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통일』 Vol 1802021.10

베를린 장벽

우리고장 평화의 길

한반도의 중심, 역사의 도시 대전
새롭게 꿈꾸는 뉴노멀 시대의 평화를 걷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해 우리의 삶도 빠르게 변하고 있다. 기존과 달리 탈 정형화한, 이른바 ‘뉴노멀’ 시대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글로벌 컨설팅 업체 알릭스파트너스(AlixPartners)는 최근 발간한 ‘디스럽션 인사이트’ 보고서에서 ‘단 7개월 만에 일어난 7년 치의 변화’라는 부제와 함께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주목해야 할 뉴노멀 트렌드를 제시했다. 그중 가장 눈여겨본 키워드는 ‘탈세계화의 가속화’와 ‘효율성보다 회복 탄력성’이다. 탈세계화와 회복. 이 두 가지 키워드만 보아도 길어지는 언택트 시대에 질린 사람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품는 소망이 어떤 것인지 짐작이 간다. 우리는 과연 언제쯤 평화로운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대전 지명의 유래
  한반도의 중심인 대전은 선사시대부터 이어져 온 역사적인 도시다. 또 대전(大田)은 우리말인 한밭이 한자화된 이름으로 본래는 ‘한밭’이라 부르던 이름이 조선 초기에 이르러 한자인 대전(大田)으로 쓰이게 된 것이다. 한밭의 한은 크다는 뜻으로 대(大)로 번역하고, 밭은 한자로 전(田)을 사용하여 대전(大田)이 되었다. 따라서 한밭은 큰 밭, 즉 넓은 들판이라는 뜻이다.

  대전(大田)이란 이름은 『동국여지승람』을 통해 국내 문헌에 처음 나타났다. 공주의 자연을 설명하는 내용 중에 ‘대전천은 유성 동쪽 25리 지점에 있다’라는 설명이 나오는데 이러한 기록으로 보아 대전이란 이름은 500여년 전 조선 초기에도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런 대전(大田)이란 이름은 일제강점기 군·면을 합치면서 대전리가 대전면으로, 1995년 대전광역시로 발전하였다.

애국주의자들의 땅, 민주화운동의 성지 대전
  대전은 잘 알려지지 않은 민주화운동의 성지이기도 하다. 1970년 4·19 민주화 운동의 도화선이 되었던 대전의 ‘3·8 민주의거’가 1960년 당시 정부의 독재와 부정부패에 대항하여 일어난 최초의 학생운동이기 때문이다. 이는 한국 민주화 운동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건이다.

  조선 후기의 정치와 사상을 주도한 기호학파의 유학자인 삼송을 비롯하여 학문과 덕망이 높은 산림들이 많았던 호서사림의 사상은 조선 말기 위정척사운동의 연원을 이루었으며, 근대에는 많은 애국지사를 배출하였다. 주자학적인 학풍이 강했던 대전은 서양 문물에 대해 개화의 물결보다는 척사운동이 강했던 지역이다. 유교적이고 애국적이며 기품까지 있는, 한국의 정신적인 유산을 간직한 대전에서 언젠가 한반도가 하나되어 ‘손잡고 함께’ 걷게 될 날, 걸어갈 대전의 평화 길을 그려본다.

대전근현대사 전시관 입구

자랑스러운 평화, 대전근현대사 전시관
  함께 걷고 싶은 대전 평화의 길 첫걸음은 대전근현대사 전시관이다. 평소 무심코 지나치던 곳에서 평화와 통일의 가치를 재발견할 수 있다. 대전근현대사 전시관은 옛 충청남도청사(등록문화재 제18호)에 위치하고 있다. 옛 충청남도청사는 대전의 근대건축물 중 가장 대표적인 건물로 1932년에 건립됐다. 당시 모더니즘 양식을 고스란히 반영해 원형보존이 잘 되어 있어 건축학적 가치가 높은 곳이기도 하다. 때문에 각종 영화와 드라마의 배경지로 쓰이고 있다.

  충남도청사 본관(등록문화재 18호) 1층에 자리한 대전 근현대사 전시관은 20세기 초부터 최근까지 약 100년간의 대전 역사와 발전상, 원도심의 다양한 모습들을 전시하고 있다.

자랑스러운 평화 - 대전근현대사 전시관

  1905년 경부선 철도 부설을 계기로 일본식 서양 문물이 급격한 속도로 유입되며, 대전은 근대적 의미의 도시로 탈바꿈하기 시작했다. 그 후 1932년 도청이 이전하며 대전의 행정·경제·문화의 중심지는 대전역과 현재의 원동, 중동, 대동 일대로 이동하였고 대전은 곧 신흥도시로 자리매김하였다. 대전 근현대사 전시관을 방문한다면 20세기 초 경부선과 호남선 철도 부설을 계기로 ‘근대적 의미의 도시’로 성장해 온 대전 발전의 역사를 알아갈 수 있다.

