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탈주민 정착 이야기
3년 차 요양원장 정은심의 도전
“탈북민 어르신을 위한
요양원 건립 꿈, 언젠가 꼭 이룰 거예요”
정은심(37) 다온요양원 원장(사진)이 요양원을 열겠다고 했을 때 가족 가운데 찬성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보건소 직원이라는 안정된 직장을 포기하는 것도 모자라, 요양원 수십 곳이 밀집한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에 자리를 잡겠다니…. 다들 북한이탈주민인 정 원장이 한국의 치열한 경쟁 문화를 경험하지 못해 부리는 치기 정도로 여겼다. 하지만 정 원장의 뚝심은 꺾을 수 없었다. 그가 옳다는 걸 가족들이 깨닫는 데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정 원장은 어느새 요양원 개업 3년 차에 접어들었다. 2021년 8월 처음 문을 열고 50일 동안 단 1명에 불과했던 입소자가 지금은 29명이 됐다. 요양원 규모도 첫해 6인실 규모에서 현재 29인실로 늘었고, 간호조무사와 요양보호사 등 직원 수도 16명에 달한다.
요양원 어르신들과 함께한 정은심 원장. (다온요양원 제공)
“우리 사회 구성원으로서
직원을 고용하고
나라에 세금 내며
국가 경제에 이바지한다는 사실에
자긍심을 느껴요”
신앙의 자유 찾아 19세 때 탈북
“좀 더 일찍 개업했더라면 좋았을 거예요. 직장에 다닐 때는 정해진 스케줄에 따라야 했는데, 지금은 자유롭게 제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게 좋아요. 환자와 그의 가족과 소통하는 것도 좋고요. 요즘 커뮤니케이션에 대해 관심이 커졌고, 거기서 얻은 성취감이 커요.”
정 원장이 입가에 미소를 띠며 말했다. 5월 중순, 늦봄 햇살 아래 선 그는 찰랑거리는 단발머리, 청바지에 운동화를 매치한 건강한 청년의 모습이었다. 막 요양원 오전 근무를 마친 참이라고 했다. 먼저 요양원 이름 ‘다온’이 무슨 뜻인지부터 물었다. 정 원장은 “좋은 일이 다 온다는 의미”라며 활짝 웃었다.
정 원장은 1986년 강원도 원산에서 태어났다. 원산교원대학에서 음악교원으로 근무한 아버지 덕에 가족이 교원아파트에서 경제적 여유를 누리며 살았다. 북한에서 풍족한 생활을 포기하고 탈북을 결심한 건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해서였다. 북한 헌법 제68조에는 ‘공민(公民)은 신앙의 자유를 가진다’고 규정돼 있다. 하지만 북한은 모든 종교 자유 활동을 체제 전복 행위로 간주한다. 그곳에서 자유로운 종교 생활을 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요양원 어르신들과 함께한 정은심 원장. (다온요양원 제공)
“우리 집은 대대로 믿음을 지켜왔어요. 독실한 기독교 집안이죠. 외할아버지는 어릴 때 부모를 따라 중국으로 건너가 살다가 1950년대 대기근을 피해 북한으로 건너왔다고 해요. 북한에서도 몰래 성경책을 구해 신앙생활을 했고, 주변 사람에게 복음을 전했죠. 그런데 친척들이 정치적 발언을 잘못하면서 우리 집에 감시의 눈길이 온 겁니다. 그러던 중에 아버지가 먼저 탈북을 했고, 저도 아버지를 따라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한국에 온 거예요.”
정 원장은 2005년 11월 압록강으로 향했다. 두만강보다 상대적으로 강폭이 좁은 압록강이 건너기 쉬울 거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탈북 시기를 11월로 정한 건, 그때가 되면 압록강이 꽁꽁 얼어붙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압록강은 물살이 매우 빠른 데다 여름이면 바위에 이끼가 잔뜩 끼어 탈북자들이 목숨을 잃는 경우가 많다. 탈북 당시 19세였던 정 원장은, 사고 위험이 큰 여름보다는 오히려 영하 40도의 혹한 쪽이 낫다고 판단했다. 그렇게, 그는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 중국과 미얀마, 태국을 거쳐 2006년 11월 한국에 도착했다.
