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탈주민 정착 이야기
회고록 펴낸 탈북민
가야금연주자 한수애
사랑으로 국경 넘고
이념 극복했어요
“사람에게는 세 번의 기회가 있대요. 첫 번째 사랑의 기회는 놓친 걸로 하겠습니다. 오빠는 정말 좋은 사람이에요.”
한수애(32) 씨가 7년 전 기억을 더듬으며 떠올린 지금의 남편에게 이별을 고하던 장면이다. 그날 한 씨는 남자와의 연애에 종지부를 찍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이 그를 잊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2016년 지금의 남편을 따라 한국에 온 지 7년 만인 2023년 2월 한 씨가 회고록 ‘수애(壽愛) 목숨 건 사랑’(새문사)을 들고 세상에 나왔다. 차갑지만 포근하고, 쓸쓸하지만 아련한 겨울 초입에 만난 한 씨의 얼굴은 상기돼 있었다.
평양시 만경대구역 출신으로 군인 부모 사이에서 성장한 유복한 유년기, 한류 문화와 시장경제를 자연스럽게 접한 장마당 세대 특성, 대외봉사원 양성소 교육 시스템, 외화벌이에 동원되는 북한 젊은 여성들,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표방했으나 철저한 계급사회인 북한의 이중성, 외국 파견 근무를 통해 알게 된 대한민국 실상 등 한 씨가 들려준 평양 이야기는 기괴하다 싶을 만큼 낯설었다. 그러나 연인을 따라 어떤 희생도 불사하겠다는 청춘의 애절한 열애는 남과 북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북한 여성들의 ‘꿈’ 캄보디아 북한 식당
“제 이야기를 세상에 알리기 시작한 것은 3~4년 됐어요. 북한에 남아 있는 가족에게 괜히 불똥이 튈까 봐 그동안 외부에 저를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지냈습니다. 그런데 북에서는 진즉에 저의 탈북과 대한민국 입국 사실을 알고 있었더라고요. 곰곰이 생각해보니까 내가 숨어 살 필요가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내 재능과 특기를 다방면으로 뽐내며 적극적으로 활동함으로써 북한에 남아 있는 가족을 지켜야겠구나 생각했죠.”
한 씨 부모가 그에게 적극적으로 권유한 것이 대외봉사원 양성소 선발 심사였다. 대외봉사원 양성소는 해외 북한식당 종업원을 양성하는 일종의 사관학교로, 봉사원 교육을 약 2년 6개월 동안 받게 된다. 북한은 외화벌이 사업을 위해 중국, 러시아, 베트남, 라오스, 유럽 등에서 국영 식당을 운영한다. 해외여행이 자유롭지 않은 북한에서는 외국에서 근무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일종의 특권이다.
대외봉사원의 의무 근무기간은 총 4년. 그 기간이 만료되면 연장은 불가능하다. 대외봉사원은 의무 근무기간이 끝나 북한으로 돌아오면 24~25살 나이에 좋은 배우자를 만나 결혼하는 것이 일반적 수순이다. 출신 성분과 당성을 인정받은 선택받은 계층만이 선발될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춤과 노래 등 재능도 겸비한 대외봉사원은 북한에서 일등 신부감인 셈이다.
탈북 전 캄보디아 프놈펜 북한 해외식당에서 대외봉사원으로 근무하던 한수애 씨 당시 모습. (한수애 제공)
대외봉사원 선발 조건은 상당히 까다롭다. 예술계 학교나 전문대학을 졸업한 출신 성분이 좋고 사상 검증도 마친 20대 초반의 여성이어야 한다. 키 163cm 이상, 매끈한 종아리, 수려한 외모에 뛰어난 노래와 춤 실력은 물론 연주 가능한 악기를 한 개 이상 다룰 수 있어야 선발을 기대해볼 수 있다. 한 씨는 “양성소에 모인 여성들은 대개 미모와 재력이 상당한 이른바 ‘금수저’ 집안의 딸들이다 보니 내심 불합격을 예상했지만 합격 소식을 전해 듣고 깜짝 놀랐다”고 말했다.