  또한 대전근현대사 전시관은 전쟁의 아픔과 시련 속에서 피어난 대전 평화의 역사도 배울 수 있는 곳이며, 앞으로 우리가 함께 나아가야 할 길 또한 알 수 있는 곳이다. 이런 남다른 역사적 의미를 새기고자 대전 평화로드 1호로 소개한다.

목척교에서 인동 만세로광장으로

일상의 평화, 목척교와 만세로광장
  대전 평화의 길 두 번째 걸음으로 꼽힌 목척교는 전쟁 당시 잃어버린 가족들을 찾는 장소로, 대전의 아픔과 애환이 서린 곳이다. 눈물로 가족을 애타게 찾던 어린소녀가 수개월 간 동생을 업고 부모를 찾아헤매며 굶주림 속에서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목척교에 가면 가족을 만날수 있을 거라는 소문 때문이었다. 그리고 소녀는 논산에서부터 만세로광장까지 걸어서 찾아온 엄마와 재회했다. 보는 이도 함께 기뻐 울게 하던 희망의 장소 목척교는 그후 전쟁의 아픔을 뒤로하고 많은 사람과 상인이 모여드는 대전 최대의 재래시장인 중앙시장으로 번성했다.

인동 만세로광장의 평화동상

  대전에서 3·1 만세운동이 처음 일어난 곳은 대전장터(지금의 인동시장)다. 산내에 살던 양정길(梁正吉)과 김로원(金魯源)은 3월 6일 대전장터에서 함께 3·1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대전장터 만세운동은 1919년 3월 16일 정오 대전장터에서 한 청년이 쌓아놓은 가마니더미 위에 올라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때 일본 헌병대와 보병대가 출동하여 무차별로 사격을 가하였다. 이로 인해 사상자가 나타나며 군중이 해산되었지만, 그 후로도 대전의 3·1만세운동은 인동시장을 비롯한 가수원, 유성 등지에서 활발하게 일어났다. 만세로광장은 바로 이 인동 장터에 생긴 것으로, 만세 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조성되었다. 만세로광장에서는 매해 대전장터 3·1 독립만세운동의 재연행사를 개최하여 가슴 뭉클한 순간을 대전 시민들에게 선사하고 있다.

인동 만세로 기념비

  또한 인동 만세로광장 천변 벽면에는 지역 예술가들이 일제강점기 당시 우리 조상들의 저항과 자유의 정신을 표현한 벽화가 자리하고 있다. 이 벽화를 본다면 누구든 만세운동의 감동을 느껴 볼 수 있을 것이다.

보훈공원전경

감사의 평화, 대전보훈공원
  세 번째 대전 평화의 길은 맑은 공기가 반겨주는 보문산 대전보훈공원이다. 대전보훈공원은 호국영령들의 위훈을 기리고자 했던 대전 시민들 뜻에 따라, 중구 선화동에 있던 영렬탑을 보문산 자연공원 사정지구로 이전한 새로운 추모공원이다. 이곳에는 나라를 수호하기 위해 최전선에 나선 참전용사들의 용기와 헌신을 기념한 영렬탑과 추모광장을 중심으로 위패봉안소와 6·25기념비, 월남참전기념비 등이 있다. 6·25전쟁 당시 대전지역에서 참전한 용사는 7,300여 명이었는데, 용사비 건립취지문과 함께 나란히 놓인 6개의 비석에 참전용사들의 이름을 각인하여 참전자의 명예선양과 위업을 후손만대에 기리도록 하고 있다.

  나라 수호를 위해 산화한 선열들의 고귀한 뜻을 기리고 경건한 마음으로 참배를 드리는 곳인 대전보훈공원은 전쟁을 모르고 자란 후세들이 전쟁의 참혹함과 사회상을 간접적으로나마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이곳에서 나라를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은 순국선열들의 흔적과 자료를 살펴봄으로써 자유와 평화의 소중함을 다시 한번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대전 평화의 길을 ‘손잡고 함께’ 걸으며, 작은 평화에서 큰 평화로 가는 Harmony, 한반도의 뉴노멀 시대를 꿈꿔본다.
*사진출처: 대전시, 대전시 마케팅공사, 디트NEWS24, 필자 제공

기용순 우송정보대학
듀얼센터 교수,
평통 자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