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시대 Vol 1732021.03

특집


미·중 전략경쟁으로
흔들리는 동아시아,
한반도 평화로
안전한 질서 만들어야



올해는 1951년 9월 8일 연합국과 일본 사이에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체결된 지 70년이 되는 해이다. 이 조약은 전후 동아시아 질서의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고 이에 따라 동아시아 질서는 ‘샌프란시스코체제’라는 개념으로 설명되곤 했다. 그러면 샌프란시스코체제는 무엇을 의미하며, 작금의 동아시아 질서 변화를 설명하는 데 어떤 의미가 있을까?


미·일동맹의 뿌리가 된 샌프란시스코체제
   샌프란시스코체제는 좁은 의미와 넓은 의미로 나누어 이해할 수 있다. 전자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과 직접 연관성이 있는 요소들에 초점을 맞추며, 이때 샌프란시스코체제는 미·일동맹체제와 거의 동일한 의미를 갖는다. 독일에 전쟁 책임을 묻는 방식으로 전후 처리가 진행된 유럽과 달리 미국은 동아시아에서 한국, 중국 등이 참여하지 않은 채 체결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으로 전후처리를 마무리하고, 일본과의 동맹을 중심으로 동아시아 전후 질서를 구축해 갔다. 그 결과 일본에 전쟁책임을 제대로 묻지 않고, 일본이 점령했던 영토(독도,오키나와, 쿠릴열도 등)의 귀속 문제를 모호하게 처리해 동아시아 국가들 사이의 갈등 요인을 남겨 놓았다. 이는 지금도 동아시아 지역 협력을 촉진하는 데 중요한 장애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반면 미국이 동아시아에서 전략적 위치를 강화하는 데는 유리하게 작용하고 있다.

   그런데 샌프란시스코체제는 이보다 더 넓은 의미로, 즉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의 내용과 직접적인 관계는 없지만 이 조약의 체결 과정과 역사적 연관성을 가지는 요소들까지 포함해 정의될 때 동아시아 질서의 전체상을 더 잘 보여준다. 한미상호방위조약, 미·대만상호방위 조약 체결 등은 유럽에서의 미·소 냉전 개시, 중국의 공산화, 한국전쟁 등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의 주요 배경이 된 요인에 따른 직접적 결과라는 점에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논리의 연장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요소까지 포함해 샌프란시스코체제의 특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미국이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사회주의 진영의 영향력 확장을 저지하는 것을 목적으로 구축된 안보체제이다. 둘째, 이 안보체제는 미국이 여러 국가들과 양자동맹을 체결하고 자신을 중심으로 동맹들을 연결시키는 방식으로 구축되었다. 여기서 미·일동맹이 다른 동맹보다 더 중요한 전략적 가치를 가졌다. 셋째, 전후 처리가 철저하게 진행되지 않으면서 역사 문제, 영유권 갈등 등이 불씨로 남아 발생한 대립과 적대가 이러한 안보체제가 형성되고 강화되는 동력을 제공했다

  1990년대 초반 냉전체제가 해체됨에 따라 사회주의 팽창을 저지한다는 목표는 그 의미가 퇴색되었지만 그렇다고 대립과 적대의 구조를 청산하는 새로운 질서가 형성되지는 않았다. 냉전체제의 다른 요소들은 큰 변화없이 지금까지 계속 동아시아 질서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여기에 한반도 분단과 북핵 문제가 샌프란시스코체제를 뒷받침하는 주요 요인으로 작용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이유로 한반도 평화프로세스의 진전과 함께 샌프란시스코체제 극복이 주요 과제로 제기되었던 것이다. 즉 한반도 평화프로세스는 적대와 대립을 넘어서는 새로운 동아시아 질서의 구축을 지향해야 하며, 그럴 때만 한반도 평화도 공고해질 수 있다.

미·중 갈등으로 흔들리는 샌프란시스코체제
   그런데 샌프란시스코체제의 변화를 불가피하게 만드는 변수가 출현하고 있다. 중국의 부상과 미·중 전략경쟁이 그것이다.

