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시대 Vol 1692020.11

김제의 너른 평야

우리고장 평화 ROAD

싸목싸목 걷다 보면
솔래솔래 풀리는
김제시 평화 로드

김제에 켜켜이 쌓인 역사의 압축 파일을 하나하나 풀다 보면 내가 가진 본래의 ‘나’를 만나게 된다. 싸목싸목(천천히) 걷는 동안 얽히고설킨 역사의 빗장들이 솔래솔래(조금씩) 풀리는 평화 로드다.



김제라는 지명에는 언제나 지평선이라는 단어가 따라붙고, 지평선이라는 단어는 언제나 일망무제라는 단어와 함께 등장한다. 일망무제는 한눈에 그 풍경이 다 들어오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만큼 김제평야는 넓다.

김제는 산이 별로 없다. 비산비야의 작은 언덕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을 뿐, 오죽하면 ‘김제의 풍수는 논두렁도 산으로 봐야 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Course. 1 꿈꾸는 사람들의 본향, 그릇골
김제시 금산면 동곡마을은 우리말로 하면 구릿골이다. 원래 이곳은 그릇을 굽는 마을이라 하여 그릇골이라 불렸다는데 언제부턴가 그릇골이 구릿골이 되고 이것이 일제강점기에 한자로 굳어지며 동곡으로 바뀌었다. 지금도 동곡마을 골짜기에는 도침이나 도자기 파편들이 많이 나온다.

동곡마을은 증산교를 창시한 강증산의 활동지로 유명하다. 강증산이 방 한 칸을 빌려 약방을 열었던 자리가 지금도 남아 있다. 한반도에 극심한 혼란이 끊이지 않던 시기, 강증산은 동학혁명이 실패한 뒤 인간의 힘으로는 세상을 바꾸기 어렵다고 판단하여 하늘과 땅의 질서, 인간의 질서를 깊이 고민하다가 마침내 ‘후천개벽’이라는 혁명적 인식에 도달한다. 최제우, 김광화, 김일부 등 선배들의 사상을 종합한 후천개벽 사상은 요즘 말로 하자면 ‘기울어진 척추’를 바로잡자는 것이다.

동곡마을 앞산인 제비산(帝妃山)은 조선조 최대의 문제 인물이었던 정여립이 ‘천하는 공물인데 어찌 일정한 주인이 있으랴’라는 천하공물설을 주장하며 활동했던 곳이다. 당시에는 전주부에 속했던 이곳에서 정여립은 대동계(大同契)를 조직, 신분이 아니라 능력에 따라 사람을 등용하고 지도자는 민중의 뜻을 따라야 한다는 일종의 공화국 사상을 설파했다.

일찍 핀 봄꽃은 추위와 싸워야 하는 법. 결국 정여립은 모반자로 낙인찍혔고 진안의 죽도에서 죽는다. 당시 진안현감이었던 민인백의 『토역일기』에 의하면 정여립은 칼자루를 땅에 꽂고 자신의 목에 칼날을 찔러 자결했는데, 그때 정여립의 목에서 마치 소가 우는 듯한 소리가 났다고 한다. 이후 전국 곳곳에서 전해지는 ‘아기 장수’ 설화에서는 이와 같은 장면이 반복되어 나타나기도한다.

새로운 세상을 꿈꾸었던 서른아홉의 사나이 정여립은 당쟁의 파도와 싸우다 죽고 말았지만, 시간을 뛰어넘어 구릿골의 강증산에게 새로운 혁명의 사상을 불어넣었다.

ㄱ자로 지어진 금산교회

벽골제 쌍용광장


Course. 2 금산교회와 110년 전의 악수
오리알터로 불리는 금평저수지는 나무데크를 따라 싸목싸목 걷기 좋은 호반의 길이다. 오리알터는 오리들이 알을 낳는 곳에서 유래했다는 말도 있고, ‘누군가 온다’는 뜻의 ‘올’에서 나온 것이라는 말도 있다. 그 누군가는 미륵이다. 즉, 이곳 오리알에서 미래의 세상이 시작될 것이라는 예언이다.

혁신적 미륵불교와 민족적 신흥종교들이 자리 잡은 이 지역은 다른 종교에도 텃세를 부리지 않는다. 김제평야만큼 넓고, 넓은 만큼 넉넉하다.

