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현장
제29차 남북관계 전문가 토론회
70년 한반도
평화의 궤적을 따라 걷다
지난 9월 10일 사무처 대회의실에서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와 한국정치외교사학회가 공동으로 주최한 제29차 남북관계 전문가 토론회가 열렸다. 냉전 이후부터 현재까지 남북 간 이뤄진 합의의 궤적을 돌아보며 한반도에 평화체제를 구축하기 위한 과제를 모색하는 자리였다.
   ‘남북한 간 합의의 궤적과 한반도 평화체제의 과제’를 주제로 열린 전문가 토론회는 코로나19로 인해 세션별로 시차를 두고 전문가들이 참여한 가운데 진행됐다. 개회식에서 이석현 수석부의장은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부터 2018년 9·19 남북군사합의까지 남북의 시간을 복기했다. 그러면서 “남북관계에도 온고지신이라는 말이 적용되는지 모르겠지만, 과거를 돌아보며 답답한 현재의 타개책을 찾아낸다는 것은 의미 있고 지혜로운 일”이라며 “오늘 토론회를 통해 좋은 지혜가 발굴되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이석현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
   박영준 한국정치사학회장은 “70년에 걸쳐 남북 간에 여러 중요한 합의와 성과가 있었으나 한반도 평화체제라는 목표에는 도달하지 못했다”면서 “토론회를 통해 지난 역사를 분석하고 대북정책과 평화정책에 반영할 수 있는 중요한 의미를 발견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박영준 한국정치사학회장
국제사회 변화와 남북의 주체성이 만든 20세기 남북 합의
  ‘냉전기 남북합의 추진과 평가’를 주제로 열린 1세션은 김영명 한림대 교수가 진행을 맡았다. 첫 번째 발제자로 나선 양준석 서울신학대 교수는 한국전쟁 후 한국의 통일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열린 제네바정치회의에서 나타난 공산진영과 비공산진영의 갈등을 분석했다. 양 교수는 제네바정치회의의 주요 논쟁 사항을 정리하며, 당시 우리 정부가 중립국감시안을 반대했던 이유를 고찰하고 중립국을 통한 평화통일의 실효성에 의문을 제기했다.
  두 번째 발제를 맡은 엄정식 공군사관학교 교수는 70년대 데탕트가 어떻게 7·4 남북공동성명이라는 결과를 가져왔는지 돌아봤다. 그는 △국제체제의 변화가 추동한 남북관계 △남북 간 통일정책과 협상 전략 준비 부족 △국내 여론 및 통일에 대한 인식 조성 부족이라는 7·4남북공동성명의 세 가지 한계를 꼽으며 “다시 한번 한반도 미니데탕트를 현실화하려면 국내를 포함한 국제 문제에 대한 냉철한 분석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중구 국방연구원 선임연구원은 탈냉전 직후 남북한의 정치적 화해와 핵 문제의 한반도화가 추진될 수 있었던 이유를 설명했다. 그는 “탈냉전으로 인한 북한의 위기의식과 그에 따른 타협책 제시, 한국의 전략적 수용이 만난 결과가 남북기본합의서, 한반도비핵화공동선언으로 나타났다”며 “남북관계의 변화는 양측의 주체성이 만난 결과이며, 남북의 전략적 마인드에 따라 남북관계는 바뀔 수 있다”고 시사했다.
  1세션 토론에는 조성훈 한국당대사연구소장, 이헌미 서강대학교 상임연구원, 우승지 경희대학교 교수가 참석하여 의견을 제시했다.
21세기 남북 평화 구축 노력, 실패에서 배우다
  ‘21세기 남북 평화체제 구축 노력과 상호과제’를 주제로 이어진 2세션은 박영준 한국정치외교사학회장의 진행으로 2000년 이후 이뤄진 합의들에 관해 토론했다.
  이택선 충남대 교수는 남북 정상회담이 특정 정부에서만 이루어진 성과가 아니라는 점에 주목하며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성과는 이전 정부의 대북 정책을 계승한 것이고, 이는 다시 다음 정부로 전해졌지만, 결과를 만들지는 못했다고 설명했다. 또한 명분과 이상뿐 아니라 국제정치의 냉엄한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며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위해서는 현실의 힘을 키울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김동수 부경대 교수는 지난 30여 년간 열린 6자회담에서 중요한 합의가 여러 차례 이뤄졌음에도 북한의 비핵화를 끌어내는 데 실패한 요인을 분석했다. 그는 실패의 원인을 북한의 핵 동결과 그에 대한 보상조치의 부등가, 불완전한 비핵화 협상, 북·미 간의 메울 수 없는 간극과 불신 때문이라고 정리하고 “북·미 간의 상호불신과 혐오라는 근본적인 문제가 해소되기 전에는 북한 비핵화 협상은 진전되기 어려울 것”이라고 내다봤다.
