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통일 현장
VR 자동차로 평양 찍고 백두산까지 달렸다
서울 강서구 남북통합문화센터 통일시대 가상현실 여행 체험기
“어렸을 때 평양 인민대학습장 광장에 자주 갔어요. 가족과 함께 그곳을 거닐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게 떠올라요. 북쪽에 남겨두고 온 가족과 동무들이 보고 싶은데, 그 시절 추억을 나눌 곳이 마땅찮아 그리움만 쌓이네요.”
한 북한이탈주민이 들려준 얘기다. 탈북민의 향수병에 대한 이야기를 수차례 들었던 터라 지난해 1월 남북통합문화센터 5층 영상체험실에 ‘통일시대 자동차 가상현실(VR) 체험존’이 설치됐다는 소식을 듣고 무척 반가웠다.
서울 강서구에 남북통합문화센터가 문을 연 건 2020년 5월. 이 공간은 준비 단계부터 많은 이의 관심을 모았다. 시민들이 남북 문화를 비교 체험하면서 상호 이해의 발판을 마련하는 장소가 될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소 직전 터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대유행 때문에 한동안은 기대한 효과를 보기 어려웠다.
최근 코로나19 확산세가 진정되고, 야외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남북통합문화센터는 비로소 남북의 문화 체험 ‘필수 코스’로 주목받고 있다. 특히 탈북민과 지역 주민들 사이에서 인기가 뜨겁다. 박근희 남북통합문화센터 연구원은 “젊은 세대의 선호를 반영한 VR 콘텐츠를 포함해 다양한 프로그램이 시민들의 큰 호응을 얻고 있다. 지난해 관람객이 6000명을 넘어섰고, 올해는 더 많은 사람이 이곳을 찾아 문화 체험을 즐길 것으로 예상한다”고 말했다.
남북 문화 비교 체험 필수 코스로 부상
남북통합문화센터에서는 한반도 분단을 주제로 한 기획전시관과 북한 문화 VR 체험이 가능한 통합문화체험관 등을 둘러볼 수 있다. 디지털 키오스크 단말기에 통일 염원 메시지를 입력한 뒤 디지털 풍등에 띄워 보내는 체험 프로그램도 마련돼 있다. 이왕 방문한 거 VR 체험존을 포함해 다양한 프로그램을 둘러보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북통합문화센터 관계자 말대로 남과 북의 어제와 오늘, 내일을 만나고 체험하는 구실을 하고 있는지 확인해볼 생각이었다.
전시관 해설 및 VR 체험은 남북통합문화센터 홈페이지(uniculture.unikorea.go.kr)와 유선전화(02-2085-7327)로 신청할 수 있다. 회당 관람 가능 인원이 10명 이내로 제한되므로, 방문 3일 전까지 예약을 마쳐야 한다. 관람 시간은 매주 화요일~토요일 오전 9시~오후 6시. 입장 마감은 오후 5시다. 전체 프로그램을 이용하는 데는 1시간 정도 소요된다. 전시관 해설이나 VR 체험을 이용하지 않는 사람은 예약 없이 방문해도 자유 관람이 가능하다. 입장료는 무료.
남북통합문화센터는 다양한 문화 활동을 통해 탈북민과 지역 주민의 소통·화합·연대를 도모할 목적으로 설립한 복합문화공간이다. 애초 취지대로 이곳저곳 세심하게 신경 쓴 티가 났다. 먼저 발길이 닿은 곳은 5층 기획전시관. 내부로 들어가니 ‘한반도 분단’ 전시실이 나왔다. 6·25전쟁 이후 분단 현실을 시각 자료로 풀어낸 공간이었다. 정면에 ‘분단의 아픔’을 주제로 한 또 다른 전시실이 보였다. 이산가족 고령화 문제부터 연도별 이산가족 만남 신청 현황, 이산가족이 쓴 수필과 편지, 사진 등이 진열돼 있었다. 북에 사는 동생이 남쪽 누나에게 보낸 편지에는 안부 인사, 근황, 고향과 가족 이야기, 건강 기원, 만날 날을 기원하는 내용 등이 빼곡히 적혀 있다. 첨부한 사진을 보니 더욱 애틋한 마음이 들었다. 유리벽 너머 놓인 가족사진이 누렇게 바래가는 동안, 가족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은 더욱 짙어진 듯했다.