  동아시아는 냉전체제의 해체와 함께 큰 변동을 겪었던 유럽이나 중동 지역과 달리 비교적 안정적 상황이 유지되었고, 샌프란시스코체제도 큰 도전을 받지 않았다. 가장 중요한 원인은 미·중협력에 있다. 1960년대 후반부터 미·중 모두 소련을 자신의 안전과 이익에 가장 큰 위협으로 간주하기 시작했고. 1972년부터 소련의 팽창을 저지하는 것을 목표로 전략적 협력관계를 맺었다. 중국이 미국의 헤게모니적 지위를 인정하고, 미국은 ‘하나의 중국’이라는 중국의 요구를 수용한 것이 이 협력관계의 정치적 기초였다. 미·중관계가 샌프란시스코체제의 하위 요소로 편입된 것이다. 미·중협력은 1980년대 들어 중국의 개혁개방과 함께 더 심화되었고 2000년대 초반까지는 안정적으로 유지되면서 동아시아의 안정을 뒷받침했다. 다만 이 과정에서 한반도 분단 문제가 해결되지 못하고 북핵 문제가 악화된 것은 우리에게 매우 뼈아픈 결과로 남아 있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이 최근 10여 년 사이에 큰 변화를 겪고 있다. 무엇보다 중국이 빠르게 부상하면서 미국 우위라는 샌프란시스코체제의 전제가 유지되기 어렵게 되었다. 중국의 GDP는 2000년만 해도 미국의 12%에 불과했으나, 2019년에는 미국의 67%로 증가했다. 많은 연구기관들이 2030년 이전에 중국의 경제규모가 미국을 추월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중국 국방비는 미국의 40% 수준으로 군사력에서 미국과의 격차는 여전히 크지만, 중국은 군사자원을 자신의 핵심이익과 직접적으로 관계된 지역에 집중시킬 수 있다. 즉 동아시아에서는 군사적으로 다른 역내 국가들을 압도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미국과도 균형을 맞출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가고 있다.

  이와 같은 세력균형의 변화는 미·중관계를 경쟁관계로 변화시키는 구조적 요인으로 작용했다. 이 구조적 변화 속에서 미·중이 협력관계를 유지하려는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미국은 이를 위해 중국이 국제사회에서 ‘책임 있는 이익상관자(Responsible Stakeholder)’로 행동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중국은 이를 자신의 지위에 대한 합당한 존중 없이 미국이 주도하는 국제질서 유지에 대한 기여만 요구하는 것으로 간주했다. 중국은 핵심이익 존중을 기초로 협력관계를 발전시키자고 미국에 제안했지만, 미국은 핵심이익 존중이 중국의 입지를 지나치게 강화시킬 것을 우려하고 있다. 결국 미·중관계의 발전방향에 대한 합의가 만들어지지 않았고 갈등이 지속적으로 증가해 왔다. 2020년 들어 몇 가지 우연적 요소가 겹치며 미국과 중국이 무역, 기술, 지정학, 이념·제도 등 거의 모든 영역에서 대립하는 상황이 출현했고, 미·중 전략경쟁은 이제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지난해 11월 15일 청와대에서 세계 최대규모의 자유무역협정인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 서명식이 열렸다. ⓒ연합   

적대와 균열, 협력의 갈림길에 선 동아시아
  신냉전이라는 단어가 이제 더 이상 낯설지 않은 상황이며 샌프란시스코체제의 기초가 크게 흔들리고 있다. 무엇보다 미국의 힘의 우위가 약화되면서, 과거의 양자동맹을 느슨하게 연결시키는 방식만으로는 중국의 도전에 대응하기 어려워졌다. 미국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유럽의 NATO와 같은 집단 안보협력체제를 발전시키려고 하고 있다. 다른 국가들의 군사적 기여를 높이고 미국이 이 지역에 배치한 군사자원을 더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 하려는 시도이다. Quad(미국, 일본, 호주, 인도 등 4개국이 참여하는 비공식 안보협력체계)가 그 일환이다. 이는 동아시아 지역내의 균열과 적대를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샌프란시스코체제 2.0’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시도는 중국과의 대립을 심화시킨다는 문제를 초래한다. 과거 냉전 시기의 소련과는 달리 중국은 이미 세계와 깊이 연결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속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높다. 많은 나라들이, 심지어는 미국도 중국과의 대립이 자국 경제, 또는 기후변화 같은 지구적 차원에서 필요한 협력에 미칠 영향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즉 중국과의 전면적 대립을 전제로 작동하는 협력체계 구축은 그리 쉽지 않다. 이 점이 현재 국제질서의 변화를 ‘신냉전’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고 위험한 발상이라고 평가되는 중요한 이유다.

