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통일 30년 후...
1990년 추석
그리고 30년 후
1990년 10월 3일 독일 하늘 위에 뜬 한가위 보름달은 유난히 빛나고 포근한 인상을 주었다. 제국의회 의사당 앞 공화국 광장에는 크고 작은 삼색기를 손에 쥔 수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연방대통령과 수상, 정계의 지도자들과 함께 독일 통일을 축하하는 축제에 모인 이들이었다. 제국의회 건물 지붕 밑에는 예부터 ‘독일 민족에게’란 문구가 간판처럼 새겨져 있었다.
독일 통일을 축하하는 축제 현장의 한가운데 서다
정각 0시, 바이체커 대통령이 독일 통일을 선포하자 대형 독일 국기가 게양되고 평화의 종이 울렸다. 검정, 빨강, 노란색의 폭죽들이 하늘로 솟아올랐다. 제국의회 뒤에서는 하늘을 향해 3개의 스포트라이트가 켜졌고 무엇인가 찾으려는 것처럼 분주하게 움직였다. 100만 명이 넘게 모인 대규모 파티에서 사람들은 모두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하늘이 떠나갈 듯 환호했다.
한바탕 축제로 시작된 독일의 통일은 냉전의 종식을 전 세계에 알리는 신호이기도 했다. 필자는 이 역사적 현장의 한복판에서 이 광경을 함께 지켜봤다. 분단된 국가에서 태어나 어린 나이에 멀리 간다고 갔는데 그곳은 또 다른 분단국가였고, 거기서도 또다시 분단된 도시에서 살았다. 베를린 장벽이 붕괴된 후 독일 통일이 현실화되는 바로 그 자리에서 함께하며 기뻐하고 환호해야 마땅했을 것이지만, 필자는 그러지 못했다. 아직도 고국이 분단국가로 남아 있기 때문이었을까? 그해 엄청난 풍년을 맞은 독일에 비해 한국에서는 추석을 맞아 어떤 것들을 추수했는지 궁금해서 그랬을까? 단지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 역사적인 통일의 순간(빌리 브란트 총리의 표현처럼 “원래 하나였던 것이 다시 하나가 되는” 이 순간) 모두가 기쁨에 취해 있었지만 필자의 정신은 어느 때보다 말짱했고, 갑자기 덮쳐오는 소외감으로 우울해졌다.
필자도 엄연한 베를린의 시민이지만 독일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순식간에 구경꾼이 돼 버린 것 같았다. 마치 이 축제에 초대받지 않은, 독일에 속하지도 않은 사람이 멀찌감치 떨어져 구경만 하는 신세 같은 느낌이었다. 당혹스러운 모습을 숨기기 위해 얼굴 앞에 카메라를 들고 사진을 찍었다. 하늘 위 보름달도 폭죽과 스포트라이트와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한 조각의 구름 뒤에 얼굴을 가리고 숨어버린 듯했다. 1990년 10월 3일 통일이 이루어지던 그 날에 느꼈던 감상을 적은 필자의 글이 학교 교지에 발표됐으나, 필자의 감정을 이해해 주는 친구는 아무도 없었다. 다만 보름달에 대한 나의 감상이 매우 인상적이었다는 한 친구의 말이 그나마 위로가 됐다.
통일 이후 이주민 혐오
하지만 통일 이후 발생한 일련의 사건들은 당시 내가 느꼈던 감정이 앞으로 올 독일 사회에 대한 우려였다는 것을 깨닫게 했다. 독일 통일은 민족주의를 앞세워 동독 통합에 집중하면서 독일 사회 내 이주민들을 배제했다. 1991년 동독 남부 호이에르스베르다(Hoyerswerda)시와 1992년 동독 북부 로스톡(Rostock)-리히텐하겐(Lichtenhagen)시에서 난민, 망명자, 이주자(대부분 베트남 사람들)가 살던 아파트가 극우파에 의해 공격받았다. 일반 주민들은 불타는 건물을 둘러서서 구경하며 박수를 쳤다. 경찰은 며칠 동안이나 방관하고 개입하지 않았다. 정치가들은 피해자들을 대피시켰지만 가해자를 잡는 데는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처음에 독일 사회는 이러한 이주민 혐오 범죄들을 통일 과정과 그 정책에 불만을 가진 동독 주민들이 ‘본의 아니게 저지른 짓’ 정도로 이해했고, 몇몇 학자들은 사회주의시대 동독에서의 억압적 구조와 타자에 대한 배타적 성격을 들어 이 문제를 설명하려 고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이주민 혐오 문제가 동독만이 아니라 전 독일의 문제라는 것이 곧 드러났다. 1992년 서독 북부의 소도시 묄른(Mölln)에서 네오나치(Neo-Nazis)들이 한밤중에 가정집에 화염병을 던져 잠자고 있던 터키 이주민 가족의 두 아이와 할머니가 죽었다. 또 1993년 서독 중부 졸링겐(Solingen)시에서 극우파들이 터키 이주민들이 살던 집에 저지른 방화로 5명이 죽었다.