바로 옆에는 ‘고통 치유의 노력’ 전시실도 보였다. 황해도, 평안남도, 평안북도, 함경남도, 함경북도 등 이북 5도 출신 이산가족 다섯 분의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위로하고자 제작한 ‘통일 향수’ 전시물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고향에 대한 향수(鄕愁)를 향수(香水)로 달랜다는 중의적 의미를 담아 이름을 붙였다니, 다시 한번 의미를 되새기게 된다.
북한 출신 어르신들의 추억을 담아 만든 ‘통일 향수’. 이 이름에는 고향에 대한 향수(鄕愁)를 향수(香水)로 달랜다는 중의적 의미가 담겨 있다.
각각의 향수에는 함경남도 명사십리 해당화향, 함경도 한여름 산딸기향, 평안남도 대동강 솔향, 평안북도 옥수수향의 추억, 황해도 해주 바다내음 등 다섯 가지 이름이 붙었다. 그 각각마다 남다른 사연이 따라온다. 이주경 할머니의 고향 함경도는 대추알만한 산딸기가 주렁주렁 달린 길로 유명하다. 함지박에 수북히 담는 바람에 짓눌린 딸기 물을 온 가족이 나눠 마셨다는 할머니. 그의 어린 시절과 고향에 대한 향수를 위로하고자 제조한 것이 바로 ‘함경도 한여름 산딸기향’이다. 시향해보니 순식간에 코끝으로 시원함이 전해져 몸이 가벼워지는 느낌이다.
통일 향수를 체험한 관람객은 하나같이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입을 모은다. 평안남도가 고향이라는 탈북민 홍원일 씨는 “바람에 실려 온 솔잎 향을 맡으니 대동강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느낌이 든다. 평안북도 옥수수향을 맡았을 땐 나도 모르게 울컥했다”고 말했다.
VR 기술로 체험하는 북한 명소와 북한 요리
기획전시관을 둘러보고 직원 안내에 따라 영상체험실로 이동했다. ‘VR 통일시대 자동차 여행’은 북한 주요 명소를 VR을 통해 간접 경험할 수 있게 해주는 프로그램이다. 여정은 서울 한남대교에서 출발해 판문점을 지난 뒤 평양, 금강산을 거쳐 백두산 천지에 도착하는 내용으로 구성돼 있었다. 통일시대 자동차 여행 VR은 1인용과 2인용, 두 가지로 즐길 수 있다. 기자는 1인용을 선택하고 고글 형태의 HMD(Head mounted Display)를 머리에 쓴 채 VR 자동차에 몸을 실었다.
‘평양식당 VR 요리 대전’ 체험 모습.
눈앞 풍경이 순식간에 한남대교로 바뀌었다. 드라이버 포스를 뽐내며 운전대를 잡고 액셀을 밟았다. 곡선로가 이어지는 강변로를 지나는 내내 운전대를 조작하는 대로 어긋남 없이 자동차가 민첩하게 움직였다. 일부 고르지 못한 도로를 달릴 땐 차체가 공중으로 붕 뜨기도 하고 한 방향으로 기울기도 해 스릴이 느껴졌다. 흥에 취해 액셀을 과하게 밟은 탓일까. 자동차가 수시로 장애물에 부딪혔다. 그 순간마다 충돌 충격이 몸으로 고스란히 전달됐다. 체험을 지켜보던 직원이 “장애물에 부딪히면 해당 코스를 다시 운전해야 한다. 침착하게 운전해보라”고 권했지만, 조언을 새겨들을 여유가 없었다. 정신없이 액셀 밟기를 몇 분. 가까스로 백두산 천지 전망대에 도착했다.
