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시대 Vol 1752021.05

평화읽기

콜롬비아 평화협정 체결
이후 5년



  지난 2016년 6월 콜롬비아 정부는 국내 최대 게릴라조직 콜롬비아혁명군(FARC)과 평화협정을 체결했다. 60여 년간 지속된 장기 내전의 종식이었다. 그동안 콜롬비아의 역대 정권들은 협상과 진압이라는 이중전략을 통한 대 게릴라정책을 전개했다. 그러나 정부를 신뢰하지 못한 게릴라의 테러는 더욱 격화되었다.

평화협정 체결 과정
  이러한 상황 아래 2002년, 평화협상 불가를 선언하고 마약퇴치 및 게릴라에 대한 강경책을 선택한 우리베(Alvaro Uribe) 대통령이 등장했다. 우리베 정권은 미국의 군사적 지원에 힘입어 강도 높은 게릴라 진압작전을 전개했다. 그 결과 2006년 114년 만의 정권 재창출이라는 새로운 역사의 주인공이 되었다. 그러나 FARC는 유엔 중재안을 거부한 채 정권교체를 주장하며 테러와 무력분쟁을 일삼았다.

  정부의 공격을 피해 국경으로 이동한 게릴라조직은 접경지역 주민들을 위협하여 콜롬비아의 내전이 인근 국가로 확대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또한 게릴라 소탕을 위해 정부에 의해 양산된 콜롬비아 연합 자위대(AUC)가 공권력의 이름으로 과거 게릴라 거점지역 농민에 대한 무차별 폭력을 자행함으로써 농촌지역 실향민이 급증했다. 이로 인해 대내외적인 비난에 휩싸인 우리베 정권은 AUC를 무장 해체했다. 그러나 이들은 신흥무장조직을 형성하여 마약 밀거래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우리베 정권의 국가안보정책은 실패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2010년 69%의 압도적인 지지로 산토스(Juan Manuel Santos)가 정권을 장악했다. 산토스 대통령은 집권 후 FARC, 제2의 게릴라조직 민족해방군(ELN)과 평화협상을 추진했다. 그는 우리베의 정치적 동반자이자 힘에 의한 게릴라 소탕전을 지휘해 온 전직 국방부 장관이었다. 그러나 집권과 동시에 전 정권과 거리를 유지하며 게릴라와의 평화협상에 주력했다. 우선 산토스 정부는 300만 명에 이르는 실향민 지원과 분쟁피해지역 복구를 위한 종합적인 국가발전계획을 수립했다. 이러한 노력에 힘입어 산토스는 2014년 재선에 성공한다.

  산토스 정부는 게릴라와의 대화를 위해 신뢰와 인내에 기반 한 접근을 시도했다. FARC와 친분이 있거나 대화가 가능한 인물을 중심으로 협상팀을 구성하여 게릴라와 심리적 거리를 좁혀 나아갔다. 그리고 FARC 대표단과 농촌 개발 및 토지개혁, 정치참여 보장, 분쟁 종식, 마약 생산 및 밀매 퇴치 그리고 희생자 보상을 중심으로 4년간 대화를 지속했다. 협상은 정부와 게릴라 측의 첨예한 입장 차이로 답보상태에 머물렀으나 2015년 9월 로마 교황의 중재로 양측은 결국 2016년 6월 23일 정전 합의에 서명했다. 산토스의 노력은 노벨평화상 수상이라는 영광을 안겨주었다. 2016년 11월 콜롬비아 정부는 내전 종식을 공식 선언했다.

콜롬비아의 주요 좌파 게릴라조직
  콜롬비아의 좌익 게릴라조직은 1940년대 중반 자유와 보수 양당의 갈등 격화로 등장했고, 1958년 쿠바혁명의 영향으로 조직을 확대하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기존 기득권층을 타파하고 사회주의 정권 수립을 목적으로 활동했으며 1970년대 중반부터 무력으로 정부를 위협했다. 그리고 1980년대부터 마약조직과 연계하여 활동자금을 지원받아 조직을 유지하고 있다. 납치, 요인암살과 같은 일상범죄는 물론 석유, 광산, 금과 같은 지하자원의 약탈 및 마약거래 등 지하경제를 장악하고 있다. 안데스산맥 중앙에 위치하여 국토의 70%가 산악지대인 콜롬비아의 지리적 조건은 게릴라 활동의 유리한 기반이 되었다.

