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통일』 Vol 1802021.10

지난 9월 15일 정의용 외교부 장관과 왕이(王毅) 중국 외교담당 국무위원 겸 외교부장이 서울 종로구 외교부 청사에서 한중 외교장관회담을 하고 있다. ⓒ연합

진단


한반도 비핵화와 주변국
중·러 지렛대 역할 가능
유연한 외교전략 펼쳐야



북핵 문제를 둘러싼 러시아와 주변국들의 입장과 행보를 살펴본다. 북·미대화 재개 가능성과 중국과 러시아의 단계적 동시이행 움직임 등 변화하는 상황을 분석하고 주변국과의 협력 방안을 모색한다.

  미국 바이든 행정부가 ‘외교에 열려 있는 조율되고 실용적인’ 대북정책을 발표한 지 5개월이 지났지만 북·미대화가 재개될 조짐은 전혀 보이지 않고 있다. 미국은 성김 대북정책특별대표를 통해 ‘조건 없는 만남’을 제의하고 한미 간 양자협의를 통해 대북 인도적 지원 계획을 거듭 밝혔지만 북한은 여전히 무대응으로 일관하고 있다.

지난 9월 14일 일본 도쿄 외무성에서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한 한·미·일 북핵수석대표 협의가 열렸다ⓒ. 연합
북·미대화 재개 가능성과 북핵 문제
  북한의 무대응을 북·미대화에 대한 전면 거부로 해석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오히려 미국의 대화 요구를 무시하는 듯한 입장을 지속함으로써 자신들의 이익에 부합하는 조건이 제시될 때까지 기다리며 정책적 운신의 폭을 넓혀가겠다는 것으로 해석할 여지도 존재한다. 최근 북한이 유엔 결의 위반에 해당하는 단거리 탄도미사일시험을 재개했지만, 오바마 정부 출범 3개월 만에 장거리 로켓 ‘은하-2호’를 발사하고 트럼프 대통령 취임 직후 무수단급(사거리 3,000~3,500km) 중거리 미사일을 발사한 것과 비교하면 나름의 수위 조절에 나선 흔적도 엿보인다.

  김여정 노동당 부부장과 리선권 외무상이 나서 북·미 접촉 가능성에 대해 ‘잘못된 기대’를 운운하며 대미 비난에 나서고 있지만 김정은 위원장의 메시지는 여전히 중립적 수준에 머물고 있는 것이 이러한 추정을 뒷받침 한다. 김정은 위원장은 올해 1월 노동당 8차 당대회에서 북·미관계에 대해 ‘강대강, 선대선’이라는 가이드라인을 제시한 데 이어, 6월 노동당 8기 3차 전원회의에서 ‘대화에도 대결에도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

  북·미대화에 앞서 북한이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또 하나의 핵심요인은 미·중관계를 중심으로 하는 한반도의 주변 정세일 것이다. 미·중 전략경쟁이 격화할수록 북한은 미국과의 대화를 유보하면서 중국에 편승하는 방식으로 경제적 버티기에 들어가고자 하는 지정학적 유혹에 노출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2019년 10월 당시 트럼프 행정부와의 스톡홀름 협상 결렬 이후 제7기 5차 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선포한 미국과의 ‘장기전’이 바이든 행정부에 들어서도 지속되는 것이다.

