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통일 현장
인도적 대북협력의 현재와 새로운 길
“분단 치유는 우리의 일,
다시 희망을 세우자”
4·27 판문점 선언이 벌써 3주년을 맞았다. 몇몇 민간단체들은 판문점에 모여서 평화의 소망을 다시 다짐했다.
북은 같은 날 평양에서 ‘김일성·김정일주의청년동맹 10차 대회’를 개최했다. 불과 3년 만에 남북 정상이 맞잡았던
손조차 기억에서 낯설어졌다. 남북연락사무소 폭파보다 더 험한 일이 일어나지 않은 것을 위안으로 삼아야 하나.
판문점 행사장에서 김수영 시인의 <아픈 몸이>라는 시를 아픈 마음으로 새겼다.
  “이제는 나의 이 늙지도 젊지도 않은 몸에... /
아픈 몸이 / 아프지 않을 때까지 가자 /
온갖 식구와 온갖 친구와 온갖 적들과 함께 /
적들의 적들과 함께 / 무한한 연습과 함께”
- 김수영, <아픈 몸이>
  40대 초반에 남북협력에 동참하여 60대 중반에 이르렀으니 ‘늙지도 젊지도 않은 몸’이 맞는지는 모르겠다. 현재 ‘대북협력민간단체협의회(북민협)’ 소속 단체에서 일하는 직원들 대부분은 북을 방문한 경험이 없고 협력현장을 경험한 적도 없다. 버텨도 전망이 불안하다. 그래서 희망을 갖고 일하다가 절망을 안고 떠나는 젊은이들이 적지 않다. 실망한 시민들도 자주 만난다. 25년 넘게 남북협력 현장에 참여했지만 그분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어서 궁색하다. 조심스럽게 “마음이 아파도 꿋꿋하게 버티면서 나아가자”라고 말을 건넨다. 70년이 넘는 기간 동안 통일운동을 하면서 혹은 이산가족 상봉을 기다리면서 사그라진 분들을 생각하면서 힘을 내야 한다. 협력 현장에서 함께 일하다 먼저 돌아간 북측 관계자들을 기억해도 그렇다.
문 걸어 잠근 북, 단기간에 협력 재개 쉽지 않아
  작년 말부터 신의주 세관이 열린다는 무수한 ‘예언’이 허언이 되더니, 4월 중에는 기필코 열린다고 언론도 촉각을 세우고 있다. 북·중 교역이 시작되어야 우리도 북과 왕래할 수 있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제제재가 면제되고 코로나19 방역에 성공해 우리 물자가 인도적 성격이건 경협의 성격이건 북으로 전달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할 듯하다.
  북은 그야말로 ‘건국사상총동원운동’을 제대로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작년 말의 ‘80일 전투’와 연초의 ‘8차 당대회’에 이어서 ‘세포비서대회’가 열렸고 ‘청년동맹대회’도 뒤를 이어 열렸다. 거의 매일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방침이 하달되고 있다. 북·미관계와 남북관계의 소강상태 그리고 코로나19 팬데믹을 활용하여 외부 세계에 문을 걸어 잠그고 민족경제와 자력갱생체제를 확립해 자본주의 문화에 흔들리지 않는 혁명사상을 결집하려는 것이다. 말 그대로 ‘사회주의문명국’을 건국하려는 기세이다. 그런 굳은 결심으로 세포비서대회 폐회식에서는 “더욱 간고한 ‘고난의 행군’을 할 것을 결심하였다”라고 밝혔다.
2019년 1월 14일 열린 대북협력민간단체협의회 정기총회
  불가결한 자원은 미국과 대립의 강도를 높이고 있는 중국이 제공할 것으로 보인다. 최근 「노동신문」(3월 23일)은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김 위원장에게 보낸 구두친서에서 “두 나라 인민들에게 보다 훌륭한 생활을 마련해 줄 용의가 있다”라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북한을 지원하겠다는 뜻을 밝힌 것으로 분석된다. 이런 조치의 일환인 듯 중국 통계에 따르면 지난 3월 중국의 대북 수출액은 1,297만 달러에 달해 3,000달러에 불과했던 2월에 비해 대폭 늘었다. 남북관계는 나빴다가도 급속 해빙된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이번에는 쉽지 않을 것 같다.
