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시대 Vol 1732021.03

분석


바이든 시대의 미국 민주주의,
자유의 아이러니 어떻게 극복할까



트럼프 시기 미국의 민주주의는 큰 위기를 겪었다. 새롭게 출범한 바이든 정부는 민주주의의 위기를 어떻게 해결해 나갈 수 있을까. 미국의 민주주의 상황을 진단하고 바이든 정부가 직면한 과제를 살펴본다.


   30년 전인 1991년 소련의 붕괴와 함께 냉전이 종식되면서 자유민주주의 정치체제의 우월성이 확인되었다. 국가가 경제에 과도하게 개입하는 공산주의 계획경제체제가 자유로운 경제 활동을 보장하는 시장경제체제로 바뀌고, 개인의 의견을 존중하지 않는 전체주의적 정치체제가 일반 국민의 정치 참여를 보장하는 민주주의체제로 전환되는 과정은 실로 극적이었다.

   하지만 2021년 현재 자유민주주의 제도를 채택한 많은 국가들은 1990년대에 예측하지 못했던 내홍을 겪고있다. 코로나19라는 역병 때문에 겪는 어려움이 큰 부분을 차지하지만, 바이러스의 확산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것도 있다. 왜 정치인들과 유권자들이 다른 진영의 의견을 듣지 않고 다투는 양극화 현상이 심화되는가? 왜 일부 사회 집단이 다른 집단을 정당한 경쟁자 혹은 협력의 대상으로 생각하지 않고, 절멸시켜야 하는 적으로 상정하고 혐오와 편견을 강화시키는가? 어떻게 이러한 문제들이 자유가 충분히 보장된 환경에서 일어날 수 있는가?

지난 1월 6일 트럼프 대통령 지지 시위대가 미국 워싱턴D.C. 연방의회 의사당을 점거했다. Ⓒ연합   

민주주의의 위기와 자유의 아이러니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서는 소위 ‘자유의 아이러니’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자유의 확산은 분명히 긍정적 변화를 만들어냈다. 자유민주주의 제도가 정착함에 따라 자유무역을 통한 시장경제가 활성화되었고, 이는 국가 간 경제 불평등을 줄이는 데 기여했다. 또한 이민이 활성화됨에 따라 과거에 비해 자유민주주의 국가 시민들의 다양성에 대한 관용과 수용도가 높아진 것도 사실이다. 한편 자유민주주의 제도 하에서 보장된 표현의 자유는 개인이 얻고 소화할 수 있는 정보의 양을 비약적으로 늘려주어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을 내리는 데 기여하였다.

  그러나 세상은 긍정적인 방향으로만 변화하지 않았다. 자유민주주의는 자유무역을 통한 부의 창출과 번영을 약속했지만, 선진국 내 경제 불평등을 가속화시켜 중산층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자유로운 노동의 이동 역시 순수 경제적 관점에서 보면 효율적인 이윤 창출에 기여했지만, 자국민 노동자의 상대적 박탈감과 문화적 이질감을 자극하여 반이민정서와 국수주의를 강화하는 역효과를 낳았다.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어 국가의 억압과 감시 위협 없이 개인의 의견을 자유롭게 개진할 수 있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긍정적인 현상이지만, 확증편향을 강화시켜 양극화를 부추기는 원동력으로 작동하기도 하였다. 이것이 자유의 아이러니로 언급되는 현상이다.



  최근 ‘자유민주주의의 위기’와 관련된 논의는 자유의 아이러니를 해결하는 방법을 찾겠다는 절실한 노력에서 비롯된 것이다. 민주주의의 탈을 쓴 권위주의인 포퓰리즘의 확산에 시달려온 유럽에서는 이러한 논의가 수십년간 지속되어 왔다. 지난 1월 2020년 대통령 선거가 부정선거였다는 가짜뉴스를 신봉하는 일부 급진 세력이 연방의회 의사당을 점령하는 사태까지 겪은 미국에서도 현재 건강한 민주주의의 회복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거세다.