  북한 문제에 대한 중국의 최근 행보도 이러한 우려를 뒷받침한다. 시진핑 집권 1기 당시 북한과의 고위급 소통 부재와 북한의 대중 비난 등으로 인해 일시적 관계 악화를 경험했던 북·중관계는 2018~2019년 남북-북·미 정상회담 국면에서 5차례의 김정은-시진핑 정상회담을 개최하며 최상의 우호관계를 과시한 바 있다. 트럼프 행정부의 북·미협상 중단 이후 중국은 유엔 안보리에서 러시아와 함께 대북 제재 완화를 요구하는 등 노골적으로 북한 편들기에 나선 바 있다. 올해 들어 김정은 위원장과 시진핑 주석이 구두 친서나 축전 등의 형태로 교환한 메시지에도 미·중관계 악화국면에서 북·중관계 밀착을 보여주는 징후들이 드러나고 있다. 김 위원장과 시 주석은 △선대(先代)로부터의 우호친선 계승 △외부의 침략에 맞서 싸운 혈맹 △새로운 정세 조성 하에서의 사회주의 수호 등 3가지를 강조하고 있다. 특히 주목할 대목은 ‘새로운 정세 조성’에 대한 북·중 양국의 인식이다. 「노동신문」에 따르면 김정은 위원장은 ‘새로운 정세’를 설명하면서 ‘적대세력의 전방위적인 도전과 방해 책동’을 언급했는데 이는 대미 비난의 수위를 높임으로써 미·중관계 악화국면을 북·중관계 강화에 활용하고자 하는 속내를 드러낸 것으로 볼 수 있다.

  한반도 비핵화에 대한 중국의 기존 입장은 한반도 평화, 비핵화, 협상을 통한 해결 등 이른바 3원칙으로 요약된다. 중국은 또 구체적 북핵 해법으로 쌍잠정(雙暫停)을 통한 북한의 핵미사일 실험과 한미연합훈련의 동시 중단을 촉구하고 쌍궤병행(雙軌 .行)을 통해 비핵화와 평화 협정 논의의 병행을 주장한 바 있다. 그러나 최근 들어서는 한반도 비핵화에 대한 책임 있는 해법을 제시하기보다는 왕이(王毅) 외교부장이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 화상회의에서 한미연합훈련 중단을 촉구한 것에서 보듯 한반도 정세의 전개과정에서 대미 압박 의도를 드러내고 있다. 반면, 북한을 향해서는 인민의 행복과 복리 증진지원 의사를 암시하며 후견 역할을 자임하고 있다.


한반도 비핵화를 바라보는 중·러의 시각
  중국 언론을 통해 한반도 전문가들이 보여주는 한반도 비핵화에 대한 인식도 주로 미·중관계 프레임에 맞춰져 있음을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잔더빈(詹德斌) 상하이 대외경제무역대학 한반도연구센터 주임은 지난 3월 「환구시보」 기고문을 통해 “미국이 북한의 단거리 미사일 발사를 ‘무력 도발’과 ‘중대 위협’으로 과장하면서 한미, 한·미·일 협력을 강화하는 호기(好機)로 삼고 있다”고 주장했다. 최근 양시위(楊希雨) 중국국제문제연구원 선임연구원도 「환구시보」 논평에서 한미연합훈련에 대해 “남북 긴장감과 불안감만을 고조시키는 안보 딜레마를 심화하는 결과를 초래한다”고 주장했다.

  북·미관계의 진전을 도모하는 과정에서 중국 변수가 긍정적 요인으로 작용할 것인지 부정적 영향력을 행사할 것인지는 결국 중국이 한반도 상황의 중재자와 조정자 역할을 하는지, 아니면 대북 후원자의 역할을 자처하는지에 따라 판가름날 것이다. 그런데 바이든 행정부 들어 미·중경쟁이 격화되면서 중국이 대북 후원자의 역할을 점점 강조하고 있다는 것은 북한으로 하여금 북·미대화 재개의 시급성을 감소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