“전 북한에서 한국까지 오는 데 그렇게 오래 걸릴지 몰랐어요. 어릴 때 ‘서울 평양 반나절’이라는 노래 가사를 들은 적이 있거든요. 바로 휴전선을 넘어오는 게 아니고 중간에 여러 나라를 거쳐야 하니 넉넉히 잡아 한 달쯤은 걸리겠구나 싶었는데, 실제로는 11개월이 걸렸어요.”
이후 정 원장이 겪은 한국 생활은 도전의 연속이었다. 한국에 생활 기반이 없는 북한이탈주민은 대부분 정착 초기 생활고를 겪는다. 그의 사정도 다르지 않았다. 북에 두고 온 어머니와 여동생의 탈북을 돕고자 식당에 취업해 돈을 모았다. 2008년 우여곡절 끝에 가족이 만나게 되자 정 원장은 본격적으로 진로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간호사를 염두에 두고 그해 3월 간호조무사학원에 등록했다. 많은 직업 중에 간호사에 관심을 가진 것은, 탈북민 상당수가 남쪽에서 가족, 친척도 없이 지내다 병약하고 쓸쓸한 모습으로 삶을 마무리하는 게 안타깝게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는 간호사라는 직업의 중요성을 느끼고, 간호조무사학원을 다닌 1년 동안 단 한 번의 결석과 지각도 없이 우수한 성적으로 공부를 마쳤다고 한다.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다온요양원 내부. (다온요양원 제공)
야학에서 공부한 끝에 간호대 진학
이후 취업한 병원 생활은 일도 적성에 맞고 재미있었다. 하지만 점점 간호조무사와 정규 대학을 졸업한 간호사의 역할 차이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론부터 체계적으로 배워 제대로 된 간호 업무를 하고 싶었다. 그러나 “이제 와 무슨 대학이냐, 좋은 배우자 만나 가정을 꾸릴 일이지…”라며 반대하는 어머니 탓에 처음엔 마음을 접었다.
정 원장이 다시 간호대 진학을 꿈꾸기 시작한 건 탈북민 의료 봉사 현장에서 또다시 간호조무사 역할의 한계를 깨닫고서였다. 정식으로 간호학을 배우지 않으면 탈북민을 제대로 돕기도 어려울 것 같았다. 그때부터 그는 퇴근 이후 경기도 안산과 서울 상도동을 오가며 대학 진학을 위한 공부를 시작했다.
“서울지하철 7호선 장승배기역 근처에 탈북민을 위한 야학이 있거든요. 거기 기초반에 등록해 글쓰기부터 배웠어요. 나중에는 영어 수업도 들었고요. 거의 3년 동안 야학에 다녔습니다.”
이 같은 노력의 결과가 2012년 단국대 간호학과 입학으로 나타났다. 그의 나이 스물여섯 때다. 꿈에 그리던 대학 생활이었지만 첫 학기 6개월은 순조롭지 못했다. 개강 첫날 수업에 들어가자 20대 초반 학생들이 앉아 있었다. 학생들은 탈북민 출신에 나이도 많은 그에게 선뜻 다가오지 못했다. 공동 과제를 위해 조를 짜야 할 때면 늘 정 원장과 군대를 제대한 복학생 한두 명만 남았다. 그는 “내가 열심히 자료를 찾고 발표문을 만들 테니 너희가 발표해라” 하며 먼저 복학생들에게 손을 내밀었다. 젊은이들이 흔히 쓰는 유행어를 잘 못 알아들어도 눈치로 맥락을 파악해가며 분위기를 맞췄다.
다온요양원 옥상 정원에 모인 어르신들.
