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시대 Vol 1752021.05

봄 기운이 완연한 대성동 가는 길. ⓒ필자제공

우리고장 평화의 길

대성동마을의 봄

큰 태극기 아래 작은 마을



다시 봄
  희붐한 신새벽 동살에 밖으로 나갔다. 간밤 자두꽃이 마저 지고 복숭아꽃이 활짝 피었다. 풀도 어느새 제법 자랐다. 오늘 우리를 포함한 예닐곱 집이 파종하고 또 그 정도의 집이 파종한 모판으로 못자리를 한다. 남편과 아주버니는 어제부터 부산스러웠다. 기계를 설치하고 모판을 옮겨다 놓고 상토(흙)도 일하는 동선에 맞춰 놓았다. 아침에는 하우스에서 알맞게 눈이 튼 볍씨를 가져다 놓았다. 8시가 가까워지자 3~40대의 차가 에스코트를 받으며 동네에 들어섰다.

  농사가 생업인 동네, 주민 대부분이 고령이다. 어지간한 농사일은 기계로 한다지만 못자리 일만큼은 일손이 많이 필요하다. 두레가 있으나 칠십여 년간 인구 유입이 없는 동네에 일손 부족은 당연했다. 간혹 호기심에 넘성대는 사람들이 있었으나 신원 조회와 북한 기정동이 보인다고 하면 돌아섰다. 그러다 보니 못자리 철엔 집집마다 지인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고 오늘처럼 못자리하는 이즈음엔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선 차들이 차창마다 파란 깃발을 파닥거리며 마치 의전을 받듯 동네에 들어온다.

  땅은 알까. 이 동네에서 해마다 봄을 심는 촌부의 마음을 ….
  한나절 일을 마친 사람들이 이구동성 한소리로 외쳤다.
  “박 서방네 풍년 들고 내년 봄에 다시 보세.”

대한민국에서 제일 큰 대성동마을 태극기 ⓒ파주시청

13-5
  “참, 독특한 동네야. 어떻게 그런 데서 살아?”   사람들은 내게 그렇게 물었다. 나는 그냥 웃는다. 나는 스물아홉 봄이 막 시작될 무렵 대성동에 사는 남자와 결혼하면서 이곳 주민이 되었다. 비무장지대(DMZ) 유엔사 공동경비구역(JSA) 내에 있는 유일한 마을, 휴전선 철책으로부터 500미터 되는 곳, 일반인 출입통제 지역으로 ‘육지 속의 섬’이란 수식어가 붙는 그곳에 50여 가구 200여 명이 사는 마을에서 나는 스물여섯 번째 봄을 맞았다.

  신혼살림이 들어가는 날 말로만 듣던 자유의 다리로 임진강을 건너 동네에 첫발을 디뎠다. 다리 검문소 앞에서 그가 그렇게도 잊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던 신분증을 군인에게 건네주었다.
  “여기 다리가 좀 많이 덜컹거려요. 경의선 철로 그대로라 비포장도로 같아요.”

  차가 정말 심하게 덜컹거렸다. 좁다란 다리 밑으로 흐르는 강물이 따라서 요동쳤다. 강을 건널 수 있는 다리는 이곳뿐이라고 했는데 다리 양쪽을 헌병이 지키고 있었다. 83미터가 830미터 만큼이나 길었다.
  한적한 시골길 곳곳에 군부대가 보였고 차는 JSA 앞에서 멈췄다. 나는 임시 방문증을 받았다. 그가 차창에 파란색 깃발을 꽂았는데 민간 차량이라는 표시라고 했다. 규정 속도 40킬로미터, 군사시설로 일체의 사진 촬영을 금지한다는 경고문, 지그재그로 늘어놓은 바리케이드, 몇 번씩 거치는 검문소. 그때마다 내미는 그의 빨간색 신분증. 집으로 가는 모든 일이 낯설었다.
  “이제 거의 끝났어요. 동네에 들어가 입촌 신고만 하면 돼요.”
  “아 … 매일 이렇게 다녀요?”
  “그렇죠….”
  그는 별일 아닌 듯 말했다. 가슴이 답답했다. 논에는 작년 추수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었고 야트막한 산에는 막 연둣빛이 돌기 시작했다. 산꼭대기마다 군부대가 있는 풍경이 특이했고 그 너머로 커다란 태극기가 우뚝 솟아 펄럭였다.
  “저 태극기가 우리나라에서 제일 클 거예요.”