합격했다고 해서 곧바로 해외 북한식당으로 파견 근무를 나가는 것도 아니다. 파견 국가 대부분이 자본주의 체제를 택하고 있어 최소 1년 동안 북한에서 사상 교육 등 정신 무장 교육과정을 철저히 거쳐야 한다. 예비 대외봉사원들은 각지에 파견될 나라별로 조를 나눠서 혹독한 교육을 받는다. 대외봉사원들 사이에서 가장 인기 높은 근무지는 캄보디아 프놈펜과 시엠립에 있는 북한 해외식당이다. 한 씨는 프놈펜 북한식당에서 근무했다.
“저와 같은 장마당 세대는 어려서부터 자연스럽게 자본주의 체제를 경험했잖아요. 장마당을 통해 중국에서 몰래 들여오는 CD, USB를 구해 한국 드라마와 영화, 가요를 접할 수 있었고요. ‘한국 드라마를 안 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본 사람은 없다’는 우스개가 있을 만큼 한류 문화의 인기가 대단해요. 캄보디아에는 한국 사람들이 자주 여행 오는 데다 거주하는 사람도 많다 보니 북한식당 고객 대부분이 한국인이죠. 대외봉사원은 이들을 응대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한국 문화를 접해볼 수 있어요. 남한에 대한 원초적인 호기심을 충족시켜주기에 충분해 캄보디아는 북한 젊은 여성들이 상당히 선망하는 근무지랍니다.”
프놈펜의 해외 북한식당은 평양냉면을 비롯한 한식을 주로 판매한다. 종업원들은 고객 응대는 물론 매일 저녁 전통부채춤부터 한국의 유행가까지 춤과 노래가 어우러진 공연을 시작한다. 한 씨도 자신의 특기인 가야금과 베이스 기타를 활용해 노래와 춤 실력을 뽐냈다. 한 씨는 “얼굴이 비슷하고 한국말이 통하는 북한 여성들의 공연에 한국인 손님들이 한민족이라는 동질 의식에 감탄하며 크게 환호했다”고 말했다.
“남자가 저렇게 덜덜 떨어도 되나 싶었어요”
한 씨가 북한 해외식당에서 근무하며 가장 힘들었던 부분은 폐쇄적인 공동생활이다. 이곳 북한 여성들은 식당 휴일에도 항상 네다섯 명 이상이 무리지어 다녔다고 한다. 남한 사람 등 외부인과 개인적으로 접촉하며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다 보면 당에 대한 충성심과 주체사상이 자칫 흐려질 수 있다는 지도부 판단에 따라 북한 여성들이 서로를 감시하는 시스템이 일상 생활화됐던 것. 이러한 통제 방식에도 대외봉사원 근무 3년 차에 접어들면 자본주의 시장경제에 조금씩 젖게 된다.
“북한 식당에는 단골손님들을 배려하기 위해 하나같이 별도로 조성된 방이 있어요. 방을 찾는 손님 대부분이 음식값과 별개로 팁을 주니까 연차 높은 대외봉사원들이 응대도 하고 악기 연주도 해요. 일종의 자본주의식 마케팅 전략이 가미된 셈이죠. 자본주의 국가에서 온 부유한 사람들을 수시로 접하고 개인의 삶이 자유로운 캄보디아에 살다 보면 자연스레 돈과 자유의 위력을 실감하게 됩니다. 특히 북에서 전해들은 것과는 전혀 다른 한국인의 높은 생활수준을 깨닫고 놀랄 때가 많아요. 반지르르한 얼굴에 고급스러운 옷을 입은 한국인을 보며 저 스스로 철옹성 같은 견고하고 거대한 사상의 벽에 금이 가며 조금씩 허물어져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한 씨 인생의 돛을 전혀 다른 방향으로 돌린 사건은 그쯤 발생했다. 이 식당 단골손님인 한국인 남성이 한 씨 외모에 반해 비밀 연애를 청한 것이다. 한국의 한 건설회사 캄보디아지사에서 일하던 그 남자는 거의 매일 직장 동료들과 이 식당을 찾았다. 그런데 그날은 홀로 식당을 방문했고, 방으로 들어간 그는 손을 덜덜 떨고 있었다.