  그런데 민주주의, 특히 미국의 민주주의가 위기 상황에 봉착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정치학자 메틀러(Suzanne Mettler)와 리버만(Robert C.Lieberman)의 최근 저서 『네 가지 위협(Four Threats)』에 따르면 미국 민주주의는 ①인종 및 이민 문제, ②양극화 문제, ③경제 불평등 문제, 그리고 ④행정부의 권한 확대 문제에서 비롯된 민주주의의 위기 상황을 반복적으로 겪었다. 구체적으로 건국 직후 시기, 남북전쟁, 도금시대(the Gilded Age), 대공황, 워터게이트, 그리고 트럼프 집권기에 미국이 위기를 맞았다고 본다.

  1790년대의 위기는 정부 내 연방주의자와 공화주의자 간의 양극화에서 비롯된 것이다. 연방정부의 권한과 주정부 권한의 상대적 비중을 둘러싼 두 정치세력의 다툼이 갓 태어난 민주주의 국가의 운명에 큰 위협이 된 시기였다. 남북전쟁은 잘 알려진 대로 노예제라는 인종문제를 둘러싼 정치권 내의 이견에서 불거진 위기라고 볼 수 있다. 이때 노예주와 자유주 간의 갈등이 노예주로 구성된 남부의 승리로 끝났다면 지금 미국 땅에는 두개의 나라가 존재할 것이다.

  한편 1890년대 도금시대는 경기 침체에 따른 소득 불평등과 급속한 산업화로 인해 생긴 이민 문제를 놓고 정치권이 쪼개졌던 위기 상황이다. 1930년대 대공황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루스벨트 대통령을 중심으로 한 연방 행정부의 권한 확대는 오랫동안 유지되어 왔던 삼권분립에 도전을 준 위기였다고 볼 수 있다. 비슷한 맥락에서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상징되는 1970년대 초반 역시 행정부의 지나친 권한 확대가 위기의 핵심이었다.

지난 1월 21일 바이든 대통령이 백악관 집무실에서 각종 행정명령에 서명하고 있다. ⓒ연합   

역사적 위협 요인이 모두 적용된 트럼프 시기
  흥미로운 점은 정치인 트럼프의 등장 전후의 위기 상황은 위에서 언급한 네 가지 위협 요인들이 모두 적용되는 유일한 경우라는 것이다. 1790년의 위기는 경제 불평등, 인종 문제, 비대해진 행정부와 모두 거리가 멀었다. 남북전쟁과 1890년대의 위기는 행정부의 권한 확대라는 위협 요인이 존재하지 않았다. 반면 루스벨트 행정부와 닉슨 행정부 때의 위기는 주로 행정부에 의해 삼권분립이 위협받는 상황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당시에 상대적으로 인종·이민 문제, 양극화, 경제 불평등 문제는 심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트럼프 행정부 시기 이후 미국이 겪는 위기는 민주주의를 갉아먹는 네 가지 위협 요인들이 모두 활성화되었다는 특징을 띤다.

  우선 지난 20여 년간 지속되어 온 이념 양극화가 전혀 완화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1970년대만 해도 가장 보수적인 민주당 국회의원의 이념 성향이 가장 진보적인 공화당 국회의원의 이념 성향보다 더 보수적이어서 민주당과 공화당이 공유하는 영역이 넓었다. 하지만 지금은 가장 보수적인 민주당 국회의원의 이념 성향이 가장 진보적인 공화당 국회의원의 이념 성향보다 더 진보적이어서 두 정당 간 의견을 조정하고 합의를 도출하는 데 필수적인 ‘중간지대’가 사라진 상황이다. 이러한 미국 정당 구도의 변화는 유권자의 이념 성향에도 영향을 미친다. 정당이 이념적으로 양극화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정보를 전달해 주는 매체 역시 과거에 비해 이념적으로 편향되었다. 공화당을 지지하는 보수 성향의 유권자는 보수 성향의 매체를 통해 자신의 이념적 입장을 강화하고, 민주당을 지지하는 진보 성향의 유권자는 진보적인 시각을 앞세우는 매체를 이용하여 정보를 습득하게 된 것이다.

