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통일』 Vol 1802021.10

연간기획

미래가 온다 ⑨

코로나19 시대의 마음치유
안부를 묻고 서로 연결되는
관계를 향해



코로나19는 인간의 내부 세계도 뒤흔들고 있다. 코로나19와 함께 잘 살아가기 위해 우리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잘 살아” 간단하게 퉁칠 수도 있었다. 작가는 그 한마디를 엿가락처럼 쫙 늘린다. 듣는 이의 이름도 넣고, 잘 사는 것이 일상에서는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표현한 어느 드라마 마지막 대사가 인상적이었다. 심리치료의 관점에서 보기에 이는 매우 치료적이라고 여겨진다.

  “주원아, 밥 잘 먹고, 잠 잘 자고, 똥!(똥을 발음할 때 유독 힘을 준다.) 잘 싸고!”

  드라마의 마지막 메시지와 함께 극중 주인공이었던 배우 신 씨의 어느 인터뷰도 인상적이었다. 신 씨에게 한 예능프로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이 주어졌다. “이웃집에 신이 살아요. 뭐 한 가지 부탁하고 싶으신 게 있으신지. 아무거나 다 들어줘요” 두 MC가 신 씨의 대답을 기다린다. ‘당신에게 복권 1등이 당첨되는 행운이 주어진다면?’, ‘무인도에 가는데 세 가지만 가져갈 수 있다면?’ 등의 설정과 함께 ‘아무거나 다 들어주는 신이 바로 옆에 산다’는 상상은 듣는 이를 ‘아무거나 다 말해도 되는 존재’인 아기로 만들어버리는 힘이 있다. 우린 가끔 아기가 될 필요가 있다. 물론 안전한 장소에서 믿음직스러운 대상과 함께 말이다. 가장 구체적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펼쳐나가는 힘을 키워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이야기는 잠시 뒤로 하고) 지금 이 글을 읽는 당신도 눈을 잠시 감고 생각해봐도 좋겠다. 아기가 되었다고 상상하면서.

이웃집에 신이 산다면
   “이웃집에 신이 살아요. 뭐 한 가지 부탁하고 싶은 게 있으신지. 아무거나 다 들어줘요” 언제였던가. 내 말을 듣는 자의 형편을 고려하지 않을 자유를 갖고, 주변 상황을 파악해야 하는 의무에서 벗어난 채, 내 안의 욕구에만 오롯이 집중하여 시원하게 아무 소리나 내뱉어도 되었던 순간이. 신 씨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답한다. “이사 가지 마세요” 이 말에 스튜디오 안은 찰나의 정적이 흐른다. 그리고 엉뚱한 사람의 유머를 들었다는 듯이 웃음바다가 된다. 잠시 흘렀던 정적은 무엇을 의미했을까. “왜 이런 답변을 하세요?”라는 질문에 “진지하게 답한 건데요”라고 응수하는 신 씨는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욕망을 진지하게 답한 것이 맞다고 본다. 우선 당신부터 내 옆에 있으라고. 당신이 내 옆에 있어야 내가 밥도 잘 먹고, 잠도 잘 자고, 똥!도 잘 쌀 수 있다고 말이다.

  ‘무엇을 해주세요’, ‘나한테 주세요’라는 문장이 나올 것이라는 사람들의 예상은 빗나갔다. 신 씨의 ‘이사 가지 마세요’는 예상하기 쉬운 흔한 대답의 판도를 바꾸었다. 신은 요청을 무조건 들어주는 호구가 아니라, 너와 내가 연결되어 관계를 맺어가며 서로 힘을 주고받을 수 있는 상호적인 존재가 된 것이다. 아무렴 ‘이 동네 좋아요. 다른 곳으로 가지 마세요’를 의미했을까. ‘나와 함께 있어요’, ‘당신과 함께 있고 싶어요’ 등 이런 ‘함께’를 의미한 것일 터였다. ‘함께’가 붙으면서 ‘신’이라고 표상되는 추상적인 존재는 인간의 정신이 성숙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당신으로 존재하게 되었다. 함께는 이렇게 든든하고 따스한 단어이다.

