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비전
심동간 재독한인글뤽아우프회 회장,
상임위원(북유럽협의회)
“獨 탄광서 ‘산업화 꿈’ 일구던 정신으로
남북통일 토대 마련에 앞장서겠다”
대한민국은 6·25전쟁으로 전 국토가 폐허가 됐다. 그러나 불과 70년 만에 세계 10위 경제 대국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이뤘다. 이 같은 초고속 성장의 계기는 1963년부터 1977년까지 정부 주도로 경제개발을 위한 원조와 외화 획득 목적으로 서독(현재 독일)에 파견한 광부, 간호사, 간호조무사의 공로에 힘입은 바 크다. 파독 근로자의 임금을 담보로 빌려온 돈은 1억5000만 마르크(한화 450억 원). 그 돈으로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하고 산업화에 불을 지폈다. 한국 경제의 초석이 된 이들의 일부는 독일에 남아 이제 남북통일 전도사로 활동한다. 심동간 상임위원과 박소향 북유럽협의회 간사가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험난한 시절을 거쳐 독일 현지에서 자유민주주의에 기반한 평화통일을 실천하는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1977년 한국 경제가 본격적인 성장가도를 달리던 시절, 국가 산업 발전을 기원하며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독일행 비행기에 몸을 실은 청년이 있었다. 그의 결심은 가족이 자신을 통해 척박한 환경을 이겨내는 힘을 얻고, 암울한 한국 경제가 빠르게 회복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비롯됐다.
당시 23세였던 심동간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상임위원(재독한인글뤽아우프회 회장)은 46년이 지난 지금 또 다른 염원을 안고 독일 현지를 종횡무진 누비고 있다. 올해 파독 근로 60주년이자 한독 수교 140주년을 기념하며 독일인과 동포에게 남북통일의 중요성을 전하기 위해서다. 그는 “파독 산업전사의 수고와 헌신을 통해 많은 사람이 아픔을 딛고 일어선 우리나라의 과거를 돌아보고, 남북통일을 통해 새로운 미래를 맞이하는 계기가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기념사업을 추진 중”이라고 말했다.
탄광 사고 빈번해 다치거나 목숨 잃기도
정부가 해외에 공식 파견한 산업전사 가운데 광부가 제일 먼저 서독 땅을 밟았다. 첫 한국인 광부 파독은 한국 광부 파견에 관한 한독협정서 체결 이후 1963년 12월 22일 오후 6시 독일 뒤셀도르프 공항에 123명, 닷새 후 124명 등 모두 247명이 도착하면서 시작됐다. 이후 1977년까지 75차례에 걸쳐 모두 7936명이 광부로 독일에 파견됐다. 파독 광부 당시 월급은 평균 650∼950마르크(약 13만∼19만 원). 2008년 진실화해과거사위원회가 발간한 종합보고서에 따르면 1964년부터 1975년까지 광부와 간호사 등 파독 인력의 송금 총액은 1억7000만 달러에 달했다. 한 해 평균 1700만 달러로 당시 연간 총 수출액(2~4억 달러) 대비 2%에 육박하는 거액이다.
심 위원은 군 복무를 마친 1977년 파독 광부로 독일에 갔다. 당시 ‘광부 모집’ 광고에서 매달 700마르크(당시 14만 원)씩 준다는 글귀를 본 후다. 그는 독일 지역 한 탄광에서 광부로 일했다. 파독 계약 기간을 마친 뒤 고국으로 귀국하지 않고 독일 현지에서 생활을 이어갔다. 독일 생활 44년째 되던 2021년 11월 재독한인글뤽아우프회 회장으로 선출됐다. 현재 광부기념관 관장으로도 봉사한다. 재독한인글뤽아우프회는 독일에 남아 있는 파독 광부 출신들이 만든 친목단체. 파독 근로자들이 어려웠던 시절 국가 경제에 기여했다는 자긍심을 갖고 친목을 이어가기 위해 만든 것이다. 심 위원은 “대한민국의 놀라운 경제성장의 바탕에는 파독 전사자들의 피와 땀이 서려 있다”고 말했다.
광부들은 아침 일찍부터 수천 미터 지하로 내려가 탄을 캤다. 일부는 탄광에 들어갔고, 나머지는 캐낸 탄을 분류하는 등 기타 공정에 투입됐다. 지하 깊이 내려가 매캐하고 탁한 공기를 마시며 검은 석탄 가루가 묻은 식사를 하고, 매일 무거운 짐을 들고 끌고 하다 보니 골병이 들었다. 채굴 장비가 워낙 크고 무거운 데다 광부들이 광산 경험이 없던 터라 크고 작은 사고로 다치거나 목숨을 잃는 이도 적지 않았다. 심 위원도 일하는 와중에 벌어진 아찔한 순간을 피하지 못한 탓에 지금도 손가락이 제대로 구부러지지 않는다.