  인종 문제와 이민 문제 역시 트럼프 행정부 시기 미국을 분열시킨 주된 원인이다. 2016년 선거운동 기간에 멕시코 이민자들을 노골적으로 비하하는 발언을 일삼았던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 직후 이슬람교도의 이민을 제한하는 행정명령을 발효하여 일련의 소송 사태를 낳았다. 또한 어린 나이에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불법 이민자 부모를 따라 미국에 거주하게 된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오바마 행정부가 발효한 불법체류 청소년 추방유예 제도(Deferred Action for Childhood Arrivals[DACA])를 폐기하기 위해 노력했고, 멕시코 국경에 장벽을 건설하기 위해 의회와 갈등을 빚기도 하였다. 해묵은 인종 갈등 역시 트럼프 행정부 때 악화되었다. 2020년 4월 미네소타에서 공권력의 남용으로 조지 플로이드(George Floyd)라는 흑인이 사망하는 사건에서 비롯된 ‘흑인의 생명은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 시위가 전국으로 확산되는 상황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일부 시위대들의 폭력 행위를 부각하면서 법과 질서를 회복하는 데에 노력을 기울이겠다고 말해 갈등을 심화시킨 바 있다.

"바이든 행정부는 이념 양극화 시대에 인종 및 이민 문제와 경제 불평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입법부와 사법부의 눈치를 보지 않고 단호하게 개혁을
추구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 그러나 행정명령 위주의 정국
운영은 상대방 정당의 반발을 사게 되어 이념 양극화를 더욱 심화시킬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도 민주적 의사결정 과정을 무시하는 처사일 수도 있다."

  경제 불평등 문제 역시 해결되지 않은 채 지속되고 있다. 오바마가 대통령으로 당선된 2008년 미국은 경기 침체로 큰 홍역을 치르고 있었다. 무분별한 금융자본의 움직임을 효율적으로 통제하지 못해 생긴 금융 위기는 투자 은행과 대기업의 도산뿐만 아니라 과열된 부동산 시장에 투자한 일반 국민들의 파산이라는 결과를 낳았다. 이 위기를 헤쳐 나가기 위해 오바마 행정부는 적극적인 재정정책을 펴기로 결정한다. 자유주의 경제 원리에 따르면 위기를 제대로 준비하지 못해 도산 위기에 처한 경제 행위자는 시장에서 도태되어야 한다. 하지만 실제 위기 상황에서 기업들은 “죽기에는 너무 덩치가 크다(toobig to die)”는 주장을 펴면서 정부의 구제 금융을 요청하였고, 오바마 행정부는 장고 끝에 더 큰 위기를 막는다는 명분으로 기업들을 구제해 주었다. 이 정책의 반대급부로 제도권 정치인에 대한 미국 중산층 유권자들의 불신은 강화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임기 중 고소득자와 기업의 세금을 감면해 주는 법을 통과시켜 소득 불평등 완화에 큰 도움을 주지 못했다.

트럼프 정책 뒤집는 바이든 정부의 행정명령
  인종 갈등, 경제 불평등, 이념 양극화는 행정부의 일방적인 행동을 유발할 위험이 있다. 최근 미국 정치를 보면 분점 정부(Divided Government) 상황에서 연방의회가 행정부의 발목을 잡는 상황이 빈번히 발생한다. 오바마 행정부와 트럼프 행정부 모두 협조적이지 않은 의회에 맞서 행정명령을 발동시켜 실질적인 입법 행위를 수행한 바 있다. 하지만 대통령 행정명령이라는 일방적인 입법행위는 그 의도가 무엇이든 비민주적이고 독단적인 행위로 보이기 쉽다. 바이든 대통령도 1월 20일 취임 이후 벌써 50여 개의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일부는 코로나19 방역과 관련해 긴급한 대처를 요하는 것이지만, 상당수는 트럼프 행정부의 정책을 일방적으로 뒤집는 조치이다. 바이든 행정부는 이념 양극화 시대에 인종 및 이민 문제와 경제 불평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입법부와 사법부의 눈치를 보지 않고 단호하게 개혁을 추구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만약 헌법 정신을 따져 삼권분립의 원리를 충실히 따라 의회의 협조를 얻으려 한다면 입법과 정책 집행이 효율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행정부 위주로 정국이 운영되어 온 우리의 경험에 비추어 보았을 때 이러한 미국의 상황은 낯설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행정명령 위주의 정국 운영은 상대 정당의 반발을 사게 되어이념 양극화를 더욱 심화시킬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 민주적 의사 결정 과정을 무시하는 처사일 수 있다. 민주주의의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다른 위기를 불러올지도 모르는 방법을 사용한다는 것이 현재 바이든 행정부가 직면한 근본적인 모순이다


하상응 서강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