 만나는 것은 도발과 저항으로 간주되었다.

이러한 몸의 인식에는 몸을 하나의 구체적이고 물리적인 실체로 여기는 사유가 깔려 있다. 피부를 표면으로 하여 닫혀 있는 몸, 마치 돌이나 플라스틱과 같은 무기물처럼 폐쇄적으로 집중되어 있는 어떤 덩어리로 간주하는 것이다. 무기물은 물리적 접촉을 통해서만 그 존재가 확인된다. 따라서 몸을 무기물처럼 생각한다면, 몸의 동질성과 접촉 가능성이 물리적으로 확인되지 않는 상태에서는 관계 형성이 극단적으로 제한된다고 믿게 된다. 몸을 무기물로 인식하는 사고는 공동체를 무기물로 인식하는 사고로 이어진다. 몸과 마찬가지로 공동체를 꽉 닫힌, 고정된 목적을 가진, 일관된 세계관을 가진, 일정한 행위 규범을 가진, 동질적인 몸과 마음을 묶어 주고 정체성을 공고히 하는 폐쇄된 덩어리로 인식하는 것이다. “모이지 말라”는 사회적 요구를 종교에 대한 도전과 위기로 받아들이는 시각에는 몸과 공동체에 대한 이러한 인식이 자리 잡고 있다.

강력한 결속 vs 혐오와 차별, 배타성
동질성을 기반으로 몸과 공동체를 사고하는 것은 공동체 내 강력한 결속을 다지는 데 도움이 되지만, 혐오와 차별과 배타성의 근거를 제공하기도 한다. 특히 신앙공동체들에 작동하는 ‘한몸’에 대한 열망은 신앙으로 묶인 서로 다른 이들의 연합을 가능케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공동체 내부로는 훈육과 강제를, 외부로는 배제를 합리화하는 요인이 되기도 하다. ‘한몸’의 이미지를 공동체 안에 적용하는 순간 우리는 공동체의 안과 밖을 구분하기 시작하고, 공동체 내부 구성원의 다름을 불온하게 생각하기 시작하고, 바람직하다고 여겨지는 몸의 전범을 세워 모방하길 강요하고, 노골적으로 혹은 암암리에 그 몸의 경계 안에 들어올 수 있는 기준을 세우고, 경계 밖에 있는 이들을 밀어내기 시작한다. 생각해 보라. 그 전범이 된 몸이 어떤 형상을 떠올리는지. ‘정상’적이고, ‘표준’적이고, ‘건강’하고, ‘조화로운’ 그 몸은 당신의 몸인가, 아니면 누군가가 강요한 몸인가.

“모이지 말라”는 요구가 시작된 후 많은 종교공동체들이 모임이 가능했던 시간들, 몸으로 만나 ‘한몸’ 되던 시간들에 대한 애틋한 향수를 표현했다. 그러나 ‘한몸’ 안에서 상처 받던 이들, 자신의 개성과 삶의 방식을 포기하고 ‘한몸’에 속하기 위해 분투하던 이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한몸’이 될 수 없어 공동체를 떠나야 했던 이들에게도 ‘한몸’이란 살가운 기억을 불러올까? 우리 사회에 있는 많은 ‘한몸’ 신앙공동체들 중, 감염병으로 인해 가장 큰 피해를 입고 있는 비정규직, 계약직 등 취약 계층이 자신의 몸을 의탁할 때 아픔을 함께할 ‘한몸’들, 감염병 확산과 더불어 더 극심한 혐오의 대상이 되어 버린 중국인과 재한 중국인들, 외국인 노동자들을 기꺼이 지체(肢體)로 여길 ‘한몸’들, 증가된 생활고를 겪고 있는 신체적·정신적 장애인들의 불편을 함께 감당할 ‘한몸’들, 봉쇄조치로 인해 더 심각한 가정폭력을 경험하고 있는 여성들의 드러나지 않은 상처를 자신한 몸에 새길 수 있는 ‘한몸’들이 얼마나 있을까? 비대면 문화 적응이 어려워 더욱 소외되고 있는 노인들과 극빈자들은 또 그 ‘한몸’의 어디에 속해야 할까?

신앙공동체는 ‘함께 있음’으로써 의미를 갖고, 내려놓음과 비움을 통해 비로소 살아 있게 된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作, 최후의 만찬(1490)
코로나19 시대의 종교, 과감한 사고의 전환 필요
코로나19로 인한 비대면 문화는 아이러니하게도 우리의 몸이 개별적, 폐쇄적, 완결적이라는 인식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다. 인간의 몸은 무기물이 아니다. 몸은 동질적인 것, 돌멩이처럼 닫힌 것, 완성된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이질적인 것, 변화하는 것이다. 몸은 우리가 인지할 수 없는 부분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자율신경을 통해 생명을 이어간다. 또한 몸은 외부의 자극을 통해 생성된다. 몸은 다양한 방식으로 밖과 접촉하고, 그 접촉을 통해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으로 살아 있음을 감지한다. 몸을 완성된 덩어리가 아니라 서로 다른 기능을 하는 유기체들의 조합으로 생각한다면, 몸과 몸의 접촉은 일정한 공간에서의 신체적 접촉 외에도 훨씬 미세하고 광범위하게 발생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접촉한다’는 것은 보고 듣는 것, 냄새 맡는 것, 말하는 것, 자극하는 것, 공감하는 것, 불안하게 하는 것 등 공고한 나의 개별성을 흔들리게 하는 모든 감각, 지각 행위를 포함하는 것이다. 따라서 비대면 시대 속에서도 우리는 늘 타자와 접촉하며 살고 있으며, 접촉하지 않고는 살 수 없다. 한 공간에서 만나고 만지고 어우러지는 접촉만을 참된 접촉으로 간주하고 그 접촉이 없다면 공동체 내 회합과 관계 형성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이렇듯 항상 이루어지고 있는 수많은 접촉의 기회들을, ‘몸’의 만남들을, 함께 변화하고 성장할 수 있는 관계의 가능성들을 무언가 결핍된, 진짜가 아닌, 임시방편용으로 치부하게 된다.