정은심 원장은 입소자들이 쾌적한 환경에서 즐겁게 생활할 수 있도록 돕고자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다온요양원 제공)
“동생뻘 되는 동기들에게 탈북민에 대한 좋은 인상을 남기고 싶어 매사에 조심했어요. 그 경험을 바탕으로 대학 생활을 꿈꾸는 탈북민에게 조언을 하나 해주고 싶어요. 용기를 잃지 말라고요. 자신의 계획과 목표에 집중하며 달리다 보면, 언젠가는 대한민국 사회에서 인정받을 수 있어요.”
대학 시절, 정 원장을 어렵게 한 건 또 있었다. 대학 등록금은 정부 지원을 받으니 부담될 게 없었다. 하지만 수업 교재가 너무 비쌌다. 2학년까지는 아르바이트를 하며 생활비를 충당했지만, 3학년이 돼 실습을 나가게 되면서 그것도 힘들어져 생활비를 아끼는 수밖에 없었다.
한국의 편의시설 이용법과 정보에 어두운 것도 그를 힘들게 했다. 수도권 버스·지하철을 30분 안에 환승하면 추가 요금이 없다는 걸 몰라서, 교통비를 아끼려고 대중교통으로 10분이면 갈 거리를 40분씩 걸어 다녔다. 하다못해 통장 하나를 만들 때도 수백, 수천 가지 예금상품 가운데 무엇이 좋은지 몰라 헤맸다. 정 원장은 “그때는 예금과 대출, 금리 같은 얘기가 다 암호처럼 느껴졌다”며 멋쩍게 웃었다.
정 원장은 그 어려움 속에서도 대학교 3학년 때 배우자를 만나 가정을 꾸렸고, 4학년 때 첫 아이를 가졌다. 출산을 한 달 앞두고 만삭의 몸으로 2016년 1월 간호사 국가고시에 응시한 결과는 합격! 정 원장은 2년간 육아에 전념한 뒤 2018년 3월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보건소에서 보건 진료 공무직으로 취직했다. 이곳에서 치매안심센터에 근무하며 어르신의 인생 이야기 듣는 재미에 푹 빠져들었다고 한다. 당시 정 원장 눈에 들어온 게 한국 사회의 급속한 고령화였다. 노인 돌봄 체계가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공무원에 도전할지 요양원을 개업할지에 대한 고민이 시작됐다. 결국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사는 것이 인생을 값지게 사는 길’이라 마음먹으며 2021년 7월 31일 보건소를 퇴사하기에 이른다. 한동안 말리던 가족들도 결국은 그의 열정에 두 손을 들고 말았다.
“열심히 일해 세금 내며 사회에 기여할 것”
“2006년 대한민국에 첫발을 내딛은 직후 그런 얘기를 들었어요. ‘탈북민은 세금도 안 내면서 국가 지원만 축내지 않느냐. 너희가 이 나라를 위해 하는 일이 뭐냐.’ 이후 한국 사람들이 매순간 얼마나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살아가는지 알게 된 뒤 그 말을 이해하게 됐어요. 여기서는 뭘 하든 제대로 해야 하잖아요. 저도 그렇게, 제대로 일하고 싶어요.”
이러한 마음을 요양원 운영과 접목해, 다온요양원을 탈북민을 위한 요양원으로 키워가는 것이 정 원장의 최종 목표다. 그는 조만간 부동산을 추가로 매입해 요양원을 60인실 규모로 확장할 계획이다. 중·장기적으로는 1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요양원을 세우겠다고 한다. “요양원을 확장해야 탈북민 어르신을 받고 탈북민 직원을 고용할 날이 오지 않겠느냐”고 말하는 목소리에 힘이 넘쳤다.
“주변 사람들은 제게 ‘고생을 사서 하는 유형’이라고 해요. 저는 그런 말에 개의치 않습니다. 우리 사회 구성원으로서 직원을 고용하고 나라에 세금 내며 국가 경제에 이바지한다는 사실에 자긍심을 느끼고요. 앞으로도 탈북민에 대한 인식이 개선될 수 있도록 계속 노력할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