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비전
통일부 ‘통일미래기획위원회’ 참여한
전우택 연세대 의대 교수
“남북한 ‘정치 공동체’가 바로 통일
작은 것부터 하나씩 이뤄나갔으면”
북한 주민들에게 식량만큼 시급한 게 보건·의료 지원이다. 가벼운 질병에도 제대로 치료받지 못해 사망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는 게 북한이탈주민들의 전언이다. 그런데도 북한 정권은 핵미사일 개발에만 열을 올린다. 통일은 더욱 요원해진 걸까. 굶어 죽거나 병들어 죽어가는 수많은 북한 주민을 구제할 방법은 없는 것일까. 올해 초 통일부 장관 정책 자문기구인 ‘통일미래기획위원회’에 참여한 전우택 연세대 의대 교수와 그 해법을 찾아봤다.
전우택 교수는 한반도 통일과 북한, 북한이탈주민, 남남갈등, 사회통합 문제 등을 오랜 기간 연구한 국내 대표적인 사회정신의학자다. 1993년 시작한 남북나눔운동에 뿌리를 둔 한반도평화연구원 3대 원장과 통일보건의료학회 초대 이사장, 연세대 의료원 통일보건의료센터 소장 등 굵직한 남북한 연구단체를 이끌어왔다. 사회정신의학 분야에선 한국자살예방협회 이사장, 교육 분야에서는 한국의학교육학회 회장을 맡기도 했다.
보수와 진보, 이념을 떠나 어느 정부든 정책자문을 마다하지 않았던 전 교수는 올해 초 통일부가 설립한 민관 협력기구이자 통일부 장관 정책 자문기구인 ‘통일미래기획위원회’에 사회문화 분과위원으로 또다시 참여했다. 한반도 평화와 민족 번영을 위한 중장기 구상(신통일미래구상) 수립과 윤석열 정부의 대북 기조인 ‘담대한 구상’ 등 통일미래 정책 개발 및 국내외 공감대 확산 등이 통일부가 밝힌 위원회 설립 취지다. 전 교수가 생각하는 위원회의 역할과 그동안 무슨 일을 했는지가 먼저 궁금했다.
북핵 보유 전제 ‘새로운 통일정책’ 세울 때
“정부의 통일정책을 시기별로 나누면 전두환 정부 때까지가 1기고, 노태우 정부부터 지금까지를 2기로 볼 수 있어요. 북한과 체제 경쟁을 하면서 북한과의 모든 교류를 법적으로 막다가 노태우 대통령 때 통일정책에 혁명적인 변화가 생기거든요. 국민이 북한과 접촉하는 것에 대해 막지 않겠다, 북한과 유엔 공동 가입 찬성한다, 북한과 적극적인 교류를 추구하겠다, 이건 완전히 코페르니쿠스적인 변화였던 거예요.
그런데 이제 또다시 결정적인 변화가 생길 수밖에 없는 시기가 온 것 같아요. 북한이 핵 개발을 완성하면서 이전까지는 핵이 없는 북한을 상대로 한 통일정책이었다면 이제는 핵을 갖고 있는 북한에 대해 새로운 통일정책을 세워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게 현 정부의 문제의식인 거죠. 바로 이 ‘신통일미래구상’을 만드는 일이 위원회의 1차 목표라고 볼 수 있어요. 우리 분과에서는 종교계, 문화계 등 다양한 사회문화 분야의 지도자와 전문가 그리고 시민들과 대화 프로그램을 진행해왔고, 앞으로도 계속 진행해나갈 예정입니다. 우리 국민이 북한과 통일에 대해 한번 깊이 성찰할 수 있도록 말이죠.”
‘통일은 치유’라는 게 전 교수의 지론이다. 6·25전쟁과 분단은 남북한 사회에 깊은 트라우마를 남겼고, 이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통일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남북관계는 2019년 2월 북·미 정상회담 결렬 이후 급속도로 경색된 상태에서 현 정부 출범 이후 더욱 악화돼가는 형국이다. 윤석열 정부가 내세운 담대한 구상이 이 같은 상황을 극복 가능한 새로운 통일정책을 담아낼 수 있을까?
