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 읽기
아일랜드에서 목격한
한반도의 미래
평범한 사람들의
평화를 꿈꾸다
  
‘평화프로세스’는 장기간 분쟁이 지속된 지역에서 진행되는 평화구축 과정을 일컫는 말이다. 이 말은 1970년대 미국이 주도했던 중동지역 국가들 사이의 평화협상 과정에 사용되기 시작하여, 현재 한반도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다. ‘프로세스’, 즉 ‘과정’이라는 표현에서 잘 나타나듯이 국제사회에서 평화프로세스는 하나의 고정된 형태가 아니라 여러 과정을 거치는 것으로 개념화되었다. 이는 공식적 협상 이전의 과정, 협상을 진행하고 관리하는 과정, 평화협정에 이르는 과정, 그리고 평화협정을 맺은 분쟁지역에서 분열된 사회를 재건하는 과정으로 구분된다.
  평화프로세스라는 용어가 보편화되면서 전쟁을 멈추기 위한 결과로서의 평화협정을 넘어, 전쟁 재발을 원천적으로 방지하고 지역의 항구적 평화를 구축하는 ‘과정’의 중요성이 부각되었다. 또한 이 과정에 정치·군사지도자들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의 참여가 중요하다는 주장이 지속적으로 제기되었다. 예를 들어 평화학자 존 폴 레더라크는 “아무리 평화협정이 맺어진다고 하더라도, 지역 주민이 평화프로세스에 참여하지 않는다면 평화협정은 종이에 불과하다”고 지적한다.
다른 경험, 그러나 같은 목표
  전 세계 다양한 평화프로세스 가운데 평화연구자 및 정책입안자들에게 가장 관심을 많이 받아온 평화프로세스를 꼽자면 아마도 아일랜드 평화프로세스일 것이다. 아일랜드 평화프로세스는 1998년 ‘성금요일 협정’ 혹은 ‘벨파스트 협정’이라 불리는 평화협정을 체결했다는 점, 수많은 도전 과제에도 불구하고 평화프로세스를 지속해 왔다는 점에서 여러 다른 분쟁지역의 비교 연구 및 정책적 관심의 대상이 되어 왔다.
  1998년 평화협정 이전 아일랜드 평화프로세스는 남아프리카 인종분리정책의 종식 과정,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의 오슬로 프로세스 등 동시대의 평화프로세스들로부터 교훈을 얻기 위해 노력했다. 협정 이후에는 아일랜드섬의 경험을 다른 지역과 적극적으로 공유하고 있다. 이렇게 경험을 나누는 것은 서구국가가 역사적으로 유럽국가 간 전쟁 및 1, 2차 세계대전 이후 이룩한 자신들의 역사적 모델을 타 지역에 이식 또는 전수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현재 유사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분쟁 지역들과 상호 경험을 나눔으로써 서로가 필요한 정책적 상상력을 도모하고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는 지역 주도의 연구 및 평화 활동이라고 볼 수 있다.
1998년 4월 10일 (오른쪽부터)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 조지 미첼 미국 상원의원,
베티 아헨 아일랜드 총리가 성금요일 협정에 서명했다. ⓒ연합  
  아일랜드 평화프로세스에 대한 국제적 관심에 비해 아일랜드섬과 한반도 평화프로세스의 비교 연구가 활성화된 것은 그리 오랜 일이 아니다. 물론 아일랜드섬도 한반도와 마찬가지로 남북이 갈라진 분단국가이고, 분단을 전후로 한 식민, 전쟁 등 유사한 경험을 했기 때문에 한국인은 동양의 아일랜드인이라는 표현이 등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한반도와 아일랜드의 경험 간에 차이가 큰 점을 고려할 때, 그동안 한반도에서 아일랜드보다는 냉전시기의 경험을 공유하는 독일통일 과정에 대한 관심이 더 높았던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한반도에서는 민족정체성을 공유하는 남과 북의 갈등집단이 서로 다른 사회·정치·경제적 이념으로 인해 양립할 수 없는 국민국가 목표를 가지고 있다. 반면 아일랜드섬의 갈등집단들은 서로 유사한 사회·정치·경제 시스템을 공유하면서도, 서로 다른 민족정체성에 기인한 양립할 수 없는 국민국가 목표를 가지고 있다. 분단구조 면에서도 남북 분단구조를 가진 한반도에 비해, 아일랜드는 남북 분단 및 북아일랜드 내부 분단, 그리고 영국과 아일랜드를 가르는 분단선이 있는 다층적 구조라는 차이점이 있다.
