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통일 Vol 2062023.12.

북한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은 2021년 1월 1일 “송년의 12월 31일 밤 수도 평양에서는 신년경축공연이 성황리에 진행되었다”면서 관련 사진을 공개했다.
사진은 신년경축공연이 펼쳐진 김일성광장. (평양 노동신문=뉴스1)

평화통일 창

북한 송년회와 연말 풍경

‘반동사상문화배격법’ 때문에
한국 노래 사라져

북한에선 송년회를 ‘망년회(忘年會)’라 부른다. 망년회는 일본식 표현으로, 우리도 과거 망년회라고 했다가 이후 순화된 표현으로 송년회로 바꾸었을 뿐이다. 송년회든, 망년회든 술 먹고, 노래 부르며 논다는 본질에 있어 남북의 연말 풍경은 별반 차이가 없다.

우리 민족이 어떤 민족인가. 5세기 편찬된 ‘동이열전’에서도 우리 민족에 대해 ‘술 마시고 노래하며 춤추기를 좋아한다’고 적고 있지 않은가.

연말이 되면 북한 도시와 마을들에선 술에 젖은 노래 소리가 곳곳에서 울려나오고, 길에 흐느적거리는 남자들이 늘어난다. 다만 서로 다른 체제와 경제적 환경에서 오랫동안 살다 보니 남과 북의 송년 풍경은 비슷하면서도 다른 점이 있다. 북한의 망년회는 한국보다 훨씬 더 철저하게 술에 집중한다. 술을 먹기 위해 모인다고 보면 된다. 모임 준비에서 제일 먼저 예산을 배분하는 것이 술값이다. 안주는 술을 사고 난 뒤 형편에 따라 고기를 준비할 수도 있고, 형편이 안 되면 콩나물이나 김치로 때울 수도 있다.

돈이 많은 간부들은 중국 고량주나 맥주를 사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장마당에서 파는 밀주를 산다. 맥주는 북한에서 마시기 어려운 주류로 평양이나 대도시 부유층이 주로 소비한다.

“오늘 내가 샀으니 내일은 네가”
술은 돈이다. 돈이 많은 사람은 망년회를 자주 가진다. 12월에 최소 보름은 망년회를 핑계로 술을 마신다고 보면 된다. 그러나 돈이 없으면 모이는 것 자체가 부담스럽다. 요즘 망년회는 친구끼리 모이는 것이 가장 일반적이다. 경제적 형편이 비슷한 사람들끼리 “오늘 내가 샀으니 내일은 네가 내라”는 식으로 돌아가며 진행되는 것이다.

과거엔 직장 단위로 망년회가 진행됐지만, 시간이 갈수록 이런 현상이 사라지고 있다. 직장에서 월급도 배급도 받지 못하니 각자 장사를 하며 살 수밖에 없고, 그러다 보니 조직이란 개념이 점점 희미해지는 것이다. 물론 평양에서 좋은 직장 다니는 사람들은 여전히 부처별로 모인다. 돈을 버는 직장이라면 따로 망년회용 예산을 떼어놓고 준비하지만, 아니라면 각자 비용을 걷는 경우도 많다.

백두산 들쭉술’을 들고 있는 북한 주민들 모습. 백두산 들쭉술은 백두산에서 자라는 진달래과 들쭉나무 열매인 들쭉을 주원료로 해 만든 술로 알려져 있다.
(평양 노동신문=뉴스1)

북한의 망년회가 한국과 다른 점은 식당에서 거의 열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식당 숫자가 많지 않고, 또 비싸기 때문에 망년회는 거의 대부분 일반 가정에서 열린다. 직장 단위로 망년회를 가지면 주로 부처 책임자의 집이나 형편에 따라 소속원의 집에서 열린다.

술을 마실 때 밥상을 펴놓고 남자들은 일찍부터 술을 마시기 시작하지만, 여성들은 음식을 조달하느라 바쁘다. 한국의 과거 문중 제삿날을 떠올리면 된다. 음식이 다 만들어지면 여성들은 한쪽에서 따로 먹기 십상이다. 건배사는 “무엇을 위해 건배” 정도가 일반적이다. 과거엔 ‘혁명적’ 건배사가 많았지만, 이젠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대신 “아무개의 건강을 위해 건배”, “아무개가 부자 되길 기원하며 건배” 하는 식으로 돈과 건강과 관련된 건배사가 많아졌다.

한국 여성들이 북한 망년회에 참가했다면 끝까지 버티기 어려울 것이다. 북한에선 망년회뿐만 아니라 술판이 벌어지면 음담패설이 쉴 새 없이 이어진다. 술판이 길어질수록 점점 수위가 높아져 한국 기준으론 성희롱에 해당하는 발언이 쉴 새 없이 이어진다. 이런 일이 만성화되다 보니 여성들이 얼굴을 붉히면서도 그 자리를 뜨진 않는다. 오히려 나이 든 여성 중에는 남자보다 더 음란한 말을 하는 사람이 많다. 성희롱이 술안주인 것이다. 술을 먹고 당과 수령을 언급했다간 언제 잡혀갈지 모르니 북한 사람들은 성적 농담으로 스트레스를 푼다.

‘망년회 금지’ 한두 해 지나자 흐지부지
두세 시간 열심히 먹고 배가 부르면 그때부터 노래를 부르는 ‘오락회’가 시작된다. 북한에는 노래방이 거의 없기 때문에 밥을 먹은 집에 눌러앉아 녹음기를 켜놓고 따라 부르거나 기타 반주에 맞춰 돌아가며 한 곡씩 뽑는다.

직장 망년회면 대체로 북한에서 공인된 노래를 부르지만, 친한 친구들과 마주 앉으면 얘기가 다르다. 과거엔 한국 노래를 많이 불렀다. 특히 젊은 층 사이에선 한국이나 외국의 노래를 여러 개 정도는 필수로 알아야 ‘노는 축’에 꼽혔다. 하지만 2020년 12월 북한이 ‘반동사상문화배격법’을 채택한 뒤로는 한국 노래를 거의 부르지 못한다. 남한 말투를 따라 했다고 감옥에 넣는 판에 노래 한 곡을 불렀다가 목숨을 내놓을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2000년대 들어 북한 당국이 ‘망년회를 하지 말라’는 지시를 몇 차례 하달하기도 했다. 당, 근로단체 조직, 생산단위를 제외한 사적 모임을 엄격히 금지하는 북한은 주민들이 ‘동창회’나 또는 지역 연고에 따라 모이는 것을 원치 않는다. 그런데 누구보다 가장 잘 먹고 노는 사람들이 단속을 담당해야 하는 간부들이다. 이들부터 망년회를 하지 말라고 하면 불만이 크다. 그러니 망년회를 하지 말라는 지시는 보통 한두 해가 지나면 흐지부지되곤 한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지난 3년 동안 망년회를 하지 못했던 북한 주민들은 올해 연말엔 모처럼 춤추고 노래 부르고 싶었던 욕구를 어느 정도라도 해소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주 성 하 동아일보 기자·
민주평통 상임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