  김대중·문재인 정부의 남북 간 합의를 중심으로 분석한 김영준 국방대 교수는 “두 정부는 보수적인 정책을 펼쳤다면 안정적으로 정부를 유지할 수 있었던 시기였지만 위험을 감수했기에 남북 정상회담이라는 성과를 이뤘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차기 정부가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 2.0 시대를 만들기 위해서는 △한반도의 운명은 우리가 주도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대북인식 패러다임 전환 △초당적으로 합의된 대북 전략이 필요하다고 전했다.
  2세션 발표에 대한 토론에는 김용현 동국대학교 교수, 천자현 연세대학교 교수, 이철재 중앙일보 군사연구 소장이 참여했다.
한반도 평화의 궤적, 그 끝에서
  3세션은 배기찬 사무처장의 사회로 고유환 통일연구원장, 김기정 국가안보전략연구원장, 이상현 세종연구 소장이 참여해 기조발제 후 자유롭게 토론하는 라운드 테이블로 진행됐다.
  고유환 원장은 “지난 30년 동안 수많은 다자회담과 남북, 북·미 간 합의가 있었음에도 북핵 고도화를 막지 못하고 합의도 사문화의 길을 걸었다”며, 그 원인으로 △상호불신 △국내적인 반발 △북·미 간 합의 여부에 종속되는 남북 합의 △북한 붕괴론 등을 꼽았다.
  김기정 원장은 “지난 5월 한미 정상회담이 특히 주목받았던 것은 바이든 대통령이 북한에 대한 한국의 협력, 관여, 대화를 지지하겠다고 했던 것”이라며 북한에 대한 관여를 미국과 어떻게 공유할 것인지 논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와 함께 한국이 주된 책임자로서 한반도 평화체제를 주도해야 하며, 남북은 그 과정에서 정치·경제·사회문화·군사적으로 신뢰를 구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상현 소장은 우리를 둘러싼 대외환경에 주목했다. 그는 “미·중 전략경쟁 등 강대국 정치가 국제무대의 판을 주도하면 한반도 문제에 대한 관심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며 “현재 국내외 악재에 시달리고 있는 미국이 한반도 평화프로세스에 개입하는 것을 기대하기는 힘들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러면서 “현시점에서 우리 정부가 할 수 있는 것은 차기 정부가 한반도 평화프로세스를 진전시킬 수 있도록 이번 정부의 교훈을 정리하는 것”이라며 한반도 평화프로세스의 과정을 돌아보고 시사점을 도출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기조 발제 후에는 배기찬 사무처장의 제안으로 평화체제 핵심당사자, 비핵화와 관계 정상화의 선후 관계, 남북관계의 진정한 평화를 주제로 자유 토론이 이어졌다. 토론회에서는 유튜브로 현장을 지켜본 시청자들의 질의응답과 전문가들의 심도 있는 대담이 이어졌다.
  한국전쟁 후 70여 년간 남과 북이 함께 그린 궤적은 이제 어느 방향으로 뻗어 나가게 될까.
① 평화체제의 핵심당사자는?
  한반도 평화체제에서 한국은 운전자 또는 중재자라는 두 가지 비유가 사용된다. 그러나 운전자와 중재자는 차이가 있고, 한때 북한은 우리가 민족 문제에 중재자로 나선 것을 비판했다. 한반도 평화체제의 핵심당사자는 누구이고 어떤 역할을 해야 할까?
  평화체제 구축의 당사자를 말하려면 전쟁의 당사자가 누구인가를 규명해야 한다. 전쟁 당사자와 정전협정 서명 당사자에 차이가 있어 이런 논란이 생긴다. 2007년 10·4 선언에서 3자 또는 4자 정상에 의한 종전선언이 이야기됐다. 대체로 3자(남·북·미) 또는 4자(남·북·미·중)가 당사자라는 공감대는 이뤄졌다고 본다.
