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는 지금
마다가스카르의 부시맨 닥터
이재훈 자문위원
태고의 신비를 간직한 섬 마다가스카르
길위의 부시맨 닥터
전 세계 124개국에서 3,600명의 자문위원이 활동하고 있다.
세계 각지에 거주하는 코리안의 삶과 평화통일 이야기를 자문위원의 시선으로 소개한다.
인터뷰 중인 이재훈 자문위원                                                                                       
15년간 115번, 오지행(行) 멈추지 않는 이유
  마다가스카르에 온 것은 운명이었다. 모든 것이 잘 갖춰진 풍요로운 삶 대신 험한 오지를 택한 이재훈 자문위원은 마다가스카르에 도착한 2005년부터 한 달에 한 번 의료장비를 차에 싣고 길게는 2~3일을 달려 오지로 향했다. 사람들은 그런 그를 ‘부시맨 닥터’, ‘길 위의 닥터’라고 불렀다. 오지로 가는 길은 험했다. 변변한 숙박시설이나 식당은 물론 전기와 수도조차 없는 곳이 태반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그들이 필요로 하기 때문에” 다시오지로 향했다.
  의료봉사의 공로를 인정받아 제1회 이태석상과 마다가스카르 대통령 기사장 훈장을 수여받은 그는 이제 현지인 의료인력 양성이라는 더 큰 목표를 향해 가고 있다.
이재훈 자문위원은 의료봉사 공로를 인정받아 마다가스카르 대통령 훈장을 받았다.
Q 마다가스카르는 어떤 곳인가?
  마다가스카르는 지구가 처음 생성됐을 때부터 존재했다고 합니다. 기원후 6세기까지는 무인도였는데 그 이후에 보루네오섬, 자바섬, 아프리카 본토에서 사람들이 들어온 걸로 알고 있어요. 금, 자수정 같은 광물과 공룡 화석, 규화목이 많고, 바오밥나무, 여우원숭이 등 마다가스카르에서만 자생하는 동식물이 많은 생태학적 보고입니다. 모론다바의 바오밥나무 군락지, 안다시베 국립공원, 세계 3대 옥색 해변으로 유명한 디에고 항구까지 볼거리도 많은 나라죠.
Q 마다가스카르와 한반도의 관계는?
  마다가스카르는 한때 사회주의국가였기 때문에 북한과 가까웠습니다. 마다가스카르의 대통령궁도 북한이 지어줬죠. 예전에는 고등학교에서 주체사상을 배웠기 때문에 한글에 친숙한 분들이 많아요. 이후 민주정부가 들어서면서 북한과의 관계는 멀어졌습니다.
  한국과는 2000년 들어 교류가 많아지면서 가까워지기 시작했고, <꽃보다 남자>, <파리의 연인> 같은 한국 드라마가 방영되면서 한류문화도 생겨났습니다. 한글을 배우는 사람도 많아져서 어떤 사람들은 제게 한국사람이냐고 물어보면서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를 하기도 합니다. 예전에 한국 대사관에서 주최한 K-POP 행사에 갔더니 현지인들이 저도 모르는 최신 한국 노래를 따라부르고 춤도 추더군요.
Q 마다가스카르의 의료 상황은?
  처음 마다가스카르에 왔을 때 실태파악을 위해 의료시설을 둘러봤는데 전 지역이 매우 열악했습니다. 의사도 없고 약국도 없고 심지어 간호사 한 명 없는 곳도 많았어요. 환자들은 큰 병원 갈 돈도 없고 의료에 대한 정보도 없으니 가벼운 질환을 평생 달고 사는 거죠. 가장 좋은
대학인 국립 안타나나리보대학도 우리나라의 60년대 말 정도의 수준이고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오지는 우리나라 삼국시대 정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오지로 향하는 이동진료 트럭
Q 의료 봉사활동을 하면서 가장 어려운 점은?
  우선 교통인프라가 없으니 이동하는 게 가장 힘들어요. 숙소나 식당도 변변치 않고요. 처음에는 물을 구할 수가 없어서 필터로 강물을 걸러서 마시고 환자를 소독했습니다. 전기가 없어서 촛불을 켜놓고 수술할 때도 있었죠. 저희가 가면 수일을 걸어온 환자들이 며칠씩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쉴 수도 없어요. 그럼에도 그들이 필요로 하기 때문에 계속해서 갈 수밖에 없죠. 오지에서 가장 시급하다고 느끼는 게 수혈과 수액 문제입니다. 오랫동안 앓은 환자는 영양 상태가 안 좋아서 수술할 때 굉장히 위험하거든요. 수혈과 수액 공급만 원활하다면 조금 더 안심하고 치료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Q 기억에 남는 환자가 있는지?
  아직도 눈에 선한 환자들이 많아요. 처음 온 환자 중 한 명은 출산 후 복막염으로 배에 고름이 꽉 차 있었어요. 혈압이 낮아서 마취도 못하고, 생리식염수가 없으니 물을 끓여서 배에 구멍을 뚫고 씻어냈죠. 어떤 환자는 방광이 선천적으로 두 개였는데 한쪽 방광이 막혀서 배만 임신한 것처럼 나와 있는 분도 있었고, 남편이 기름을 몸에 끼얹어서 전신 화상을 입고 팔이 오그라든 환자, 20년 동안 눈 위에 혹을 달고 있다가 수술을 통해 시력을 되찾은 환자도 있었습니다. 출산 중 자궁파열로 쇼크에 빠진 환자도 기억나요. 우마차에 실려 먼 길을 왔는데 마취할 시간도 없이 아이를 빼내고 보니 숨을 안 쉬고 있었어요. 심폐소생술을 하니 간신히 아이가 살아났고, 산모도 바로 수술을 해서 결국은 해피엔딩으로 끝났죠.
이재훈 자문위원은 길 위의 닥터, 부시맨 닥터로 불린다.
Q 앞으로의 계획은?
  그동안 오지를 다니면서 저와 같은 의료진이 300명만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여기는 2~3시간 정도의 간단한 수술이면 평생 앓던 질병에서 해방될 수 있는 분들이 많아요. 현재 대학병원에 지역사회를 위한 통합의 과정을 개설하기 위해 관련단체, 의과대학, 당국과 협의 중입니다.
  제가 처음 아프리카에 오면서 다짐한 것이 평생 의료봉사를 하며 살아가겠다는 것과 통일이 되면 북한에 가서 의료활동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언젠가 북한의 문이 열린다면 북한에서 봉사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