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통일』 Vol 1802021.10

9월 21일(현지시각) 문재인 대통령이 제76차 유엔총회에서 기조연설을 하고 있다. ⓒ연합

특집


남북 유엔 가입 30년,
대북정책과 한반도 평화 정착



남북 합의 역사를 살펴보고, 평양선언과 군사합의 3주년을 맞아 성과와 한계를 진단한다.
남북의 변화상을 살펴보며 한반도 평화의 제도화를 위한 과제를 살펴본다.

  지난 9월 17일로 남북한은 유엔 동시 가입 30주년을 맞았다. 동서독은 유엔 동시 가입 후 17년 만인 1990년에 평화통일을 달성했는데, 남북한은 통일은커녕 평화 정착도 지연되고 있다. 몇 차례 남북 정상회담의 결과로 6·15 남북공동선언, 10·4 남북공동선언, 4·27 판문점 선언, 9·19 평양공동선언과 남북군사합의서 등 최고위급의 남북 합의가 있었지만, 북핵 문제로 인한 남북관계 정체와 남북한의 안보 딜레마 해소를 위한 국방 강화 노력이 불신을 증폭시켜 한반도 평화는 제대로 정착되지 못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지난 30년의 한반도 정세 변화를 돌아보고 독일의 사례를 교훈 삼아 한반도 평화를 정착시키며 평화통일로 나아갈 수 있는 대북전략을 제시해 본다.

국제정치 압도 상황에서 일관되지 못했던 대북정책
  1988년 노태우 정부는 7·7 선언으로 남북 평화공존의 획기적인 지평을 열었다. 이후 동유럽 공산정권 붕괴와 소 연방 해체 과정에서 한반도비핵화선언, 남북기본합의서 체결, 유엔 동시 가입을 연속적으로 주도했다. 물론 한반도비핵화선언은 소련의 핵 군축 유도를 위한 부시 대통령의 한반도 등 해외 전술핵 철수 결정이라는 외부 변수에 상당한 영향을 받았다. 북한의 핵 개발 의혹이 불거지는 상황에서도 노태우 정부는 남북 평화공존의 기반을 다졌지만, 1992년 한미 팀스피릿 연합훈련 재개 결정은 1차 북핵 위기로 이어졌다.

  1993년 2월 집권한 김영삼 대통령은 남북관계를 개선하고자 “민족이 동맹보다 우선한다”는 취임사에 이어 비전향 장기수 이인모 씨를 북송했다. 그러나 팀스피릿 재개 직후 북한이 NPT(핵확산금지조약) 탈퇴를 선언하고 핵 개발 의지를 보이자 대북 강경기조로 급선회했다. 미국의 대북 공습 검토로 한반도에 전운이 감도는 가운데, 카터 전 대통령은 평양을 방문해 사태를 수습했다. 김일성의 남북 정상회담 개최 의사로 정세는 일거에 평화로 전환되었지만 김일성이 급사하며 기대가 꺾였다. 1994년 10월 북·미 제네바 합의로 북핵은 동결되었지만, 미 의회를 장악한 공화당의 대북 불신과 북한의 불성실, 김영삼 정부의 대북 강경기조로 한반도 정세는 교착되었다.

  김대중 대통령은 대북 화해·협력 기조에 따라 미국을 설득해 페리 프로세스*를 성공시켜 2000년 6월 평양에서 김정일 위원장과 6·15 공동선언에 합의했다.
* 페리 프로세스(Perry Process) 북한의 대량 살상 무기 개발·배치 종식의 대가로 경제 원조·관계 정상화를 실현한다는 미국의 대북한 정책안

  남북 간에 이산가족 상봉 진행, 금강산 관광 개시, 개성공단 사업 착수 등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그러나 미국 부시 행정부가 제네바 합의와 달리 북한에 특별사찰과 조건 없는 북한군 후방 이동을 요구하고, 9·11 테러 여파로 반 테러전을 개시한 가운데 2002년 10월 존 켈리 특사가 평양을 방문해 북한의 우라늄 농축 방식 핵 개발 의혹을 제기하자 2차 북핵 위기가 전개되었다.

