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시대 Vol 1752021.05

평화사랑채

탈북 여성의 얼굴



  꼭 다문 입술에 서늘한 눈매의 여주인공 진아의 얼굴이 화면을 가득 채운다. 표정 잃은 진아는 복싱을 만나면서 점차 얼굴 가득 감정을 표현하게 된다. 항상 강한 모습으로 살아남아야 했던 탈북여성 진아가 울음을 터트리는 순간은 그녀가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마담 B>(2018)와 <뷰티플 데이즈>(2018)에 이은 윤재호 감독의 신작 <파이터>(2021)는 탈북 여성 진아의 성장기를 담고 있다.

<파이터> 윤재호 | 2021 | 104min                                          

주체적 삶을 살아가는 소수자 여성의 성장기
  영화 <파이터>는 젊은 탈북 여성 진아가 한국에 정착한 이후 외롭고 힘겨운 삶을 살아가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녀의 유일한 가족인 아버지는 중국에 불법체류 중이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것도 벅찬 진아에게 중요한 것은 돈이다. 아버지의 한국 입국을 위해서는 브로커에게 건네줄 돈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식당에서 일하는 것으로는 턱없이 부족해 복싱 체육관에서 청소를 하면서 비용을 마련한다. 지친 그녀는 한국에 먼저 와 정착한 어머니를 찾아가 보지만 이미 가족을 꾸린 어머니 곁에 자신의 자리를 찾기란 어렵다. 마음속 깊은 곳의 울분을 풀어낼 곳이 없었던 그녀에게 여성 복서들이 눈에 들어오고, 복싱에 왠지 모를 끌림을 느끼게 된다. 그런 마음을 눈치챈 체육관의 트레이너 태호와 관장은 복싱을 권유하고, 운동을 하면서 점차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를 갖는다. 영화는 진아가 진통 끝에 어머니를 용서하고 새로운 시작을 할 용기를 얻게 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소수자 여성의 성장 스토리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영화 <파이터>는 전형적인 서사 구조를 담고 있다. 곳곳에 배치되어 있는 가족이나 로맨스 코드도 기존의 영화적 문법에 충실하다. 게다가 복싱이라는 스포츠를 매개물로 했다는 것도 그렇다.

  가난하고 소외된 주인공이 자신의 ‘몸’ 하나만으로 드라마를 만들어내는 스포츠로 복싱만한 것이 없을 터. 부조리한 현실 속에서 매일 ‘싸워야만 하는’ 이들이 링 위에서의 대결에 빠져드는 것은 그나마 게임의 룰이 작동하는 공정한 세계이기 때문이다. 체육관 청소부 진아가 자신을 무시하는 남한 여성 복서와 대결을 할 수 있는 곳은 현실이 아닌 2평 남짓한 사각 링이 유일하다. 이런 맥락에서 진아가 낮은 목소리로 읊조리는 “나의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라는 말은 이제 현실에서의 진짜 싸움을 시작하겠다는 의지이기도 하다.

<마담 B> 윤재호 | 2018 | 71min                                         

  윤재호 감독의 영화에 등장한 탈북 여성은 희생자에 머물지 않는다. 탈북 여성 대부분이 경험하는 이주 과정에서의 엄청난 폭력과 한국에서의 정착의 어려움 등은 영화의 배경에 머물 뿐 주인공을 제약하는 조건으로 형상화되지 않는다. 다큐멘터리 <마담 B>의 탈북 여성은 중국인 남편과 시부모를 주도하며 사는 주체적인 여성이며, 자신의 의지로 중국과 동남아를 가로지르는 기나긴 길을 떠나 한국으로 이주한다. 북에 남겨둔 아들을 한국으로 데려오지만 그렇다고 전형적인 어머니로 회귀하지도 않는다. 자신의 욕망을 드러내는 것을 망설이지 않으며, 남편이나 아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지도 않는다. 이후 <마담 B>의 탈북 여성은 <뷰티풀 데이즈>의 탈북 여성 ‘그녀’로 재탄생한다. 이번에는 아들과 어머니라는 관계로 무게중심이 이동되어 아들을 버리고 떠나올 수밖에 없었던 기구한 삶을 다룬다. 영화 속 탈북 여성 ‘그녀’가 사실은 아들을 버린 것이 아니라, ‘지키기 위해서’ 떠났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측면에서 <마담 B>의 전복적 여성은 가족을 위해 희생하는 전통적 ‘어머니’로 회귀한다. ‘그녀’를 연기했던 배우 이나영의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운 얼굴’이 오히려 탈북 여성의 강인함을 느끼는 것을 방해하는 점도 아쉽다. 그럼에도 <뷰티풀 데이즈>는 분단을 배태한 ‘가족’을 문제시했다는 점, 탈북 여성 ‘그녀’와 아들 ‘젠첸’이 과거에 머물지 않고 새로운 미래를 꿈꾼다는 측면에서 희망적인 메시지를 담은 영화가 분명하다.

<뷰티풀 데이즈> 윤재호 | 2018 | 104min                                         

탈북 여성을 통해 확인하는 가족의 본질
  어쩌면 <파이터>의 진아는 <마담 B>의 탈북 여성과 <뷰티플 데이즈> ‘그녀’의 중간 정도에 위치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마담 B>의 주인공이 너무나도 현실적이어서 비현실적이었다면, <뷰티풀 데이즈>의 ‘그녀’는 우리가 기대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너무도 빼닮아 익숙하면서도 어색한 측면이 존재했다. 반면 <파이터>의 진아는 배우 임성미의 빈 도화지와 같은 얼굴로 재현됨으로써 익숙함과 불편함, 현실과 비현실의 중간 정도를 정확하게 짚어낸다. 탈북 여성의 삶도 그러할 것이다. 주체적이라고 단정하기에는 모호하게 남겨져 있는 망설임이 있으며 동시에 가족에 헌신하는 전통적 여성에 머물지 않는 주체적 힘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가 그러한 것처럼 그녀들도 자신의 욕망과 사회의 기대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다.

  윤재호 감독은 ‘분단 그리고 경계선 위에 서 있는 사람들’이라는 프로젝트 다큐멘터리 작업을 해오다가 2012년 칸 국제영화제 레지던시 프로그램을 통해서 3부작 가족 시리즈를 기획했다. <뷰티풀 데이즈>가 분단과 민족 경계 위의 아들과 어머니의 이야기였다면, <파이터>는 딸과 어머니 사이의 갈등과 용서, 그리고 사랑을 그린다. 지난 수년간 감독이 천착했던 ‘가족’의 끈질긴 생명력을 ‘탈북 여성’을 통해서 보여줬다는 것은 분단, 국가, 이주 등의 파고에도 결국 살아남아 우리 모두를 구원하는 것은 가족이라 말하기 위함이다. 모든 것이 혼란스러운 이 시기에 다시 ‘가족’을 이야기하는 것이 얼마나 커다란 공명을 만들어낼지 자신하기는 어렵지만 사라져 버린 것에 대한 향수가 만들어내는 힘을 무시하기란 쉽지 않다. 영화는 ‘환상의 세계’라고 하지 않았던가. 현실에서 감각하기 어려운 사랑, 용서, 화해 같은 감정을 느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영화가 ‘해야만 하는 일’을 충분히 해낸 것이 아닐까.


김성경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