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통일 Vol 2062023.12.

4·3항쟁 75주년 기념 4·3예술 교류전’에서 얼굴 없는 화가 선무가 관람객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예술로 평화

탈북민 작가의 풍자展 ‘분단 속에서’

“이념의 벽 넘어 자유와
평화의 가치 알리고 싶어”

제주도 제주시 삼도동은 볼거리, 먹을거리, 놀 거리가 많아 데이트 명소로 소문난 곳이다. 4차선 도로 양옆으로 카페, 레스토랑, 공방, 팝업 매장, 뷰티숍 등이 즐비하다. 모던한 정취를 자아내는 도회적인 건물 사이로 몇몇 갤러리가 웅크리고 있다.

자본주의 문화의 세련미가 버무려진 이곳에서 한 얼굴 없는 작가의 전시회가 열렸다. 10월 24일부터 11월 9일까지 포지션 민 제주에서 열린 탈북 작가 선무(線無·51)의 ‘분단 속에서’다. 제주4·3기념사업위원회가 주최한 ‘4·3항쟁 75주년 기념 4·3예술 교류전’의 첫 번째 초대전이다.

선무는 북한에 남은 가족들이 피해를 보지 않도록 실명과 얼굴을 공개하지 않은 채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작가명 선무는 ‘선이 없다’는 뜻으로, 휴전선이자 남북을 가로막는 정치적, 이념적 경계선을 지우고 싶다는 희망을 담은 이름이다.

선무는 북한에서 선전·선동의 도구로 활용되는 프로파간다(propaganda) 미술을 배워 그림을 그리다가 1998년 10월 두만강을 건너 탈북해 라오스와 태국을 거쳐 2001년 말 한국에 정착했다. 2007년 첫 전시회를 선보인 이래 지금까지 한국을 비롯해 미국 뉴욕·로스앤젤레스(LA), 호주 멜버른, 독일 베를린·뮌헨·뒤셀도르프, 중국 베이징 등에서 50차례 넘게 전시회를 열었다.

북한 체제에 대한 풍자
선무의 작품은 북한 정치 선전물을 연상시키는 강렬한 색채와 큼직한 한글 문구로 채워져 있다. 하나같이 북한 체제에 대한 풍자와 자유와 평화에 대한 염원이 담겨 있다. 붉게 타오르는 하늘 한가운데 보름달이 해처럼 떠 있고 끊어진 철조망 사이로 새 한 마리가 날아가는 ‘붉은 노을’, 평양 김일성 광장을 가로지르는 장갑차 앞을 한 소년이 막아서는 모습을 그린 ‘안 돼’ 등이 그의 대표작이다.

“오늘날은 미국도 가고 유럽도 가고 우주까지 다 갈 수 있는 시대다. 남과 북은 서로 오갈 수 없는 비극이 지속되고 있다. 자자손손 대대로 오가던 길이 가로막혔으니, 이 얼마나 분통한 일이 아니겠는가.”

낮지만 강단 있는 목소리다. 그가 독립투사처럼 결연한 어투로 작품 ‘나의 바램’에 대한 설명을 덧붙였다.

붉은 노을, 91×72, 2022

안 돼, 116×91, 2018

“분단과 전쟁으로 생긴 아픔과 상처를 안고 이념 대결을 해온 지도 70년이 흘렀다. 남과 북이 서로 평화와 교류를 실현하는 것이 함께 잘사는 길이 아닐까 싶다.”

그는 최근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전쟁에 따른 국제사회 대치 국면에 대해 무척 안타까워했다.

“아직도 남과 북은 전쟁 상태다. 휴전했을 뿐이다. 전쟁은 남북이 같이 죽게 만들 것이다.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을 바라보며 결코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면 안 된다는 걸 다시 한번 느낀다.”

황해도 태생인 그가 탈북을 시도한 건 자유를 찾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머릿속에는 오직 배고픔을 해결하려는 생각뿐이었다. 중국에 거주하는 친척을 만나 돈이나 물건을 건네받으러 두만강변까지 올라가 연락을 시도했다. 그런데 그의 친척이 국경 감시가 강화돼 지금은 위험하니 북으로 돌아가라고 했다. 그는 여기까지 온 김에 강을 건너보자는 생각으로 무작정 두만강을 건넜다. 중국에 도착하고서야 북한 체제의 허상을 깨달았다. 그곳에서 불법체류자 신세를 벗어나려면 남한 국적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알고 독한 마음을 품었다. 라오스를 거쳐 태국에 머물 때 선교사의 도움으로 대한민국에 입국했다.

다른 세계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 담아
2007년 홍익대에서 회화를 공부하고 2009년 동 대학원 회화과를 졸업했다. 이념으로 가로막힌 안타까운 남북 현실을 그리는 데 집중했다. 이번 전시에도 한반도의 현실이 회화예술로 오롯이 담겼다.

‘선을 넘어’는 작은 틈 사이로 빼꼼히 내민 두 눈동자를 통해 화가 자신이 두만강을 넘어 처음 다른 세계를 마주했을 때 느낀 두려움과 공포를 그대로 담았다. ‘표말(푯말)’은 군사분계선 푯말 위에 나란히 앉은 빨갛고 파란 새들을 통해 이념의 벽을 넘어 자유롭게 넘나들기를 바라는 마음을 표현한 것이다. ‘걸레질’은 세상에 있는 이념을 모조리 지우고 싶은 화가의 마음이 투영된 작품이다.

남북의 미래와 평화를 염원하는 작가의 메시지는 한반도를 넘어 전 세계로 향한다. 소년과 소녀가 군사분계선을 밟은 채 ‘우리의 미래 남북 교류’가 새겨진 곳을 향하고 훌라우프 안에서 웃으며 함께 놀자고 외친다.

분단이라는 현실 속에서 자유와 평화를 바라는 선무의 마음은 75년 전 남한만의 단독 선거를 반대했던 제주도민들의 마음과도 맞닿아 있다. “남과 북이 작은 땅에서 계속 싸우기보다는 평화롭게 교류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제주 4·3항쟁 75주년을 맞아 제주에서 전시를 열었다”는 게 그가 전시에 참여한 이유다. 그의 목표는 세계적 화가다. 이념의 벽을 넘어 북한 인민뿐 아니라 전 세계 사람들에게 평화의 가치를 알리고 그들의 희망을 지지해주는 화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