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통일』 Vol 1802021.10

평화 사랑채

평화는 어떻게 내 삶을 바꾸었나
-가려진 세계를 넘어 -



   탈북민과 함께 책을 쓴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런던에서 15년간 살면서 난민 문제에 대해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었고, 더구나 탈북민에게는 관심도 없었다. 2014년 국제앰네스티 인터뷰에 우연히 참여하지 않았었다면, 남한 여성인 나와 북한 여성인 박지현의 만남은 없을 것이다. 이 예상치 못한 만남은 서로를 드러내는 기회를 가져왔고, 그렇게 한 권의 책이 탄생했다.

북한 여성 박지현의 이야기
   『가려진 세계를 넘어』는 박지현의 어린 시절부터 그녀가 두 번의 탈북 과정을 거친 후 2008년 영국에 도착하기까지의 삶을 기록한다. 그녀는 자신의 나라가 준 잘못된 사랑을 결코 부인하지 않고 그 사회에서의 삶을 그대로 쏟아낸다. 북한 여성이 이야기를 들려주고, 남한 여성은 글을 쓴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서로에게 편견을 가질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현과 마음이 편해지기까지는 5년이 걸렸다. 우리의 공통점은 영국에 산다는 것, 비슷한 외모와 같은 언어를 쓴다는 것뿐이었지만 신뢰를 쌓으며 서로가 서로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었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고 하지만 함께 있으면 마음이 불편한 사람과 인연을 맺고 그 끈을 놓지 않는다는 것은 상당한 노력이 필요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타인에게 시선을 돌리며 나도 모르는 새 체화된 개념들을 넘어서야만 한다. 전 세계 시민들 모두가 가지고 있는 타인을 향한 시선, 이 기본적이고 필수적인 시선이 대한민국 국민에게는 필수적일 것이다.

2020년 1월 23일 평통 영국협의회가 주최한 탈북민 설날 잔치 ⓒ필자 제공
서로의 다름을 깨달으며 함께 살기
   영국에는 약 600명의 탈북민이 거주한다. 지난 10년 동안 남한 교민과 탈북민들은 런던 남부 한인타운인 뉴몰든 인근에서 공존해 왔다. 억양이 다른 한국어를 쓰고, 때로는 공통점이 많다는 느낌도 받지만 때로는 전혀 다른 세상에서 온 사람이라 느끼며, 한국 음식점과 슈퍼마켓에서 함께 어울려 일한다. 감정적으로는 복잡한 부분도 있지만 남과 북이 한데 어울려 작은 통일을 이루고 있는 곳이라고 할 수 있다. 포스트 브렉시트 영국이 유럽과 함께 사는 방법을 다시 배우고 있는 것처럼, 뉴몰든의 남북한 사람들도 서로의 다름을 깨달으며 함께 사는 방법을 배우고 있다.

   어떤 서양 작가들은 탈북민을 똑같은 잣대로 분석하고 충격적인 면을 부각하거나 거짓 공감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북한을 분석하고 컨텍스트화하는 역사·정치 서적도 있다. 그러나 나는 북한이나 남북 대립, 빈곤과 풍요, 독재와 자유가 아닌 여성, 인간에 대한 글을 쓰고 싶었다. 그리고 그 글이 순수하고 공정하기를 바랐다.

   소르본느대학에서 불문학을 전공했지만 글을 ‘잘’ 쓰지 못한다는 두려움이 있어 나는 이 불안감을 없애기 위해 프랑스어 필기 워크숍에 참여했다. 워크숍 첫 강의에서 “당신이 생각하는 작가란 무엇인가요?”라는 교수의 질문에 나는 무심코 “가장 완벽한 방식으로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답했다. 그 답이 내 이마에 땀을 이렇게나 많이 흘리게 할 줄이야…. 나의 주인공 지현은 너무 오랫동안 감정을 억누르고 살아서 그의 감정을 느끼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5년 후 책이 프랑스어로 출판되었을 때, 나는 제네바와 브뤼셀의 국제도서박람회에 초대받았다. 놀랍게도 분열된 한민족의 비극을 넘어선 두 여성의 행복한 만남, 우리의 성공적인 ‘아주 작은 통일(micro-reunification)’이 청중들에게 흥미를 주는 것 같았다. 런던 정치경제대학교 학생 한 명은 나에게 “통일이 우리처럼 평범한 시민 사이에서 논의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못했다. 정부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나는 그에게 남한과 북한 사람들은 파티장에서(2020년 1월 23일 평통 영국협의회가 주최한 설날잔치에서 그랬듯이) 춤을 추고, 손을 잡고 노래하고,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면서,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고 전해주었다. 통일은 국가 지도자들 간의 거래가 아니라 내부로부터의 통합일 것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이다. 이것이 내가 개인과 인간에게 관심을 가지며 평화에 접근하는 이유다. 끊어진 고리를 연결하는 시간, 남을 이해하려는 노력, 다른 사람의 입장이 되어보는 자세를 가져야만 사회적 배경 뒤에 사람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 과정을 거쳐야만 진정한 연결고리를 만들 수 있고, 그의 존엄성에 접근할 수 있다.

매일 조금씩, 새로운 시선으로
  독자가 해준 말 중에 내가 특히 고맙게 여기는 말이 하나 있는데, “네 책은 나에게 생텍쥐페리(Saint Exupery)의 『어린 왕자』를 떠올리게 한다”는 것이다. 그 독자는 내 책에서 지구에 사는 여우와 화성에서 온 어린 왕자 사이의 길들이기 과정을 연상했을 것이다. 어린 왕자 지현은 북한에서 내려와 지구에 사는 여우인 나를 만났다. 아무도 모르고 친구도 없는 어린 왕자 지현에게 내가 처음 내민 장미 한 송이는 ‘다른 십만 송이와 비슷한’ 꽃에 불과했다. 나는 그런 그녀에게 “내 곁으로 조금 더 가까이 앉아봐. 매일 조금씩”이라고 요구했다. 그러다 보면 서로가 단 하나밖에 없는 상대로, ‘다른 십만 명과 비슷한’ 사람들이 아니고, 없어서는 안 될 사람으로 바뀌기 마련이니까….

  조금씩 다가가다 보니 5년이나 걸리긴 했지만, 우리는 평화롭게 통일했다.

  우리는 매일 조금씩 서로를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봐야 한다. 그러다보면 결국은 차이를 인정하며 서로에게 변화를 주는 사람으로 발전하게 될 것이다.

채세린 『가려진 세계를 넘어』 작가,
유·중·아협의회 공공외교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