금산교회로 간다. 1905년에 세워졌으니 이미 100년을 훌쩍 넘겼다. 이 교회는 한국 기독교가 토착화되는 과정을 잘 보여주는 곳이다. 당시만 해도 남녀가 한자리에 앉아 집회를 연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들었다. 그 때문에 교회를 ‘ㄱ’자로 지어 모서리에 목사가 설교하는 강단을 두고, 남자는 남자끼리 여자는 여자끼리 앉아 서로 얼굴을 마주 보지 못하게 했다. 교회의 상량문에 남자석은 한자로, 여자석은 한글로 적혀 있는 것도 당대 생활상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이 교회에는 당시 신분 질서를 뛰어넘은 아름다운 미담이 있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김제의 갑부인 조덕삼과 떠돌이 생활을 하다가 조덕삼의 마구간 머슴 노릇을 하던 이자익이다. 두 사람은 함께 금산교회에 다녔다. 1907년 금산교회는 처음으로 한국인 장로를 선출하는데 이때 조덕삼을 제치고 이자익이 장로로 천거됐다. 신분제가 폐지되었다고는 하지만 아직 반상의 구분이 엄격하던 때라는 것을 생각하면 보통 큰일이 아니었지만, 조덕삼은 신도들의 결정을 흔쾌히 따르고 이자익을 평양신학교에 보내 본격적인 목회자의 길을 걷도록 후원한다. 이자익은 이후 금산교회로 돌아와 담임목사가 되었고, 전국에 20여 개의 교회를 설립한다. 대전신학대학교의 설립자이기도 한 이자익은 초창기 한국 기독교사의 ‘큰 바위 얼굴’로 통하는 인물이다. 조덕삼과 이자익의 미담은 김제평야만큼이나 화통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아리랑 문학마을 내에 조성된 하얼빈역 ⓒ김제시

Course. 3 아리랑 문학마을과 농민의 애환이 담긴 새창이다리
조정래의 대하소설 『아리랑』은 동학농민운동 이후부터 8·15 광복까지 한민족의 수난과 투쟁을 그린 작품이다. 『아리랑』에는 조선에서 곡물을 군량미로 쓰기 위해 수탈해 일본으로 실어 나르던 과정을 다룬 부분이 있다. 작품 속에서 김제의 만경평야, 금산사, 일본인 대농장, 외리마을, 동진강 간척지 등 김제 주요 지역이 배경이 된다.

특히 수탈의 현장이었던 내촌마을에는 『아리랑』 문화 콘텐츠를 바탕으로 ‘아리랑 문학마을’이 조성되어 있다. 이곳에는 소설 속의 근대 수탈기관인 면사무소, 주재소 등과 너와집이나 갈대집 같은 민가를 비롯하여 안중근 의사의 의거를 재현한 하얼빈역 조형물이 있다. 내촌, 외리마을에는 소설 속 주요인물인 손판석, 지삼출, 감골댁, 송수익의 가옥이 조성돼 있다. 한적한 시골이지만 역사적으로 절대 가볍지 않은 마을, 목가적이거나 서정적이지도 않은 마을, 마음 깊이 묵직한 무엇인가가 내려앉는 마을이 아리랑 문학마을이다.

청하면의 만경대교 부근은 일제강점기 초기까지 신창진(新倉津)이라는 포구로 불렸다. 이곳은 군산으로 나가는 길목인데,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김제평야에서 생산되는 쌀을 가져가기 위해 만경강에 만든 나루터다. 교통량이 많아지자 1933년에 시멘트 다리를 놓았는데, 이를 ‘새창이다리’ 또는 ‘만경교’라 불렀다. 이 다리는 1989년부터 통행을 제한하고 있으며 지금은 망둥이와 숭어를 낚는 낚시꾼들이 하루에도 수백 명씩 몰려드는 곳이다.

하얼빈역 내에 재현된 안중근 의사의 의거 장면

일제강점기에 조성된 새창이다리


Course. 4 지평선, 내 마음의 가늠자
싸목싸목 걷는 동안 우리는 통일의 길에서 하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고, 자신의 마음속에 엉켜 있는 실타래를 풀어내기도 한다. 엉킨 실타래를 풀어놓으면 실타래는 지평선처럼 무궁무진하게 펼쳐진다. 지평선 안에서는 아무런 걸림도 없고 미사여구도 불필요하다.

끊이지 않는 길, 우리들 마음 안에 너르디너른 한 획의 지평선을 받아들이는 일. 어쩌면 이것이 대동이고 평화가 아닐까! 유독 김제에 혁신적 사상가들이 많이 나온 이유도 어쩌면 저 지평선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우리들의 삶과 마음의 기울기를 알게 해주는 가늠자를 보고 싶거든 언제든 김제로 오시라!

+ Information
동곡마을 : 전북 김제시 금산면 청도리
금산교회 : 전북 김제시 금산면 모악로 407
아리랑 문학마을(내촌) : 전북 김제시 죽산면 홍산리
새창이다리 : 전북 김제시 청하면 동지산리

정 병 헌 민주평통 김제시협의회 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