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간기획
포스트 코로나 시대,
더 강한 민주주의를 향해
연간기획으로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한국 사회가
갈 길을 미래비전 차원에서 모색한다.
이번 호에서는 코로나19 이후 달라진 정치 지형과
한국 민주주의의 과제를 알아본다.
*본 기획은 대통령 직속 정책기획위원회와 협력하여 진행됩니다.
   미증유의 코로나19로 인해 일상이 달라진 지도 어언 1년이 넘었다.
각국은 코로나19를 통제하고 일상을 지키기 위해 사투를 벌이고 있다.
코로나19와의 싸움은 이제 단순히 보건·의료만의 문제가 아니고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수많은 분야에
큰 영향을 미치는 문제가 되었다. 코로나19는 각국의 총체적인 위기 대응 능력을 시험하고 있으며 전 인류의
문명사적 맹성(猛省, 매우 반성함)을 촉구하고 있다.
   코로나19는 우리의 생명과 건강에 중대한 위협을 제기한다.
동시에 코로나19는 ‘사회적 동물’인 인간의 집단적 삶에도 큰 위협을 주고 있다.
정치 영역에서의 집합 행동과 시민사회 영역에서의 결사체 활동을 심각하게 위축시키고,
인간공동체의 유지와 균형 있는 발전을 저해하고 있다.
코로나19로 심화된 민주주의의 후퇴와 위기
   이번 코로나19 사태에서 가장 눈에 띄는 점은 코로나19에 대한 세계 각국의 대응이 시점,
속도, 성격, 규모, 내용 등에서 상이했고 그 성과 또한 차별적이었다는 것이다.
장기화되고 있는 코로나19 상황은 각국의 역량과 한계, 강점과 약점을 여과 없이 노정하고 있다.
지금까지의 재난이 대부분 일부 국가에만 국지적으로 피해를 주었던 데 비해 코로나19는
220개국에서 발생하여 전세계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 거대 위기로서, 그러한 위기에 대한 각국의 제도적 전략과 정책적
대응을 비교 분석해 볼 수 있는 사회과학적 실례(實例)를 제공해 주고 있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선진국’이라고 숭앙(崇仰)하며 습관적으로 ‘벤치마킹’의 대상으로 말해 왔던
구미(歐美) 각국은 코로나19 앞에서 무력하고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였다.
미국, 영국을 비롯한 많은 민주주의 국가에서 정책의 혼란과 사회 분열이 목도되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 민주주의의 위기가 코로나19로 초래된 것은 아니다.
코로나19가 도래하기 오래전부터 많은 정치학자들은 민주주의의 후퇴와 위기를 지속적으로 경고하고 있었다.
  우선 민주화의 ‘제3의 물결’이 일던 1980~90년대와 비교해 2000년대 들어서면서 전 세계적으로 민주주의
국가의 숫자는 정체 혹은 감소하고 있었다. 권위주의 국가들은 강화되거나, 혹은 상당한 탄력성과 내구성을 뽐내며 건재했다.
반면 기성 민주주의 국가들에서는 권위주의로의 퇴행 혹은 민주주의의 잠식이 일어났다. 미국에서 트럼프가 대통령으로
당선된 이후 저명한 정치학자들은 민주주의의 ‘사망’ 혹은 민주주의의 ‘종언’을 공언하기에 이르렀다.
  한편 민주주의의 전 세계적 위축과 내부적 잠식은 ‘현존하는 대안’의 도전에 의해 심화되었다.
‘중국식 민주주의’ 모델은 능력주의(Meritocracy)를 표방하며 구미 민주주의의 선거가 배출해 내는 정치 지도자의 자질,
그리고 선거로 수립된 정부가 산출해 내는 정책의 효과성을 비웃고 있었다.
세계 여러 개도국에서 자본력을 앞세운 중국의 진출과 그 영향력의 확대는 구미 민주주의에
대한 대안으로서 ‘중국 모델’을 주목하게 만들었다.
독일의 리서치 업체가 지난해 전 세계 53개국 12만 4,000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코로나19 설문조사.
정부가 코로나19 대응을 잘했다고 평가한 비율이 높을수록 녹색을 띤다. ⓒDalia Research   
  이 같은 배경에서 코로나19의 급습은 기존 민주주의의 위기를 더욱 심화시켰고,
상대적으로 비(非)민주주의의 매력을 높이는 결과를 가져왔다.
구미 민주주의 국가들에서 리더십은 실종되었고, 정치권의 공방은 체제의 마비를 초래했으며,
정부의 늑장대응은 정책의 실효성을 저하시켰다. 게다가 마스크 착용을 둘러싸고 벌어진 소모적이고 지루한 논쟁,
시민의 비협조와 저항, 시민사회 내의 갈등은 결국 코로나19 위기를 통제 불가능한 수준으로 증폭시켰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중국은 비록 코로나19의 진원지라는 오명을 쓰기는 했지만 적어도 코로나19
대처에서는 신속했고, 과감했으며, 결과적으로 나름의 정책효과를 거두었다.
확진자와 사망자 숫자를 급감시켰고, 마침내 코로나19에 대한 ‘승리’마저 선포했다. 몇몇 나라에서는 중국을
벤치마킹이라도 하듯이 권위주의로의 움직임이 공공연히 진행되었다.
견제를 받지 않는 비상조치가 민주주의를 위협했고, 대통령이 무제한의 비상 권한을 확보했으며,
정부를 비판하는 시민과 언론인들이 법적 소송과 정부의 괴롭힘(Harassment)에 시달리기도 했다.
이렇게 구미 민주주의는 코로나19로 말미암아 그 위기가 더욱 깊어지고, 중국으로 대표되는 권위주의는
민주주의의 강력한 대안으로 급부상할 기세였다.