“지금은 일종의 딜레마에 빠진 상황이죠. 우리 정부는 북한이 핵을 포기해야 신뢰하고 경제협력을 할 수 있다는 거고, 북한은 경제협력을 해줘야 신뢰가 쌓여서 핵을 포기할 수 있다는 거잖아요. 이 두 가지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는데, 북한이 핵 개발을 완성하면서 굉장히 복잡한 상황이 된 거예요. 핵 개발 이전이면 쓸 카드가 좀 있었을 텐데.”
- 딜레마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요?
“제 생각에는 한 세 가지쯤 돼요. 첫 번째는 정말 예상치 못한 ‘역사적 변수’가 나타나는 겁니다. 핵무기 최대 강국이었던 소련이 붕괴할 거라고는 아무도 예상 못 했거든요. 독일 통일도 그랬고요. 남북이 지금과 같은 구도 속에서는 통일은 굉장히 어려워 보이죠. 하지만 분명히 역사적인 변화의 순간이 잠시 열리는 때가 올 거라고 저는 믿어요.
두 번째는 남북한이 차원이 다른 새로운 공동의 적을 만나면 이 딜레마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이 열릴 가능성이 있다고 봅니다. 예를 들어 코로나19보다 더욱 강력한 전염병이 돌거나 가뭄과 홍수 등 기후재난이 한반도를 덮친다면 남북한이 공동으로 대처해야 할 상황이 반드시 생길 겁니다. 지금도 철새들이 옮기고 있는 아프리카돼지열병과 말라리아와 같이 함께 해결해야 할 보건의료 문제가 많아요.
세 번째는 조금 결이 다른데, 남북 갈등에 앞서서 남남 갈등 해결을 위해 여러 가지 행동과 사고, 인식의 변화를 우리가 먼저 시도해보고 훈련받을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사실 남남 갈등도 해결 못 하면서 남북 갈등을 해결하겠다고 나서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인 거예요. 우리 스스로 먼저 변화하고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를 해결하면 남북관계는 의외로 쉽게 풀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인도주의적 지원 카드는 계속 필요
- 경색된 남북관계를 풀기 위해 인도적인 차원에서 경제적 지원이 필요하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요?
“이게 이론적으로는 맞는데 현실적으로는 굉장한 갈등 요소를 갖고 있어요. 북한의 식량난과 보건의료 체계의 붕괴는 북한 정권이 핵과 무기 개발에 엄청난 국가재정을 쏟아부으면서 발생한 것이거든요. 북한이 인민들을 쉽게 관리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만들어놓은 측면도 있어요. 만약 우리가 북한을 인도주의적으로 지원해준다면 간접적으로 북한의 핵과 무기 개발을 돕는 일처럼 될 수 있어요. 우리가 준 식량이나 의약품들이 정말 절박하게 필요한 인민들한테 가지 않고 이미 차고 넘치는 고위층과 군 간부에게만 돌아간다면 과연 제대로 돕는 게 맞느냐, 이게 딜레마예요. 그럼에도 우리가 인도주의적 지원에 대한 카드는 계속해서 내놔야 해요. 북한과 마주 앉아서 얘기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중요한 남북관계 형성 과정이니까요.”
전 교수는 대북정책을 ‘엄격한 원칙하에 최대한의 유연성’을 갖고 펼쳐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그렇다면 현 정부의 대북정책 기조에 변화가 필요하다고 보는 걸까?
“닉슨 대통령은 미국 역사상 가장 극우 대통령이었어요. 닉슨이 반공주의자라는 걸 전 미국 국민이 알고 있었죠. 그런 닉슨이 중국과 수교에 나섰을 때 미국 국민에게 굉장한 안도감을 줬어요. 만약 진보적인 성향인 케네디가 움직였으면 오히려 비난을 받고 정치적으로 위험해졌을 수도 있죠. 현 정부가 그 어느 정부보다도 대북 문제에서 보수적이라는 것은 천하가 다 알고 있는데요. 그 기조를 유지하면서도 북한과 대화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 평화를 중시했던 문재인 정부 시절의 대북정책에 대해서는 어떻게 평가하나요?