  어떻든 현재 동아시아는 적대와 균열을 심화시키는 방향으로 샌프란시스코체제가 재편될 것인가, 아니면 갈등과 경쟁 속에서도 협력적 기조를 유지할 수 있는 지역질서를 형성하여 샌프란시스코체제의 극복으로 갈 것 인가라는 갈림길에 서 있다.

지난해 10월 6일 미국, 일본, 인도, 호주 외교수장이 쿼드(Quad) 회의를 위해 모였다. ⓒ연합   
"최근 한반도 평화프로세스의 진전과 교착이
보여주는 것처럼 난관은 여전히 많다.
그렇지만 한반도 문제의 평화적 해결이
동아시아와 세계를 더 안전하게 만들 수
있다는 점에 대해 국제사회의 공감대를
넓힐 수 있다면 여러 난관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강화시킬 수 있다."

한반도 평화프로세스의 세계적 의미
   우리 사회에는 미·중 전략경쟁이 불가피해지는 상황에서 어느 한편을 선택하는 것이 불가피하다는 인식도 적지 않다. 그렇지만 미·중관계의 미래는 여전히 확실하지 않다. 그리고 이것이 전면적 대립으로 나아가는 것은 우리에게만이 아니라 지구적 차원에서도 매우 위험한 결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최소한 한국이 이러한 방향으로의 변화를 촉진하는 역할을 할 이유는 없다. 실제로 유럽이나 ASEAN도 양자택일이 아니라 자신의 원칙과 이익에 따라 미·중관계 변화에 대응하고 있다. EU가 미·중 갈등이 한창 고조되던 작년 12월 중국과 새로운 투자협정을 체결한 것이나, 11월 ASEAN과 한국, 일본, 중국, 호주, 뉴질랜드 등이 참여한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이 체결된 것 등이 이러한 흐름을 잘 보여준다. 국제사회 내 다양한 행위자들의 자율성이 냉전 때보다 훨씬 높아졌으며 국제질서를 냉전식 대립으로 나아가지 않도록 만들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

   무엇보다 한반도는 동아시아 질서의 변화에 큰 영향을 주는 변수다. 한반도가 어떤 방향으로 움직이는가에 따라서 동아시아에서 군사적 대립과 적대가 심화될 수도 있고, 반대로 새로운 지역 협력의 계기와 동력을 제공할 수도 있다. 후자는 미·중 전략경쟁의 주요 무대가 동아시아라는 점에서 동아시아 차원을 넘어서는 의미를 갖고 있다. 그리고 현재 국력을 고려하면 한국은 20세기 초반처럼 다른 강대국들의 선택을 수용해야만 하는 위치에 있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이고 중요한 역할을 할수 있는 행위자가 될 수 있다. 최근 한반도 평화프로세스의 진전과 교착이 보여주는 것처럼 난관은 여전히 많다. 그렇지만 한반도 문제의 평화적 해결이 동아시아와 세계를 더 안전하게 만들 수 있다는 점에 대해 국제사회의 공감대를 넓힐 수 있다면 여러 난관을 극복하는 힘을 강화시킬 수 있다. 특히 미국에서 새로운 행정부가 출범하고, 미·중관계가 중요한 고비에 들어서고,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70주년을 맞이하는 현시점에서 한반도 문제를 중심으로 동아시아의 협력에 대한 논의가 더 활발하게 진행될 필요가 있다


이남주 성공회대학교
중어중국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