‘위드’에 붙은 전염병, 일상이 된 사이렌
   ‘함께’에 전염병이 붙고야 말았다. ‘위드 코로나(단계적 일상회복, 코로나19와 공존하기)’. 강력한 변이바이러스가 출현하고, 백신을 맞고도 감염되는 돌파감염 등으로 코로나19 팬데믹이 장기화되고 있다. 코로나19의 완전한 종식은 기대할 수 없으니, 확진자 수 억제보다 치명률을 낮추는 새로운 방역체계로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개념이다.

   팬데믹 사이렌이 매일매일 울린 지 곧 2년이 되어간다. 뚫렸습니다, 격상되었습니다, 확진자 동선이 공개되었습니다, ‘주의’에서 ‘경계’로 또 ‘심각’으로 격상되었습니다, 긴급재난이 선포되었습니다, 오늘도 확진자의 수는 0000이고 누적 사망자의 수는 0000입니다, 코로나 학대라고 들어보셨나요, 자살률도 급격하게 증가하고 있습니다 등의 확성기가 매 순간 뉴스에서 울려 퍼진다. 더 심각하게도 이 소리는 우리 몸 안에서 스스로 재생된다. 마스크를 써야 하고 몇 명 이상 집합금지가 되고 체온이 흐르는 몸의 구석구석을 소독제로 씻어내려야 하는 등을 일상에서 수행해야 한다. 사이렌 소리가 밖에서 나는 것인지 안에서 나는 것인지 이제 구분조차 어렵게 되었다.

나 홀로 집에서 전쟁을 치르다
  더 심각한 상황은 따로 있다. 눈으로 확인할 수 없고 손에 잡히지 않는 무언가가 내 몸에 스미어 흐를 수 있다는 미세먼지의 공포는 약과였던 셈이다. 관계의 거리는 무의미해졌다. 현대사회 최고의 공포영화 단골소재인 좀비처럼 내 주변 누가 감염이 되어 나를 언제 어떻게 갑자기 우악스럽게 덮쳐 일상이 뜯어 먹힐지 모르는 일이 되었다. 내일은 괜찮아질 거라고? 오늘 밤까지 살아남는 게 문제다. 불확실성과 모호함이 불안, 공포, 강박이라는 감정과 결합되어 온 세상을 덮었다. 타인과의 접촉은 공포가 되었고, 내 안의 의심을 말끔히 닦아낼 도구는 존재하지 않으며, 씻고 또 씻어도 떼어버릴 수 없는 균은 우리에게 강박의 올가미를 채웠다.   감염의 위험은 사람을 거리두기의 대상으로 만들었다. 뭉치면 죽고 흩어져야 산다. 위드에 전염병이 붙고 사람이 떨어져 나갔다. 장기간 감염에 노출된 우리는 어느 한 시절을 각자의 발달단계에서 뛰어넘거나 삭제하거나 대책 없이 머무른다. 은밀하게 아무도 모르게 새로운 전쟁터를 각자 지녔다. 나 홀로 집에서. 예외는 없다.

