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관계를 숫자로 표현하면 얼마나 될까? 한양대학교 아태연구소가 발표한 한반도평화지수(KOPI)는 정치, 군사, 경제, 사회, 문화 등 각 분야에서 한반도 평화에 긍정적인 방향으로 혹은 부정적인 방향으로 영향을 미친 사건을 분석하여 남북 간의 평화정도를 지수화한 것이다.
한반도 평화지수의 모델이 된 것은 ‘COPDAB(Conflict and Peace Database)’이다. ‘COPDAB’는 미국 메릴랜드대학교 에드워드 아자르 교수가 1948년~1978년까지 약 30년간 세계 135개국을 대상으로 국가 간 갈등을 계량화하기 위해 개발한 분석방법론이다. COPDAB는 평화적인 통합을 +92, 전면 전쟁을 -102로 설정하고 정치, 경제, 문화 등 8가지 범주에서 일어나는 국가 사이의 사건을 영향 정도에 따라 수치로 반영한다. 국가 간의 관계 정도를 수치화한 시뮬레이션에서 한미관계나 한일관계는 기본적으로 30을 넘었다. 정부 간 정책충돌이나 갈등이 있어도, 경제분야의 교류와 민간분야의 협력이 관계를 뒷받침하고 있어 기본적인 국가관계는 안정적으로 유지되었다.
반면 남북관계는 정치적 상황에 따라 매우 불안정하게 요동쳤다. 남북교류가 활발한 시기에는 이런저런 교류와 협력이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지만 매우 불안정했고 사건 하나하나가 남북관계에 미치는 영향이 컸다. 지속적이지도 않았다. 일시적으로 ‘+’로 수치화되어도 시간이 지나면 ‘-’로 수렴했다. 남북 사이의 기본값은 ‘-1’이었다. 남북은 ‘휴전’상태이기 때문에 아무런 일이 없다고 해서 다른 나라와 같은 ‘0’으로 설정하지 않았다.
2020년 6·25전쟁 70주년이 되었다. 3년의 전쟁 끝에 휴전협정에 조인한 지 67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휴전 중이다. 남북이 군사적 긴장 완화에 합의했고, 정상회담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남북관계의 기본값은 큰 변화가 없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기본값에 가까워졌다.
『넛지(Nudge)』의 저자 리처드 탈러는 인간의 비합리적인 선택을 지적한다. 인간이 합리적이고 옳은 선택을 할 것 같지만 실상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인간에게는 ‘현상유지 편향’이 있어서 설정된 기본값(Default)을 바꾸지 않고, 유지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처음 거래했던 은행의 통장을 바꾸지 않는 것, 처음 앉았던 자리에 계속 앉으려고 하는 것, 이사를 가도 살던 동네에서 크게 벗어나려고 하지 않는 것, 처음 구입한 회사의 제품을 계속해서 구입하는 것이 현상유지 편향의 대표적인 사례다. 무료구독 후에 정기구독을 권하는 잡지 판매나 월정액을 정해두고 자동으로 결제하도록 유도하는 것도 현상유지 편향을 이용한 마케팅이다. 다이어트를 결심하고 실천하지 못하는 것, 운동이나 취미를 새로 시작했다가 포기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다음 단계로 나아가지 않고 원위치로 돌아가려는 경향 때문이다.
기본값을 어떻게 설정하느냐에 따라서 생각의 방향과 결과는 크게 달라진다. 남북관계도 그렇다. 남북관계의 기본값은 ‘휴전’이다. 한반도 평화와 번영을 이야기하고, 비핵화 논의를 해도 ‘전쟁도 끝나지 않았는데’라는 생각을 피해갈 수 없다. 6·25전쟁이 일어난 지 70년이 되었지만 여전히 전쟁을 매듭짓지 못했다. ‘전쟁을 쉬고 있는 남북’이 아닌 ‘전쟁을 끝내고 새롭게 시작’하는 남북관계로 기본값을 바로 잡아야 한다. 70년 동안 부여잡고 있던 ‘전쟁’의 끝자락을 놓고, 평화의 손을 잡아야 한다. 이제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