체험을 마친 뒤 받은 첫 느낌은 ‘오, 생각보다 재밌는데?’였다. VR 멀미도 심하지 않았다. 직원은 한 게임 소요 시간이 15분 남짓이라고 설명했는데, 두세 판은 연속으로 해야 ‘오늘 운전 좀 했다’는 생각이 들 것 같았다. 다만 평소 놀이기구 타는 걸 즐기지 않는 사진기자는 현기증을 호소하며 중도 하차했으니 VR 멀미는 개인차가 있다고 봐야겠다. 참고로 멀미가 느껴질 때는 체험 중이라도 눈을 감아 시야를 차단하거나 즉시 HMD를 벗고 휴식을 취하는 것이 좋다.
이번엔 남북통합문화센터에서 인기가 높다는 또 다른 게임을 해보기로 했다. 현장 직원이 ‘강추’한 건 ‘평양식당 VR 요리 대전’. VR 헤드셋을 착용한 뒤 평양식당 주인장이 돼 음식을 직접 만들어보는 게임이다. 헤드셋을 쓰면 곧장 눈앞에 식당 바닥부터 천장까지 360도 VR 화면이 펼쳐진다. 그걸 보면서 조이스틱으로 움직임을 조작하면 된다.
다양한 문화 활동을 통해 탈북민과 지역 주민의 소통·화합·연대를 도모할 목적으로 건설된 남북통합문화센터 내부에 걸린 그림.
평양식당 VR 요리 대전에서 만들어볼 수 있는 음식은 인조고기밥, 어복쟁반, 평양냉면, 대동강 숙어국, 약토끼곰, 비빕밥, 떡볶이, 김밥 등. 남북의 인기 요리가 두루 가능하다. 실감 나는 3D 그래픽으로 식재료, 조리도구 등을 구현해 몰입감도 매우 높았다. 하지만 장비 조작이 서툴러 평양냉면 한 그릇을 만드는 데 5분 넘게 걸리고 말았다. 양손에 쥔 조이스틱을 자유자재로 활용할 수 있으면 좀 더 재미있게 즐길 수 있을 듯했다.
미래세대 맞춤형 콘텐츠로 남북 통합 문화 이해 높여
이어 기자는 비무장지대(DMZ) 풍경을 3D 기술로 생생하게 구성해 보여주는 ‘DMZ 3D 감상실’을 지나 영화 ‘소년, 소녀를 만나다’를 재구성한 2D 영상을 감상했다. 북한 소녀 하진과 남한 소년 우영이 홈스테이에서 함께 지내며 우정을 쌓아가는 스토리를 감성적인 그림체로 풀어낸 점이 인상적이었다.
북한 주요 명소를 배경으로 사진을 촬영할 수 있게 해주는 포토존도 빼놓고 가긴 아쉬운 장소. 추억에 남을 사진을 찍은 뒤 기기에 e메일 주소를 입력하면 전송해준다. 마지막으로 7층 ‘소망실’에 마련된 디지털 키오스크에 통일 염원 메시지를 입력하고 디지털 풍등에 띄워 보내는 것으로 남북통합문화체험을 마무리했다.
탈북민 관람객이 비무장지대(DMZ) 3차원(3D) 감상실에서 영상을 보다 포즈를 취했다.
구글에 등록된 남북통합문화센터 리뷰를 보면 “남북 생활상과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곳이다”, “갈수록 전시와 공연이 다양해진다”, “남북관계에 관심 있는 사람에게 추천한다” 같은 내용이 가득하다. 현장에서 이 모든 리뷰가 사실임을 확인했다.
남북통합문화센터는 앞으로도 북한 문화 가운데 친숙하게 접근할 수 있는 주제를 선정해 흥미로운 체험 방식을 활용해 관람객의 관심을 끌고 남북 교류에 기여할 계획이다. 박 연구원은 “요즘은 초등학생이 단체 관람을 오거나 부모가 어린 자녀와 함께 오는 경우가 많다. 탈북민 가족의 방문도 증가하고 있다”며 “방문객 다수가 어린이, 청소년인 만큼 미래세대가 좋아할 만한 콘텐츠를 통해 남북이 서로를 이해하고 경험을 나누는 체험 공간으로 꾸려나가려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