우리는 ‘위드’에 전염병 대신 원래의 당신을
찾아가며 구체적으로 일상을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응원하고 공감하는 추상어를 구체적으로 풀어내자.
서로의 이름을 부르고 구체적으로 안부를 물으면서
연결되어야 우리를 함께 지킬 수 있다.
지난 4월 27일 서울 종로구 창덕궁에서 2021 코로나 블루 극복 희망 프로젝트 ‘국악하기 좋은 날, 창덕궁 오후 음악회’가 열렸다. ⓒ연합
  언택트로 만나는 세상이 좋기만 한 것도 아니다. 순식간에 무한의 사람들과 연결되었다가, 갑자기 끊어지고 나 홀로 암전상태에 남겨지는 상황은 감각체계의 교란을 가져왔다. 심리적 모공도 안정적 흐름을 갖고 천천히 열리고 또 천천히 수축되어야 하는 법이다. 우리의 몸은 전쟁같은 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해 극도로 예민해지거나, 온 감각을 아예 마비시키는 방법을 선택한다. 그래야 내가 괜찮아지니까. 그리고 과도하게 극단인 심리적 세계에서 내일로 이어지는 오늘의 일상은 서서히 무너지고 있다. 은밀하게, 아무도 모르게 새로운 전쟁터를 각자 지녔다. 영국에 외로움 담당 장관이 생긴 지는 벌써 수년이 되었고, 일본의 고독·고립 대책 담당실 설치에 이어, 우리나라에도 올해 4월 「고독사 예방 및 관리에 관한 법률」이 시행되었다. 고독사가 노인에서 2~30대 청년의 삶으로 내려 퍼진 탓이다. 재난의 시대이고 전쟁은 일상이다. 네 영역, 내 영역, 유전, 환경 등의 인과를 따질 틈이 없다. 어디가 더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하는지 물을 수도 없다.

지난 9월 15일 추석특별방역대책에 따라 요양병원 대면 면회가 허용되자 코로나19 사태 이후 18개월 만에 만난 모녀가 손을 잡고 있다. ⓒ연합
서로의 안부를 구체적으로 물으며 연결된다는 것
  ‘서로 마주하고 대화를 하며 함께 마음을 작업하다’라는 뜻을 지닌 심리상담을 하다 보면 격려나 위로의 인사를 많이 받게 된다. 또는 나의 어두운 이야기로 당신도 어둡겠다고, 반복되는 이야기로 당신도 지겹겠다고 하는 내담자의 염려도 듣는다. 내담자를 약자로 보는 시각에서는 맞는 이야기일 수 있겠다. 그러나 내담자는 자신의 정신세계에서 기존의 낡은 패턴을 끊어내고, 새로운 판도를 만들어가는 강자이기도 하다. 가장 유아였던 시절, 내부세계를 형성하는 최고의 전성기였던 시간으로 타임머신을 타고 들어간다. 바로 그곳에서 근본적이고 원초적인 감정적 사유를 한다. 아주 작은 시냅스 연결이 조금씩 진행된다. 폐허에서 꽃이 피어나는 것처럼. 심리 상담실의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는 놀라운 장관이다.

  관계의 연결성을 찾기 위해 꼭 심리상담을 할 필요는 없다. 심리상담의 원리를 일상에 적용할 수 있다. 신 씨가 “이사 가지 마세요”라고 답했던 직후의 정적에 다시 집중해보자.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욕구, 나의 세계가 고유한 방식으로 성숙할 수 있는 전제인 타인의 존재가 훅 떠올랐던 그 찰나의 순간 말이다.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는 것 같지만, 인간은 존재 그 자체로 인정받는 순간 자기 삶의 의미를 깨닫는다. 동시에 자신이 진짜 좋아하는 것은 무엇인지, 진짜 싫어하는 것이 무엇인지 느낄 수 있는 감각세포가 형성된다. 그렇게 누군가와 함께 이 느낌, 저 느낌 이야기하면서 적절한 단어를 찾아나가는 시간을, 감정적으로 의미 있는 이야기를 꺼내보는 시간을, 모호한 것들을 탐험하며 구체화시켜 말하는 시간을 가져나가는 것은 심리적인 폐허를 조금씩 복구하는 일일 것이다.

  잘 사는 것을 엿가락처럼 쭉 늘여서 듣는 이의 이름을 넣고 잘 사는 것이 무엇인지 표현한 대사처럼, 그렇게 우리는 ‘위드’에 전염병 대신 원래의 당신을 넣어가며 구체적으로 일상을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응원하고 공감하는 추상어를 구체적으로 풀어내자. 서로의 이름을 부르고 구체적으로 안부를 물으면서 연결되어야 우리를 함께 지킬 수 있다. 우리 각자가 성숙해져야 한다. 정신적으로 성숙한 개인이 더 안전하고 건강한 사회를 만드니까 말이다.

홍성희 정신분석센터 PANDO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