“평화와 인권이라고 하는 두 개의 축은 철저한 균형이 필요해요. 어느 한쪽에 치우치는 순간 다른 쪽에 문제가 생기기 때문에 양쪽 다 강력해야 돼요. 평화를 위해 인권 문제를 제기하지 않거나, 인권 문제를 제기하면서 평화에 대해 고려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한반도 전체를 위험한 상황으로 만들 가능성이 커요. 아주 힘든 외줄 타기와 같은 일이죠. 그래서 정말 국가적인 지혜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이 저렇게 살다 죽는 것 마음 아파”
전 교수는 최근 연세대 통일보건의료센터에서 함께 활동해왔던 의·치과, 약학과, 간호학과 등 각 분야의 교수들과 함께 ‘통일보건의료의 미래’라는 책을 펴냈다. 기존 데이터를 분석한 것이 아닌 1996년부터 2020년까지 탈북민 중 의료인 19명, 비의료인 20명을 선정해 인터뷰한 결과를 토대로 정밀 분석한 연구 결과물이다. 전 교수가 파악한 북한의 보건의료 시스템은 이미 오래전에 붕괴된 상태다.
“다른 영역도 마찬가지지만 보건의료 영역은 평양과 비평양의 차이가 더 심합니다. 보건의료 국가 자원의 70%는 평양에 모여 있고, 30%가 도청 소재지 정도의 흩어져 있어요. 그 외에는 거의 아무것도 없어요. 정말 이게 21세기의 보건의료 상황이 맞나 싶을 정도로 어렵고 비참한 상황이죠. 탈북한 북한 의사들은 평양에 지원하는 거는 결사반대예요. 지금 북한의 지역 인민들이 겪고 있는 비참함을 아니까. 너무 많은 사람들이 죽지 않을 수 있는 병으로 죽어가고 있는 거예요.”
- 북한 정부가 이렇게 방치하는 이유가 뭘까요?
“국가 예산을 보건의료 쪽에 투입을 안 하는 거죠. 건강한 사람들만 데리고 국가를 운영해도 된다는 생각을 하는 것 같아요. 열외가 되는 사람들을 위해서 국가에서 돈 쓸 생각이 아예 없는 거죠, 사회주의 국가는 무상 식량 공급, 무상 의료, 무상 교육, 이것이 3대 축을 가지고 운영된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북한은 지금 식량 배급이 없어진 지 몇십 년 됐고, 무상 의료 시스템마저 붕괴돼 이제 북한에서는 돈 없으면 죽을 수밖에 없어요. ‘인간이 저렇게 살다 저렇게 죽는 저런 나라를 저렇게까지 오랫동안 놔둬야 되나’라는 생각에 너무 마음이 아픕니다.”
결국 북한 정권의 근본적인 변화 없이는 그 어떤 대북 지원도 의미가 없는 상황인 셈이다. 전 교수는 남북 분단으로 붕괴된 민족·공간·이성 공동체를 회복해야 비로소 통일 논의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바탕 위에 한반도 공동체를 만들어가야 한다는 것이 그가 생각하는 통일 해법이다.
“남북한이 언어와 문화, 역사를 공유한 최인접 국가로서 공동의 평화와 번영이 필요하다는 것을 서로 인정하는 것이 첫 번째 관건이에요. 그게 되면 한반도 공동체를 만들어갈 수 있어요. 경제 공동체, 문화 공동체, 교육 공동체, 복지 공동체, 안보 공동체, 최종적으로 정치 공동체를 하게 된다면 그게 바로 통일 되는 거죠. 남북한이 공동으로 할 수 있는, 아주 작은 것부터라도 하나씩 이뤄나갔으면 하는 게 제 바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