북은 이제까지 남이나 미국에 속을만큼 속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분명하고 앞으로 협상이 있다면 그것이 ‘정상국가’로 진입할 마지막 기회라는 것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북·미회담도 북에게 대단히 매력적이고 실리적인 내용이 아니라면 꿈쩍도 안 할 것이고 남북대화는 더욱 그러하다. 북은 이런 방향을 꽤 긴 기간 동안 유지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 “북이 얼마 못 가서 망할 것”이라는 주장도 그렇고 “북이 얼마 못 가서 손을 벌릴 것”이라는 예측도 믿을 만한 것 같지 않다.
차분하고 단단하게 여건을 만들어 가야
  호흡을 가다듬고 현 국면을 전환시킬 수 있는 노력을 해야 한다. 단시간 안에 협력을 재개하겠다는 조바심을 버리고 편법을 찾겠다는 유혹도 물리쳐야 한다. 차분하고 단단하게 관계 개선의 여건을 만들어야 한다. 인도개발협력에 한정하여 우리가 할 일을 몇 가지 제안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국면 전환을 위한 사회적 동력을 획득해야 한다. 현 정부는 이전 정부에 비해 전향적인 정책을 표방하고 있다고 하지만, 남북관계에 관해서는 여전히 정부 주도의 관성에 머물러 있다는 평가가 있다. 국회나 시민사회는 정부에 ‘협조’해 달라는 분위기가 여전한 듯하다. 현 정부의 임기 만료가 다가오더라도 시민들의 지지가 확대되면 북과 대화할 수 있는 동력이 생긴다. 통일에 관한 담론은 잠시 접어두고 통일의 필요조건인 ‘평화상생’에 관한 사회적 공감대를 이루어야 한다. 많은 지자체에서 북과의 협력에 열의를 보이는데 그 이유는 협력이 성장동력을 확대하는 실질적 계기가 되기 때문이다. 강원도의 어떤 군은 축산협력을 북에 제안한 상태이고, 경기도의 어떤 시는 연계관광에 큰 기대를 걸고 있다. 반면 시민들, 특히 젊은세대는 통일 이야기만 나와도 짜증을 낸다. 그러니 남북관계 개선을 향한 담론은 통일 대신 경제 발전과 삶의 질 개선에 집중하여 그 토양을 다져야 할 것이다.
  둘째, 군사적 긴장 완화의 약속을 되살려야 한다. 올해 초 공개된 미국 군사력 평가기관의 보고서에 따르면 남은 세계 6위에 올랐고 북은 28위로 내려섰다. 국방비 지출 규모는 남은 8위를 기록했고 북은 59위에 그쳤다. 우리가 해외에서 구매하는 무기 종류를 보면, 이미 대형공격헬기 36대를 도입한데 이어 다시 같은 양을 도입하는데 북한은 이를 위협으로 인식할 수 있다. 북은 이미 우리 정부를 거듭 비난하고 있다. 남북 정상 간 약속 중 가장 실효성이 큰 부분은 군사적 긴장 완화였다. 작전권 이양 등의 배경이 있다고 해도 긴장을 완화할 수 있는 조치가 이루어져야 다음 단계의 개선을 기대할 수 있다.
  셋째, 남북관계 개선과 협력을 보장할 수 있는 법제가 구축되어야 한다. 남북관계의 법제도화는 국내 합의기반 구축, 남북 간 합의, 국제적 보장을 촉진한다. 문재인 정부는 남북관계의 법제도화를 국정과제의 하나로 제시하였으나 현재까지 별 진전이 없다. ‘남북교류협력에 관한 법률’은 다시 개정되어야 하고, ‘인도지원개발협력에 관한 특별법’도 속히 제정되어야 한다. 북민협이 만든 법안과 정부 법안이 발의된 상태이고 여러 국회의원들에게 그 필요성을 설명하고 있지만 여야의 대립 때문에 언제 입법될 지 요원하다. 남북 정상이 합의한 내용을 국회가 비준동의해야 한다고 호소하지만 이 또한 지나가는 일에 불과해 보인다. ‘남북기본합의서’를 기초로 남북관계의 모법(母法)을 제정하고, ‘통일국민협약’, ‘남북기본협정’, ‘평화협정’ 등을 법제화하려는 사회적 공론을 증진해야 한다.