  하지만 한반도와 아일랜드 모두 양립할 수 없는 국민 국가상으로 인해 전쟁 및 폭력의 아픔을 겪었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평화프로세스가 필요하다는 점에서 분명 비교 의의가 있다. 어떤 국기를 원하는지에 따라 갈등이 지속되어 왔다는 점, 그리고 갈등집단 간 평화협정을 맺고 평화프로세스를 지속시켜 나가야 한다는 과제를 공유한다는 점에서 아일랜드섬의 경험은 한반도에 매우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 준다.
  또 하나 흥미로운 사실은 평화프로세스 과정에서 나온 유의미한 합의들이 이행과 파기를 반복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1970년대 한반도에서 7·4 남북공동성명이 있었다면 아일랜드에서는 1974년 서닝데일(Sunningdale) 합의가 있었다. 아일랜드섬에서도 단 한 번의 합의로 평화프로세스가 진전을 이룬 것은 아니다. 1998년 평화협정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합의가 있었고, 이 합의들은 평화프로세스를 추진한다는 점에서 내용상에서는 큰 차이가 없는데도 반대에 부딪히며 무너져 내렸다. 서닝데일 합의의 주역이었던 한 정치인은 1998년 평화협정이 서닝데일 합의에 대한 학습능력이 저조한 이들을 위한 재교육이었다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아일랜드 평화프로세스의 협상 장소 중 한 곳이었던 코리밀라(Corrymeela)건물.
이곳은 오랜 기간 비밀 협상 장소로 활용되었다. ⓒ필자제공  
아일랜드 평화프로세스는 사람 간의 화해
  필자는 지난 6년 동안 아일랜드섬에 거주하며 아일랜드 평화프로세스와 한반도 평화프로세스를 비교 연구해 왔다. 아일랜드 평화프로세스에 참여한 주요 인사들을 만나면 공통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정치적 견해와 입장은 화해가 불가능하지만,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는 화해가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남북 아일랜드의 주요 정치 지도자들은 서로 다른 정치적 목표에 집착하기보다, 일단 서로 평화공존하면서 사람과 사람 간의 관계를 평화적으로 재구성하는 평화구축 과정의 제도화가 필요하다는 점을 이미 1970년대에 인식하고 있었다. 하지만 오랜 기간 지속된 갈등으로 인해 발생한 상호 불신은 아일랜드 평화프로세스의 합의와 이행에 대한 지속적 반대를 불러일으켰다. 상대 갈등 집단과의 평화 합의에 동의하는 사람들은 배신자로 취급되었고, 어떤 정치인들은 이런 상호불신을 이용해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고 지지세력을 강화하고자 했다. 1998년 협정을 위한 협상 과정에 참여했던 주요 인사들 은 이미 1970년대에 인식하고 있었던 평화프로세스의 중요성을 너무 늦게 재확인하여 불필요한 희생이 따랐다는 탄식을 하기도 한다.
  아일랜드섬에 거주하는 한국인으로서 가장 부러운 점이 있다면, 여러 어려움에도 1998년 협정 이후 아일랜드의 평화프로세스는 현재진행형이라는 점이다. 1998년 협정은 아일랜드섬의 통일 문제를 영토 개념이 아니라 사람 간의 평화프로세스로 보는 인식에 기반을 두고 있다. 평화협정 이후 북아일랜드 영토 자체는 영국에 속하지만 북아일랜드 주민들은 영국 또는 아일랜드 혹은 두 국가 모두의 국민으로 살 수 있는 권리, 그리고 북아일랜드에 대한 자치권을 보장받았다. 이러한 협정 정신에 따라 남아일랜드는 헌법 개정을 통해 북아일랜드에 대한 영토조항을 삭제하고, 통일을 위해서는 아일랜드섬의 영토를 공유하는 주민 다수의 동의가 필요하다는
단서 조항을 추가했다. 1998년 협정 이후 그동안 남북 아일랜드를 가르던 군사분계선은 이제 휴대폰 로밍 지역이 바뀌는 순간 외에는 거의 경계를 확인하기조차 어려운 자유왕래의 국경선이 되었다. 한국에서 아일랜드 평화프로세스 현지답사를 위해 방문하는 분들을 모시고 가는 남북 아일랜드 경계의 옛 군사지역은 지역 사람들이 모이는 펍(Pub)으로 바뀌어 있다. 우리도 언젠가 외국에서 한반도를 방문한 사람들에게 이곳이 예전에는 남과 북을 가르던 비무장지대였다고 이야기할 날이 올 수 있을까?