  러시아 역시 한반도에서 미국의 영향력 확대를 견제하는 데에서 중국과 이해관계를 공유한다. 러시아 내 한반도 전문가들도 한반도 비핵화 문제를 미·중관계의 동학 내에서 해석하고자 하는 태도를 보여준다. 예를 들어 블라디미르 페트롭스키(Vladimir Petrovsky) 러시아 과학아카데미 극동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은 지난 4월 「국제 정세(International Affairs)」 기고에서 “미국이 한국과 일본을 동원해 반(反) 중국 캠페인을 통해 북핵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고 비난한 바 있다. 이러한 주장은 미국의 대북정책 발표나 한미 정상회담 결과 등에도 부합하지 않는 비합리적 분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러시아 전문가들의 이러한 주장에는 한반도 비핵화 문제를 지정학적 구도로 해석하고자 하는 의도가 담겨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의 최근 행보에 담긴 계산법은 중국에 비해서는 다소 유연한 태도로 평가된다. 러시아는 인도·태평양을 무대로 하는 미·중 양국 간 충돌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데다 러시아의 관심사항인 극동개발과 남·북·러 3각 경제협력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비핵화의 진전과 북한의 대외개방이 필수적이라는 인식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게다가 러시아는 2008년 6자회담이 좌초된 이후로 한반도 비핵화 협상에서 배제되어 있는 데 대한 불만도 누적되어 있는 상태이다.

지난 9월 15일 조선중앙TV는 철도기동미사일연대가 열차에서 동해상 수역으로 미사일을 발사했다고 보도했다. ⓒ연합
한러, 한중관계 활용하는 유연한 외교전략 필요
  지난 8월 이고르 마르굴로프(Igor Morgulov) 러시아 외교부 아시아·태평양 차관이 방한해 한러 간 북핵수석대표 협의를 갖고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 정착 진전을 위한 협력 방안을 논의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평가할 수 있다. 지난 4월 일찌감치 류샤오밍(劉曉明) 전 주북한 대사를 한반도사무특별대표에 임명해 놓고도 한중, 북·중 간에 북한의 대화 복귀를 위해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는 것과 대조되는 대목이다. 러시아의 대북 영향력은 중국에 비해서는 비교할 바가 못 되지만 북·미관계의 장기 경색 국면이 지속된다면 러시아가 최소한 북한과의 대화의 장을 제공하거나 대화의 필요성을 북한에 전달하는 역할 정도는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해 볼 수 있다.

  중국과 러시아는 모두 남북한과 동시에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며 미국과는 다른 독자적 비핵화 해법을 제시하면서 한반도의 정세 변화에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하는 목표를 공유하고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북·미관계의 대치 상태가 장기화하면 할수록 한중, 한러관계 채널을 통한 북한 설득의 필요성은 늘어난다고 볼 수 있다.

  국가 전략노선으로서 자력갱생과 대미 장기전을 선포하고 대북 적대시정책 철회를 북·미대화 재개의 전제 조건으로 내건 북한이 미국의 ‘조건없는 만남’ 제의에 단시일 내에 호응할 가능성은 높지 않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중국은 2022년 베이징 동계 올림픽을 계기로 남·북·중 3국 간 평화 이벤트를 통해 동아시아에서 평화 중재자로서의 위상을 과시하려고 할 것이다. 왕이 외교 부장도 얼마 전 방한 기간 중 “베이징올림픽이 남북관계 개선의 계기가 되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히고 ‘정치적 의지’ 등의 표현을 사용하며 분위기를 한껏 띄웠다. 바이든 행정부 출범 이후 한미, 한·미·일 공조를 통해 북한을 협상 테이블로 유도하려는 지속적인 노력에 중국 변수가 추가될 가능성이 높아진 것이다.

  중국과 러시아는 한반도 비핵화 관점에서 북한 문제를 상호협력 영역 안에 두고자 하는 미국의 전략을 수긍하면서도 북한 문제를 전략적 수단으로 활용하여 한반도 영향력 증대의 계기로 활용하고자 하고 있다. 따라서 한미 간 협의를 통해 인도적 지원 등 신뢰 회복을 위한 조치를 일관성 있게 이행해 나가되 한중, 한러 양자관계를 북한 설득의 지렛대로 활용하면서도 주변국의 전략적 의도에 포섭되지 않는 유연한 외교전략이 필요할 것이다.

성기영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외교전략연구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