  이후 참여정부가 한반도와 동북아 평화·번영을 향한 전방위 외교를 펼치며 2005년 6자회담에서 북핵 해결을 위한 9·19 공동성명을 도출했지만, 북·미 불신과 실랑이로 결국 1년 뒤 북한은 1차 핵 실험을 강행했다. 그럼에도 노무현 대통령은 총력외교로 2006년 6자회담에서 9·19 공동성명 이행을 위한 2·13 합의와 10·3 합의를 주도했고, 평양 방문 시 한반도 평화와 다양한 호혜적인 경협을 추진하는 10·4 남북공동선언을 도출했다.

  이명박 정부는 ‘상생과 공영의 대북정책’을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비핵·개방·3000’을 대북정책 기조로 삼았다. 북한의 선 비핵화와 문호 개방 시 북한 1인당 소득을 5배 정도 늘려주겠다는 구상이었다. 비핵·개방은 일방적이어서 북한이 받기 어렵고 3000은 자존심을 무시하는 것이어서 실현가능성이 적었다. 예상대로 남북관계는 파행되었다. 영변 핵 불능화가 미완료되고 비핵화가 시작되지 않는 상황에서 미국이 엄격한 사찰과 검증을 요구하면서 2008년 12월 6자회담이 결렬되었다. 더구나 남북관계는 2010년 천안함 사건과 연평도 포격으로 정면 대결 국면으로 악화되었다.

  박근혜 정부는 북한의 안보 딜레마 상황을 간과하고 남북신뢰를 강조하면서 ‘통일준비위원회’를 출범시켰다. 하지만 흡수통일을 우려한 북한은 이에 반발했고 2015년 목함지뢰 사건으로 남북 대결 상황이 이어졌다. 이후 한국 정부가 중국과 미국을 오가며 외교적 노력을 펼치다 대미 일변도로 갔다고 판단한 북한은 2016년 1월과 9월 핵 실험을 감행했다.


문재인 정부의 평화정착 노력과 남은 과제
  어려운 외교상황에서 집권한 문재인 대통령은 다시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대북 평화·협력 기조를 되살리고 한미동맹의 신뢰를 강화했다. 이어 북·미 정면 대립 국면에서도 남북 평화·협력을 주창하고 북한을 평창 동계올림픽에 초청하며 한미연합훈련 연기로 북한의 체면과 실리를 살려줬다. 결국 김정은 위원장의 올림픽 참가 결정을 얻어내 2018년 평창올림픽을 성공시켰다. 이어 판문점 남북 정상회담에서 남북 평화의 기반을 다진 뒤 6·12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을 주선해 성사시켰다. 또한 북·미 정상 합의가 진척되지 않자 평양을 방문해 남북군사합의서를 체결하고 접경지역에서의 우발적 충돌 방지 등 전쟁 위험을 축소시켰다. 평양 정상선언을 통해 미국의 적절한 상응조치와 북한의 장거리미사일실험장 해체 및 영변 핵 시설 영구 폐기를 교환하는 합의를 도출해 북·미 협상의 돌파구도 마련했다.

2019년 7월 1일 조선중앙TV가 방영한 판문점 회동 보도 기록영화. 문재인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회담을 마치고 군사분계선(MDL) 북측으로 간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손을 흔들며 인사하고 있다. ⓒ연합/조선중앙TV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은 2019년 2월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에서 추가적인 북한의 양보를 고집해 회담은 합의 없이 끝났다. 그럼에도 문재인 대통령의 제안으로 6월 말 판문점에서 남·북·미 3자 정상회동이 성사되기도 했다. 북한은 핵 실험장을 폭파하고 미국인 억류자와 미군 병사 유해를 송환하며 장거리미사일 실험장 해체를 진전시키고 핵과 장거리미사일 실험을 유예시키는 조치를 했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의 비용 부담 과다를 이유로 한미연합훈련을 축소시킨 것 외에는 합의 이행에 성의를 보이지 않았다. 김정은 위원장은 미국의 대북 적대시 정책 철회, 즉 한미연합훈련 중단이나 대북제재 완화 등 미국의 성의 있는 행동이 없을 경우 미국과의 대화에 응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고수해 왔다. 그러자 트럼프 행정부는 남북 합의 이행을 위한 한국 정부의 대북정책에도 제동을 걸었다.