국가-시민사회 간 협업 위에 세워진 K-방역
  이 같은 상황에서 K-방역의 성공이 가지는 의의는 실로 크다.
한국은 단 한 번도 국경폐쇄나 지역봉쇄(Lockdown)에 의지하지 않고 민주성, 개방성, 투명성의 원칙을 고집하면서
비교적 성공적인 방역을 이끌어왔다.
세계 민주주의의 관점에서 본다면 한국은 민주주의의 전 지구적 퇴조를 막아낸
‘안전판(Safety Valve)’의 역할을 수행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K-방역의 성공을 칭송하며 한국이 ‘민주주의의 세계 대표 주자’ 역할을 수행한 것을 자축하기는
아직 섣부르다. 중국식 권위주의는 아니었는지 모르겠지만 우리나라에서도 발전국가(Developmental State)의
유산이 일정 정도 작동했던 것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우수한 공무원, 효과적인 정책 추진체계, 강력한 집행력을
자랑하는 발전국가의 모습은 코로나19 대처 과정에서 빛을 발했다. 그러나 발전국가의 ‘원조’ 격인 일본의
실패를 보면 발전국가의 유산이 유일하거나 결정적인 비결이라고 보기는 힘들 것이다.
지난 2월 26일 서울 금천구보건소에서 노인요양센터 요양보호사가 코로나19 백신을 접종받고 있다.
ⓒ연합   
  결국 한국에서 K-방역의 성공은 발전국가적 속성과 시민의 협조가 한데 어우러진 데 있었다고 추정해 볼 수 있다.
즉, 한국 모델이 표상하는 ‘민주주의적’ 코로나19 대처 모델은 권위주의 국가가 감시와 통제 위주로 방역을 주도하는
중국산(Made in China) 모델과는 판이한, 국가-시민사회 간 자율적 협력과 협업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헌신·희생하는 의료진, 정부의 더 나은 정책을 끊임없이 압박하는 ‘강한’ 시민사회, 정부 시책에 순응하는
높은 시민의식과 민도(民度) 등이 이번 성공의 진정한 비결이라고 할 것이다.
요컨대 성공은 ‘강한 국가’와 ‘강한 시민사회’ 간의 합작품이었다.
국가와 시민사회의 협업을 통해 이룩한 K-방역의 성공은 궁극적으로 ‘강한 민주주의(Strong Democracy)’의 비전을
꿈꾸게 한다.
  한편 이번 코로나19 대처 과정에서 정치권의 역할은 국가와 시민사회의 강력하고
급박한 공동 요구와 압력에 떠밀려 수동적, 소극적으로 입법과 예산안을 처리하는 것에 국한되었다.
그나마도 당파적 정쟁, 일관성 결여 등으로 얼룩져 전반적으로 코로나19 대처에 정치권이 기여한 바는 별로 없다고
해도 과장이 아니다. 즉, 코로나19 시대 정치의 위기는 부작위(不作爲)로 말미암은 위기다.
  
코로나19 사태로 앞당겨진 비대면 일상의 도래와 확산은 정치에도 일정한 변화를 불러일으켰다.
화상 공천면접, e-창당대회, 디지털 선거운동 등이 등장했고, 선거운동도 물리적 대중 동원을 중심으로
한 ‘세(勢) 과시’에 치중했던 방식을 벗어날 가능성을 보였다. 하지만 이러한 변화가 정당 구조의 변화,
나아가 정당체계의 변화로 이어질 조짐은 아직 별로 크지 않다. 게다가 코로나19가 ‘양극화의 정치’에 어떠한 구조적·장기적
영향을 미칠지 아직 예단하기 이르다.
지난 1월 8일 국회에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방역 실태 및 백신 수급 현황 점검을 위한
긴급현안질문이 열렸다. ⓒ연합   
포스트 코로나, 정치 분야 전반의 변화 필요
  우리가 지향해야 할 강한 민주주의는 국가와 시민사회 두 축만으로는 이루어질 수 없다.
강한 정치사회는 강한 민주주의의 필수불가결한 요소다. 만약 정치의 영역이 코로나19라는 대격변에도 불구하고
구태의연하게 남는다면 한국의 민주주의는 그다지 강해질 수 없을 것이다. 오히려 한국의 민주주의는 강력한 국가와 활발한
시민사회 영역에 비해 정치의 영역이 상대적으로 위축된, 다소 기형적인 민주주의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 ‘강한 민주주의’를
향해 나아가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정치개혁과 관련해 제기되었던 많은
해묵은 과제들을 과감하게 추진해 나갈
필요가 있다. 정당, 정당체계, 정치제도,
정치문화 전반의 동시적 변화가 필요하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 ‘강한 민주주의’를 향해 나아가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정치개혁과 관련해
제기되었던 많은 해묵은 과제들을 과감하게 추진해 나갈 필요가 있다. 정당, 정당체계, 정치제도, 정치문화 전반의
동시적 변화가 필요하다. 정당 개혁은 공천 개혁으로부터 출발하여 중앙당 중심의 정당시스템을 개혁함과 동시에
정당을 좀 더 시민과 생활정치 중심으로 개편하고 디지털 시대에 본격적으로 적응할 수 있도록 혁신하는 것이다.
선거제도는 세기의 코미디가 되어버린 지난번 선거제도의 ‘개악’을 물러 비례성이 증진되도록 다시 개혁해야
한다. 정치제도 전반에서 권력기관의 개혁을 안착시켜 완성하고, 분권화의 심화를 추구해 나가야 한다.
마지막으로 품격 있는 정치문화를 조성하고 개별 정치인들의 자질과 역량, 윤리의식을 강화하기 위한 노력 또한
게을리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김선혁
고려대학교
행정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