벨파스트 시내의 평화의 벽(Peace Wall). 이 장벽들은 여전히 심각한 집단 간 갈등을 보여주는 상징이다. ⓒ필자제공  
아일랜드의 위기, 사라지지 않는 사회적 장벽
  물론 아일랜드섬에서도 남북의 경계선에 대한 논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아일랜드섬은 아무리 국가차원에서 평화협정을 맺었어도 사회 내의 다양한 계층이 그 과정에 함께 참여하지 않는다면 언제라도 위기가 닥칠 수 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아일랜드 거주 초기 참여한 한 회의에서 남아일랜드 참가자들에게 북아일랜드에 방문한 경험이 있는지 물었더니, 대부분의 사람들이 한 번도 북아일랜드에 방문하지 않았다고 응답했다. 평화협정이 체결된 지 20년이 넘었지만, 북아일랜드를 가로질러 가면 더 빠른 길도 일부러 돌아간다는 응답도 있었다. 군사분계선은 사라졌지만, 상대를 향한 사회적 장벽은 쉽게 사라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남북 간의 사회적 장벽뿐 아니라, 북아일랜드 내부의 사회적 장벽도 여전하다. 평화협정 이후 폭력 발생 빈도는 현저히 줄었지만, 영국계와 아일랜드계 주민은 여전히 서로 다른 지역에 거주하고 학교 교육 및 사회적 활동 면에서도 서로 떨어져 살아가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영국의 브렉시트(Brexit) 결정은 아일랜드 평화프로세스에 위기를 조성하고 있다. 브렉시트 이후 남아일랜드와 북아일랜드 사이의 국경은 단순히 아일랜드와 영국의 국경이 아니라 유럽연합 국가와 비유럽연합 국가 사이의 국경이 되었다. 이에 따라 영국령 북아일랜드가 남아일랜드와의 자유왕래를 유지하는 것은 상당히 모순적인 일이 되어 버렸다. 코로나19 확산을 막기 위한 여행제한 조치도 영국 본토와 북아일랜드 간의 국가 내 왕래를 막을 것인가, 통일을 지향하는 남북 아일랜드 간 경계를 막을 것인가와 관련해 큰 논란을 초래하고 있다.
  한번 평화프로세스의 성과를 경험한 아일랜드 사회에서 아일랜드를 둘러싼 영국과 유럽의 지정학적 변화가 아일랜드 사람들의 교류를 중단시키지 않도록 아일랜드 정부는 ‘공유하는 섬(Shared Island)’정책을 통해 영토가 아니라 사람과 사람 간의 평화적 관계를 확산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군인이 담을 넘으면 전쟁이 시작되지만, 시민이 담을 넘으면 평화의 가능성이 높아진다. 그러나 아일랜드섬의 경험에서처럼, 다리를 세운다고 해서 자동으로 평화가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특히 평화프로세스의 부침을 경험하고 있는 한반도의 입장에서 아일랜드를 바라볼 때, 평화를 원한다면 평화의 다리를 건설하는 일만큼 평화를 살아갈 준비를 보다 철저히 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더 많은 사람들이 평화의 다리를 이용하도록, 그리고 이들이 서로 평화적으로 만날 수 있도록 준비하는 평화 활동이 중요하다. 지정학적 위기를 겪고 있는 아일랜드섬과 한반도에서 여러 가지 어려운 도전 과제에도 불구하고, 남과 북의 평범한 사람들이 평화의 다리를 건너 평화로운 관계를 만들어 나가는 평화프로세스가 계속 발전되어 나가길 소망한다.
김동진
트리니티 칼리지
더블린 ISE
평화화해학 펠로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