“처음엔 남자가 저렇게 덜덜 떨어도 되나 싶었어요. 그러더니 자신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막 하는 거예요.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말해주고 싶어 했어요. 그이가 귓속말로 ‘나와 100일 연애할래요?’라며 고백하더라고요. 남자가 거의 매일 식당에 왔는데 처음엔 저 보러 온 건지 몰랐죠. 북한식당에서 저임금으로 착취를 당하고 선배들로부터 괴롭힘까지 당하면서 힘들게 일할 때 그가 저를 위로하며 갖은 선물 공세를 하며 ‘직진’했어요. 저도 이내 마음을 열었죠. 그런데 얼마 후 그이가 한국으로 돌아간다며 ‘나와 같이 한국으로 갈래요?’라고 탈북을 권했고요. 하지만 북한식당 직원들의 삼엄한 감시망에 겁이 나고 북한에 남은 가족들이 보위부에 끌려갈까 봐 걱정돼 이별을 고했어요.”
그를 떠나보내고 한 씨는 하염없이 울었다. 북한으로 돌아가면 다시는 그곳을 빠져나오지도 못하고 사랑하는 남자와 영원히 이별하게 되는 데다 자본주의 체제에 익숙해진 자신이 굶주림을 걱정하며 고생하는 삶을 살 수 있을지 걱정이 됐다. 날이 갈수록 점점 남자가 보고 싶어지자 탈북을 하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해졌다. 식당 손님의 스마트폰을 빌려 남자가 알려준 연락처로 전화를 했다. 한 씨가 “당신이 보고 싶다. 한국으로 같이 가고 싶다”고 말하자, 다음 날 남자가 한국에서 캄보디아로 날아왔다. 한 씨는 남자가 계획한 납치를 빙자한 탈출극으로 무사히 북한 식당을 빠져나왔고, 태국을 거쳐 대한민국으로 입국하는 데 성공했다.
현실판 ‘사랑의 불시착’ 장본인
한 씨가 회고록을 집필하면서 택한 책 제목은 ‘壽愛 목숨 건 사랑’이다.
“저는 사랑을 위해 국경을 넘고 이념을 극복한 경우잖아요. 현실판 ‘사랑의 불시착’ 장본인이라고 해야 할까요. 북한식당 근무 당시 시어머님이 저를 찾아와 ‘너를 딸로 삼겠다. 한국에 와서 자유롭게 살자’며 손을 내밀어주셨어요. 저를 받아준 가족과 대한민국이 고맙고, 국민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품고 살기에 제목에서라도 당시 제 마음을 보여드리고 싶었죠.”
한수애 씨가 올해 2월 펴낸 회고록 ‘수애 목숨 건 사랑’ 책 표지. (한수애 제공)
한국에 도착한 지 몇 년 뒤 자신의 탈북으로 평양에서 특권층이었던 부모가 평양 밖으로 추방돼 모진 고생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한 씨는 절망했다. 동시에 한국 생활을 통해 북한 체제의 불의와 모순을 알게 된 뒤 김씨 일가에 충성한 삶에 깊은 회의감도 느꼈다. 한 씨는 배움을 통해 무의미하게 흘려보낸 20대 젊음을 만회하겠다는 생각에 경기대 연극영화과에 진학해 공부하고 있다. 자신의 탈북 스토리와 평양 이야기를 세상에 알리고 싶어 유튜브 채널 ‘옥토끼 한수애’도 개설해 사람들과 소통하고 있다. 가야금, 베이스 기타 연주 실력을 십분 살려 공연 무대에 오르기도 한다.
“한국 남자와 사랑에 빠져 자유와 자본주의의 맛을 보지 않았다면 북한으로 다시 돌아갔겠죠. 인생은 자유를 몰랐을 때와 알았을 때로 갈라지거든요. 앞으로도 내 몫을 하면서 대한민국 국민 한 사람으로서 살아갈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