통일 이후 외국인과 이주민을 향해 극우파들이 저지른 일련의 학살사건은 모두에게 충격적이었지만 독일에 사는 이주민들에게는 더욱 큰 충격이었다. 이는 통일 직후에만 나타나고 사라졌던 것이 아니었다. 동독 출신 나치 테러 지하조직 NSU는 2000년~2007년 사이 전국 각지에서 9명의 이주민과 경찰 한 명을 살해하고 수십 건의 살해 및 폭탄테러를 기도했다. 인종 차별적인 범죄행위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졌지만 경찰은 NSU 사건의 범죄자를 극우 테러단체가 아닌 이주민 피해자 주변을 중심으로만 찾았고, 오랫동안 이주민 사이에서 벌어지는 갈등의 결과라고 추측하면서 오히려 이주민을 의심하고 조사하기도 했다.
통일은 다양성과 다원성을 존중할 때 완성될 수 있다.
사진은 독일 통일의 상징인 브란덴부르크문 앞에서 인종 차별 반대 인간사슬 시위를 하는 시위 참가자들 ⓒ연합
오래된 인종 차별의 전통과 이주민 차별
이쯤이면 이주민에 대한 학살과 살해를 옛 동독의 문제라거나 통일 직후의 징후로만 설명하기는 힘들어진다. 인종주의는 독일 사회에 존재하는 구조적인 문제로 볼 수 있다. 사실 동독과 서독에는 인종주의와 외국인 혐오의 전통이 오래전부터 있었고, 나치에 대한 반성과 홀로코스트에 대한 과거 극복 노력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다. 탈식민 시각에서 볼 때 19세기 말 독일제국 황제가 했던 ‘황색인의 위협’이라는 유명한 발언처럼, 아시아인들은 최근 코로나 팬데믹 이후 아시아인에 대한 혐오를 더욱 절실히 몸으로 경험하고 있다. 언론과 미디어에서는 전염병을 인종화하고 있고, 일반인들은 아시아인처럼 생긴 사람에게 대낮 길거리에서 물리적 폭력을 가하고 있다. 보통 독일에서 아시아인은 항상 친절하고 조용하고 겸손하다는 인상을 가지고 있다. 미디어나 언론에 문제아로 언급되는 경우는 거의 없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긍정적으로 보도되지도 않고, 아시아인이 TV 앵커나 배우로 노출되는 사례도 극히 드물다. 그래서 아시아인은 독일 사회에서 그다지 눈에 띄지도 않고, 그들의 음성도 제대로 들리지 않는 조용한 집단이라는 인식이 팽배하다.
이런 상황에서 필자는 1990년대 한인 2세 단체를 조직한 경험을 바탕으로 2000년대 후반에 친구들과 젊은 아시아인의 단체인 사단법인 코리엔테이션(Korientation)을 설립했다. 이 단체는 아시아인들의 권리를 주장하고 이해를 대표하면서 이들이 독일 사회의 당당한 일원이라는 것을 주장한다. 코리엔테이션이 진행하는 여러 프로젝트 중 ‘베를린 아시아영화제’와 ‘아시아계 독일인 미디어 임파워먼트(MEGA)’가 대외적으로 많이 알려져 있다. 또한 연방총리가 주관하여 이주민 정책을 논의하고, 이주민의 목소리를 듣는 ‘통합을 위한 정상회담’에 정기적으로 참여하여 독일의 이주민 정책 형성 및 집행과정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있다. 코리엔테이션은 창립 초기 ‘통합의 모범생’이란 프로젝트로 세간의 관심을 끌었는데, 그 프로젝트의 문제의식은 다음과 같았다. 이주민 이 아무리 독일 사회에 잘 적응해서 독일 국가대표 선수가 되고, 독일 공무원이 되어 통합의 모범생이라 칭찬받을지라도 다수에 의해 주도되는 독일 사회(주류 사회)가 변하지 않으면 이주민에 대한 일방적인 요구와 차별은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아시아계 독일인이라는 개념과 정체성이 낯설었던 독일에서 이런 활동은 아시아계 독일인들이 독일 사회에 자기의 목소리를 내고 차별에 저항하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30년 이후 한국, 포용이 통일의 첫걸음
독일이 통일된 지 벌써 30년이지만, 통일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그때의 흥분은 가라앉았고 모두들 냉정해졌다. 통일이 민족의 대통합이라고 여겼지만, 결국 통일은 다양성과 다원성을 존중할 때 완성될 수 있는 것이었다. 통일 이전에 독일은 이미 다문화 사회로 발전했었는데, 이를 무시하고 민족적 결합만 추구하다가 도리어 극우 테러와 인종주의, 민족주의 운동의 위협에 노출되고 말았다.
한국은 독일 통일 3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분단된 상태이며, 남북의 거리는 좀처럼 좁혀지지 않고 있다. 이런 시점에서 한국은 통일을 어떻게 준비해야 할까? 한국은 독일 통일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먼저 하루빨리 남한 사회가 이미 다문화 사회로 변화하고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이주민을 국민의 일원으로 받아들이고 사회의 여러 소수자들을 타자화하지 않고 한국의 다원성을 확장시켜야 한다. 어떤 식으로 통일이 이루어지든 간에 획일적인 민족주의는 통일과정에서 커다란 위협으로 다가올 것이다. 주민 한 사람 한 사람이 타자를 포용하는 자세를 키우는 것이야말로 통일을 준비하는 첫걸음이다.
이 유 재
튀빙겐대학교 한국학과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