비대면 문화가 대면 문화를 대체할 수 있다거나 대체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물론 한 공간에서 함께 만나 감각과 지각을 모두 동원하여 상대방의 전인적인 존재를 경험하는 대면 접촉은 비대면 접촉과 차원이 다른 접촉이다. 내가 우려하는 것은 많은 종교의 구성원들이 아직도 고수하고 있는, 대면 문화와 비대면 문화가 공존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이분법적 사고, 코로나19가 장기화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비대면 문화를 그저 참아내야 할 대상, 극복의 대상으로만 생각하는 경직된 사고다. 몸과 공동체의 동질성에 집착하고, 한 공간에 모이는 대면회합을 통해서만 신앙공동체의 정체성이 규정된다는 인식은 수많은 일상적 접촉의 가능성들을 창조하고 실행할 상상력을 억압하며, 공동체 구성원들의 자율성과 책임성을 무력화한다. 코로나19의 시대, 그 이후의 시대에 종교가 단지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시대와 호흡하며 살아가기를 원한다면 과감한 사고의 전환이 필요하다. 경직된 사고로 일관하다 보면 결국 종교는 고립과 소외를 자처하게 될 것이다. 아니, 고립과 소외는 이미 시작되었다.

코로나19가 우리에게 묻는 종교의 정체성
그렇다면 코로나19 시대 신앙공동체의 몸이란 어떤 몸일까. 나는 오히려 ‘한몸’이라는 기존의 인식을 포기할 때 신앙공동체들이 ‘살아 있는 몸’으로 기능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동질성을 기반으로 하는 기존의 ‘닫힌 몸’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뚜렷한 목표 아래 모여 단단하게 ‘한몸’이 되는 기존의 생존방식을 버리고, 고정된 정체성을 끊임없이 의심하며, 안으로는 구성원들 사이의 차이를 감추지 않고, 밖으로는 공동체의 공간을 지역사회와 공유하며 적극적으로 타자를 받아들이는 방식으로 말이다. 이러한 신앙공동체는 이념과 성과를 통해 존재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구성원들의 작고 수많은 접촉을 가능케 하는 느슨한 틀이 되어 줌으로써, 다만 ‘함께 있음’으로써 의미를 갖는다. 내려놓음과 비움을 통해, 공동체는 비로소 살아 있게 되는 것이다. 예수가 자신의 몸을 잘게 부수어 빵과 포도주가 되어 제자들에게 내어 주었듯, 석가세존이 열반을 미루고 녹야원으로 돌아와 다섯 비구들과 삶과 수행을 함께했듯 말이다.

프랑스 철학자 장 뤽 낭시(Jean-Luc Nancy)는 이런 공동체를 ‘무위(無爲, inoperative)의 공동체’라 했다. 여기서 ‘무위’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공동체가 기획과 프로그램의 완수를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무위의 공동체는 ‘함께 있음’ 자체가 목적이다. 이상을 앞세워 전체주의적 방식을 통해 목적을 성취하던 과거의 방식을 버리고, 고착되지 않는 관계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열린 공동체가 무위의 공동체다. 이러한 공동체는 더 이상 확장과 완성에 매진하지 않고, ‘중단’, ‘파편’, ‘유예’ 등 구성원들이 모두 경험하는 삶의 취약성을 공동체의 자연스러운 요소로 받아들인다.

모두가 보편적으로 불안정하고 취약하며, 그렇기 때문에 서로 접촉하고 기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공동체의 존재 근거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공동체는 이끄는 자의 이상과 계획에 좌우되지 않고 구성원들의 삶과 관계, 또 그 한계를 통해 움직인다. 무위의 공동체로서 신앙공동 체는 대면 회합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비대면 상태에서도 깊은 관계 맺기가 가능한 방식들을 고민하며, 비대면 문화에서 소외되는 사람들을 보듬을 수 있는 실행 가능한 대면의 조건들을 만들어 내며, 모두가 함께 살아가기 위해 자율적, 자발적, 일상적, 국지적 접촉을 가능케 하는 소통의 장소로, 넉넉하고 너른 평상으로 기능한다.

물론 이런 신앙공동체의 미래는 초라하고 비능률적일 것이다. 하지만 이 공동체에는 기획과 성과보다 함께 머리를 맞대 고민하고, 발을 맞추고, 더디고 불편한 이를 위해 멈추고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다. 서로 의지하지 않고는, 관계 맺지 않고는 살아남을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나는 이 사람의 길이 신앙공동체의 최우선의 선택이 되어야 하며, 거기에 코로나19가 우리에게 되묻고 있는 종교의 정체성과 존재 이유가 있다고 믿는다.

화려하고 멋들어진 세상에서 초라하고 소박한 것들에게 눈길을 보낼 수 있는 것이 종교다. 정부와 지자체처럼 정책 마련을 할 수는 없지만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며 작지만 깊은 변화를 꿈꾸어 볼 수 있는 공동체가 종교다. 경쟁과 효율을 최고의 가치로 추구하는 자본의 흐름에 유일하게 조직적으로 “다른 길도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종교다.

조 민 아 조지타운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