  콜롬비아의 주요 게릴라조직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FARC는 1964년 반미주의를 표방하며 기존 정부와 기득권층을 타파하고 좌익정부 수립을 목적으로 형성되었다. 2002년 정부의 공격으로 마약거래의 주요 루트였던 아마존지역이 폐쇄되자 태평양지역으로 이동하여 활동하였다. 이 조직은 불법작물 생산과 유통을 통해 활동 자금을 확보하였으며 군자금과 대외 협상력을 높이기 위해 주요 도로와 공공건물을 파괴하였다. 또한 정부요인과 민간인에 대한 납치를 통해 막대한 금액의 몸값도 요구하였다.

  제2의 게릴라조직 ELN은 1965년 토레스(Camilo Torres) 신부를 중심으로 형성된 도시무장조직이다. 산업시설 국유화, 토지 몰수 및 농촌개혁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해외 독점자본에 대항한 학생 및 노동자의 무장투쟁을 주도하며 성장했다. FARC가 마약 밀매를 통해 자금을 조달한 반면 ELN은 석유산업, 해외 노동자 및 주요인물 납치를 통해 자금을 확보하였다. 마약 밀매에도 관여하고 베네수엘라 국경지역을 거점으로 활동하고 있다. 석유자원 해외 유출을 반대하며 석유송유관 폭발 및 도시하부구조 파괴와 같은 과격행동을 서슴지 않는다.

  이외에도 1967년 형성된 자유민중군(EPL)과 1973년 도시 지식인을 중심으로 결성된 M-19(4월 19일 운동) 등이 있다. M-19는 1989년 정부와 최초로 평화협정을 체결한 조직으로 이듬해 총선에서 사령관이었던 울프(Navarro Wolf)가 나리뇨(Narin)주지사에 당선되어 제도권 진입에 성공했다.

평화유지를 위한 콜롬비아 정부의 과제
  산토스 정부는 평화협정 이행을 위해 희생자 권리회복, 시민안전, 빈곤 감소를 위한 정책을 추진했다. 불법작물재배 농가에 대체작물을 보급하고, 금전적 지원책을 마련했으며 도로 확충 및 판매 전략 등에 대한 대책도 강구했다. 또한 대대적인 캠페인을 통해 무장조직의 사회복귀를 적극 지원하며 사회재통합을 위한 노력도 기울였다. 내전 피해지역 주민의 건강, 교육, 가족재회와 같은 일상 복귀 프로그램 및 농촌지역 하부구조 재건을 위한 투자를 확대하였다.

  그러나 평화협정 체결 이후 보수 정치인들은 협정에 대한 불신을 표명했다. 평화협정 반대 여론을 주도해 온 우리베 전 대통령은 2016년 11월 22일 언론을 통해 “FARC의 무기 반납이 결코 내전 종식을 의미하지 않으며 ‘관대한 정부의 희생’으로 성사된 협정은 또 다른 폭력의 시작”이라고 언급했다. 결국 2018년 우리베 진영의 지지로 두께(Ivan Duqie) 현 정부가 등장하였다. 신정부는 산토스 정부의 개혁정책 일부를 수정하였고 이를 계기로 평화협정을 주도한 사회인사 120여 명이 연속적으로 암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정부의 문제해결 능력에 대한 불신과 폭력 재생산에 대한 국민적 불안은 팽배해졌다. 결국 2019년 11월 공공교육 확대 및 노동자 연금 문제를 시작으로 평화협정 이행을 촉구하는 범국민 시위가 전개되었다.

  소극적 형태의 평화라도 유지하기 위한 콜롬비아 정부의 과제가 산적하다. 보호지, 미개발지 및 비생산적인 대농장 토지를 대상으로 진행되는 토지개혁은 농민과 원주민 중심의 새로운 사회갈등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또한 제2의 게릴라조직 ELN은 협상을 중단한 채 FARC에서 이탈한 인력을 충원하여 대화보다는 무력으로 자신들의 입지를 강화하고 있다. 동시에 지난 30여 년간 마약생산 및 밀매에 관여해 온 FARC 잔존세력은 무기반납 후 조직명을 개칭하여 활동을 국제화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최근 과거 FARC 세력과 멕시코 마약카르텔의 긴밀한 동맹활동이 표면화되고 있다. 콜롬비아의 평화협정은 또 다른 갈등을 유발하고 있다.


차경미 부산외국어대학교
중남미지역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