  규범적 관점에서 남북이 당사자이다. 분단과 대립의 과정은 우리의 의지가 아닌 타의에 의해 이루어져 왔다. 그것을 극복하는 과정에 우리가 빠져 있는 것이 과연 정당한가? 또 두 개념을 구분해서 사용하고 있지만 운전자론은 포괄적인 개념이며 그 안에 제안자, 중재자, 촉진자라는 세 가지 역할이 모두 포함된 것이다.
  사실 그동안 북한은 남한이 종전선언과 평화협정의 당사자라는 것을 부인해 왔다. 그런 면에서 우리가 북한을 설득하고, 한반도 평화체제의 주체성에 대한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하다.
  북한이 한국을 우회하는 이유는 정전협정 당사자가 아니라는 이유에서다. 정전체제는 사실상 뉴노멀 상태로 굳어졌지만, 한반도 평화에 가장 영향을 받는 나라는 남과 북이다. 문제는 북한이 미국만 바라본다는 데 있다. 이런 비대칭적 관계가 한반도 평화체제 당사자들의 의지와 시너지를 결집하는 데 장애가 되고 있다.
② 비핵화와 관계 정상화의 선후는?
  기존에는 비핵화를 통한 평화, 비핵화를 통한 관계 정상화라는 인식이 있었다. 이 문제에 새로운 접근 방법이 있을 수 있을까?
  비핵화가 완성돼야 북·미 수교, 종전선언 등이 가능하다면 비핵화의 정의가 문제가 된다. 이를테면 과학기술적 관점에서 비핵화는 핵무기 포기, 핵 관련 프로그램 제거 등에만 3~40년이 걸리고 그 기간 동안 평화 논의를 하지 못하는 구조가 된다. 특정한 지점을 비핵화로 규정하더라도 그 안에 여러 가지 정의를 둘 필요가 있다.
  우리는 비핵화와 평화를 말할 때 100%의 비핵화, 100%의 평화를 말한다. 하지만 비핵화는 굉장히 긴 과정이다. 단계에 맞는 비핵화를 통해 우리의 기대 수준을 조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100% 비핵화, 100% 평화는 존재하지 않는다.
  북한의 핵능력 평가에 따라 비핵화 방식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CVID 같은 방식은 유효하지 않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북한이 사실상 핵보유국으로 인정되는 상황에서 비핵화를 추동할 수 있는 방법은 핵을 버릴 수 있는 조건을 제공하는 것이다. 판문점 선언과 싱가포르 선언에 입각해 평화비핵협상을 할 것인가, 아니면 북한과 유핵공존할 것인가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③ 남북관계의 진정한 평화란?
  남북이 UN에 동시 가입하여 국제사회에서 각자 국가로 인정받은 지 30년이 흘렀다. 국제사회뿐 아니라 남북 내부에서 서로의 체제를 인정하고 존중할 수 있을까?
  평화 자체를 반대할 사람은 없지만, 평화의 개념에는 이견이 있다. 평화는 상대적인 개념이며, 우리만 ‘평화하자’고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한반도의 평화를 논하려면 우리의 상대는 어떤 평화를 꿈꾸는가에 대한 정확한 진단이 필요하다. 남북 간의 평화 공감대가 먼저 이뤄져야 한다.
  한반도 양국체제론이 어쩌면 다음 세대에게는 상당 부분 현실로 다가올 가능성이 있다. 평화는 안정적 평화, 작동가능한 평화, 유지가능한 평화, 관리가능한 평화가 있다. 네 가지 모두 완벽한 형태의 평화에 근접하기 위한 중간 지점이다. 한반도 평화체제, 평화공존을 위해 앞으로 목표로 삼아야 할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다른 측면에서 이야기하면, 현재 우리는 코로나19와 기후 위기 등 일상의 평화가 중요한 시기에 접어들었다. 과거에는 핵이 가장 큰 위협이었지만 지금은 코로나19가 가장 큰 위협이 됐다. 이제는 일상의 평화에도 눈을 돌려야 한다.
  과거에는 전쟁을 대비해야 평화가 온다고 했지만, 이제는 평화를 원하면 평화를 준비하라고 한다. 남북기본합의서 30년, 유엔 동시 가입 30년, 7·4 공동성명 50년, 한국전쟁 70년 등을 돌아보며 우리에게 진정으로 평화가 필요하다면 본격적으로 평화를 준비해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