  넷째, 민관이 남북협력을 분담하는 동시에 협업을 촉진하는 공진(co-evolution)체제를 만들어야야 한다. 예컨대 ‘한국국제협력단(KOICA)’에 상응하는 ‘남북협력개발단’ 같은 기구가 준정부 조직으로 설치되어 정부와 민간단체의 역할을 유기적으로 조율해야 한다. 그래야 정부가 모든 책임을 떠안는 부담에서 자유로워지고 시민사회의 지지와 잠재력을 폭넓게 결집할 수 있다. 신설 기구는 협력사업에 관련된 청년인턴 활동과 창업을 장려하고 진흥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
  다섯째로 남북협력의 방식에 창조력과 상상력을 증대해야 한다. 방북해야 하거나 북에 현장을 만들어야 하는 사업은 당분간 유보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 예컨대 4차 산업혁명으로 인한 과학기술의 변화를 남북협력의 새로운 계기로 활용할 수 있는 방식을 기획해야 할 것이다.
북은 과학기술의 발전, 특히 차세대 과학기술교육과 세계시장 진출에 큰 관심을 갖고 있으므로 온라인으로 협력하여 신상품을 개발하고 판매하는 사업을 구상하고 시도할 수 있다. 북이 계획하고 있는 원격진료에 제3국과 국제기구가 참여하는 공동 네트워크 구축도 생각해 볼 수 있다. 또한 남북이 협력할 수 있는 현장으로, 우선 남측에 ‘스타트업 인규베이팅 사업’으로 만들고 모범 사례(best practice)를 축적할 수 있다. 가시적 성과가 있으면 북이 호응할 확률이 높아진다.
다시 희망을 세우자
  마지막으로 시민사회는 미국과 중국 등의 국제사회와 북 당국 그리고 우리 시민들에게 평화와 협력의 필요성을 설명하는 일에 더 주력해야 한다. 예컨대 ‘대북전단 살포 금지법’이 해외에서 일부 곡해되면서 자칫 미국 정부와 의견 충돌을 초래할까 안타깝다. 이런 일을 국제사회에 균형 있게 설명하는 데 시민단체가 나서야 한다. 범시민단체들이 전 세계 1억 명 서명을 목표로 펼치는 ‘한반도 종전 평화 캠페인’에 더 힘을 모아야 한다. 북 당국에도 우리 시민사회의 평화와 협력 의지를 전달하는 일을 계속해야 한다.
2012년 10월 5일 대북협력민간단체협의회가 준비한 밀가루 500톤이 육로를 통해 북측에 전달됐다. ⓒ연합
  “역사는 무덤가에서 희망을 갖지 말라고 가르치네. 그러나 일생에 단 한 번 그토록 갈망하던 정의의 파도가 솟구친다면, 역사와 희망은 함께 노래할 수 있으리라”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작년 8월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대선 후보로 지명될 당시 수락 연설에서 인용한 시 구절이다. 이 시는 아일랜드 시인 셰이머스 히니(Seamus Heaney)의 희곡 ‘트로이의 치유(The Cure at Troy)’의 마지막 부분에 나온다. 아일랜드 이민 가족인 바이든 대통령이 모국 분단의 상처를 잘 알고 있으니 한반도의 분단을 치유하는 일에 열심이기를 기대한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우리 스스로가 해야 할 일을 해야 그 기대가 실현된다는 것! 한반도에 정의의 파도가 솟구치게 해야 한다. 그래서 신이 역사 속을 지나갈 때 희망을 움켜잡아야 한다. 우리 분단의 치유는 우리 스스로가 해야 한다. 다시 희망을 세운다.
이기범
대북협력민간단체협의회장,
어린이어깨동무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