  문제는 바이든 행정부가 출범한 뒤에도 미국이 조건 없는 북·미대화 재개를 주장하는 반면 북한은 대화의 조건으로 미국의 대북 적대시정책 철회를 요구해 북·미대화 재개가 난망하다는 것이다. 한미가 합의하여 인도주의 지원을 제안해도 북한이 응하지 않고 있는 것도 풀어야 할 과제이다.

1991년 9월 17일 유엔 안보리에서 남북한 유엔 가입이 확정된 뒤 노창희 대사(오른쪽)가 북한 대표부 박길연대 사에게 축하한다며 손을 내밀어 악수하고 있다. ⓒ연합
일관성 있는 대북정책 추진과 초당적인 대미 외교
  한국과 통일을 달성한 서독의 가장 큰 차이는 우리는 정권에 따라 대북정책이 급변했지만, 서독에서는 브란트의 동방정책이 같은 당 슈미트 정부에 이어 보수 야당 기민당의 콜 정부도 대동독 화해·협력 기조로 유지되었다는 것이다 . 또한 김대중 · 노무현 정부의 대북 협력 사업을 보수 야당이 ‘퍼주기’로 매도했지만, 서독은 김-노 정부 평균 지출액의 2배 이상을 1970년 이후 20년간 매년 지속적으로 동독과의 협력사업에 지출해 왔음에도 야당의 반발은 미미했다는 점이다. 더구나 서독의 1인당 소득이 동독의 3배 정도였던 반면, 현재 남한 1인당 소득은 북한의 26배에 달하는데 우리의 대북 협력 사업은 저항을 받고 있다. 물론 독일과 달리 우리는 6·25전쟁을 겪어 북한 정권에 대한 적개심이 서독보다 훨씬 더 크다. 그러나 어려움에 처한 북한 주민을 조금이라도 돕고 우리가 평화롭게 사는 것을 보장하는 동시에 분단과 통일비용을 최소화하면서 평화통일로 나아가려면 이념적 갈등을 앞세우는 것은 지양해야 할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내년 대선 이후에도 대북 화해·협력 기조는 계속 이어지는 것이 바람직하다.

  주변국들은 제1차 및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독일의 재통일을 반대했지만, 독일이 19세기 통일 시 3번의 전필요 쟁을 극복했다는 점도 중요하다. 우리는 어느 나라도 괴롭히지 않았고 강대국 권력정치의 피해로 분단되었으 나, 주변 4강 어느 나라도 통일에 선뜻 동의하지 않으므로 어느 한 나라도 반대하지 않도록 해야 통일을 달성할 수 있다.

  더구나 현재 북핵 문제 해결도 미국이 동북아에서의 영향력 유지나 중국 견제 등 전략적인 이득보다 북핵 해결이 더 중요하다고 인식하지 않으면 달성되기 어렵다. 지난 30 년의 경험은 한국의 대북정책이 아무리 상생·협력을 지향해도 미국이 함께 움직이지 않으면 평화는 얻기 어렵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런 맥락에서 한반도 평화를 정착시키고 평화통일로 나아가려면, 정부는 미국 설득에 외교력을 최대한 발휘해야 한다. 야당도 대북 상생·협력 정책에 동참하여 초당적인 전방위 외교 를 시행해야 한다. 국민들의 뜨거운 지지와 성원도 필요하다.

홍현익 국립외교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