  그가 태극기를 가리키며 말하고는 왼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숲길을 지나 마을이 나타났다. 그는 바로 집으로 가지 않고 마을이 한눈에 보이는 곳에 차를 세우고 군인과 함께 내렸다. 바로 옆에 교회가 보였고 금방 지나온 길 오른편에 초등학교가 아담하니 있었다. 전원주택단지처럼 줄을 맞춰 앉은 집들은 건너편 마을을 향했다. 건너편 마을도 이쪽을 향했고 두 마을은 서로 마주 보았다. 높이와 크기가 비슷한 태극기와 인공기도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 판문점은 나무에 가려 귀퉁이만 조금 보였다.
  며칠 후 내게는 13-5라는 새로운 번호가 붙었다.
개성 송악산이 보이는 대성동마을 ⓒ파주시청

13-1
  이 봄, 당신은 여든아홉 번째 봄을 맞았다. 대성동은 예순일곱 번째 봄이다.
  그가 열여덟 되던 해 모내기가 끝난 여름, 이른 새벽 송악산에서 총성이 들렸다. 전쟁의 시작이었다. 마을은 몇 번이나 주인이 바뀌다가 국군과 연합군이 자리를 잡았고 당신은 연합군 정보기관 보초를 서다가 중공군의 습격으로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했다. 그러고도 수많은 죽음의 문턱에서 간신히 살아남았다. 1953년 7월 정전협정 당시 ‘남북 비무장지대에 각각 한 곳씩 마을을 둔다’는 규정에 따라, 같은 해 8월 북한에는 평화의 마을 기정동이, 남한에는 자유의 마을 대성동이 생겨났다. 휴전 당시 마을에 주소지를 둔 사람만 한시적 신청을 받아 주민권을 주었다.

  그는 고향을 떠나지 않아도 되었다. 이후 유엔사 관할 대성동 주민에게 주어진 13-1이 되어 살았다. 수십 개의 스피커가 밤낮을 가리지 않고 떠들어대도 듣지 않았고, 어떤 싸움에도 끼어들지 않았다. 아무리 바빠도, 아무리 고단해도 봄가을 비상철수 훈련에는 빠지지 않았다. 매일 저녁 하는 주민현황 파악과 영농작업 신고도 건성으로 한 적이 없었고 외출할 때는 빨간색 주민증(대성동 주민에게 발급되는 주민증)을 먼저 챙겼다. 그러는 사이 JSA 경비대대가 유엔군에서 한국군으로 바뀌었다.

  몇 년 전 동네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북한의 목함지뢰 도발 사건이 일어나고 며칠 후 연천에서 폭격 사건이 발생했다. 판문점 남북고위급 회담이 이루어지는 동안 주민들은 외부 출입과 영농활동이 전면 금지되었다. 아이들과 몸이 불편한 어른들은 외부로 나가 있기를 권할 정도로 심각했다. ‘저들’과의 관계로 비상대기한 적은 셀 수 없이 많았다. 그러나 결코 마을을 떠나는 일은 없다며 그는 굳건히 집을 지켰다. 드디어 43시간의 마라톤회담 끝에 반쪽짜리 자유가 다시 찾아왔고 가을걷이를 하는 발걸음은 어느 해보다도 가벼웠다.

봄이 찾아온 대성동은 볍씨 파종에 한창이다. ⓒ필자 제공

  2018년 4월 대통령이 판문점으로 향할 때에도 통일대교부터 판문점 안으로 들어가는 그 길은 생중계하지 못했다. 촬영이 금지된 그 짧고도 긴 10여 분의 시간. 연로한 그도 주민들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며 대통령을 환영했다. 이곳에서도 봄 같은 봄을 맞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어린 시절 다녔던 개성 길을 다시 갈 수 있을지 모른다는 희망을 품고서.

  2020년 6월 16일 오후 2시 49분. 쾅 콰광. 공기를 찢는 엄청난 굉음이었다. 방에 앉아 있던 몸이 흔들렸다. 기겁해 밖으로 나가니 검은 연기가 하늘로 솟구쳤다. 개성공단 방향이었다. 아, 뭔 일이 생겼구나. 얼른 고개를 틀어 태극기를 쳐다보고는 오토바이에 올라앉았다. 회관 마당에 도착하니 그새 오토바이와 차들이 꽤 있었다. 사람들은 헐레벌떡 뛰었다. 위험을 느낀 아이가 엄마 품으로 파고드는 것처럼. 수십 년간 훈련된 본능이었다. 잠시 후 이장이 말했다. 개성공단 내 남북공동연락사무소가 폭파되었다고. 설마 했는데 그 설마가…. 그는 오토바이를 타고 갔던 길을 되돌아왔다. 하늘이 뿌옇다. 후덥지근한 바람이 매캐했다. 마당에 들어서 오토바이를 세우는데 자꾸 헛발을 디뎠다. 겨우 세우고 문지방을 넘어 소파에 주저앉았다. 창 너머 뉘엿뉘엿 해가 지고 있었다. 그날, 13-1의 꿈은 산산조각이 났다.
  그리고 일 년, 다시 봄이다.



김영란 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