“우리처럼 정체성 지키는 민족 없어”
“탄광에 들어갈 때 교대하는 광부들이 ‘글뤽 아우프(Glueck Auf)’라고 독일어 인사말을 주고받아요. ‘깊은 갱도에서 무사히 올라와 무사히 지상에서 다시 만나자’는 뜻이 담긴 안부죠. 천 길 땅속에서 석탄을 캐고 번 돈을 고국에 부치던 때를 떠올리면 지금도 가슴이 먹먹해요.”
파독 광부들이 독일 경제 발전에 이바지한 바도 크다. 이민 가정을 꾸리고 자식 교육에 열정을 다한 덕에 2세, 3세들 중에는 의사, 법조인, 교수, 공무원 등 주류 사회에서 활약하는 인재들이 많다. 심 위원은 “우리처럼 노동 이민으로 와서 사는 민족 가운데 자체적인 문화회관을 가지고 고유 정체성을 지키며 활동하는 민족이 없다”며 “그렇기에 통일 운동에 전념을 다하고 있다”고 말했다.
올해는 파독 광부 60주년이자 한독 수교 140주년이다. 독일 한인사회의 뿌리가 된 파독 광부 복지기관 글뤽아우프와 재독한인간호사협회 등 각종 단체와 한인회 관할 공간 등 각계각층의 관계자가 한자리에 모여 한 해의 첫발을 내디뎠다. 파독 광부 복지기관은 이국 땅 갱도에서 힘겨운 일을 해온 우리 광부들의 이야기를 담은 책자를 발간하는 등 기념사업을 준비하고 있다. 심 위원은 “이러한 행사는 독일인에게 남북통일의 중요성과 필요성을 전달하는 통로 역할이 된다”며 “독일 탄광에서 산업화의 꿈을 일구던 정신으로 남북통일 토대를 마련하는 데 앞장서겠다”고 다짐했다.
박소향 파독광부간호사기념회관 사무총장,
북유럽협의회 간사
“파독 간호사 헌신 ‘한강의 기적’ 이뤘듯
우리의 통일운동이 남북통일 불씨 되길”
“독일 현지인들에게 ‘파독 간호사의 헌신 덕분에 한반도의 상황을 알게 됐다’는 말을 많이 들었어요. 그만큼 부담감과 책임감이 커요. 제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현지인들에게 남북관계의 상황을 더 알려줄 수도 있으니까요.”
파독광부간호사기념회관 사무총장으로 독일 현지에 거주하는 박소향 북유럽협의회 간사의 얘기다. 대구 한 의과대학 수술실 간호사로 근무하던 박 간사는 진로를 고민하다 국내 의료기관보다는 해외 병원 근무로 방향을 정하고 1978년 9월 북아프리카 리비아 근무를 자원했다. 박 간사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한다.
“간호사는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일할 수 있는 직업이잖아요. 국위 선양하며 돈도 벌고 넓은 세상을 경험해보자는 생각으로 지원했죠.”
독일에 고국 알리려 한국 지도 가지고 다녀
박 간사는 리비아에서 1년 남짓 근무하는 동안 심장병원 수술실과 병동 등을 두루 거쳤다. 그가 리비아에서 독일로 인생의 항로를 바꾼 계기는 환자 병문안을 온 파란 눈을 가진 독일인 기술자 롤프 슈베르트페거 씨와 운명적으로 만나면서다. 박 간사는 1979년 9월 병원 생활을 정리한 뒤 롤프 슈베르트페거 씨와 1980년 한국과 독일을 오가며 결혼식을 두 번 올렸다. 1980년대만 해도 분단국가였던 독일의 서베를린은 제도와 시스템이 불완전한 상태였다. 그럼에도 박 간사는 남편에 대한 사랑과 믿음으로 독일 병원에서 간호사로 근무하며 살았다.
당시 서독에는 1966년부터 1976년까지 파견된 간호사와 간호조무사 1만여 명이 독일 각지 병원에 흩어져 근무하고 있었다. 박 간사는 이들과 함께 친절과 성실, 전문성으로 환자를 대했다. 당시 독일이 현지 의료 수준과 시정에 맞는 보건의료 시스템을 구축할 수 있었던 데는 파독 간호사들의 기여가 컸다. 덕분에 현지인들로부터 ‘블루 엔젤’이라는 별칭도 얻었다. 화이트가 아닌 블루라고 붙여진 것은 간호사라는 직업이 노동자만큼 일이 힘들어 다들 기피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독일 현지 병원에서 근무하며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병원 동료가 “중국, 일본은 어디에 있는지 알겠는데, 대체 한국은 어디에 있는 나라냐”고 물어봤을 때다. 그날을 기점으로 박 간사는 병원 동료와 독일인에게 고국을 알리기 위해 한국 지도를 크게 복사해 가방에 넣고 다니며 설명해줬다.
그때의 경험 때문인지 몰라도 독일에 거주하면서 박 간사는 한국의 통일 운동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동독과 서독의 통일 과정과 경제 발전을 지켜보던 차에 파독광부간호사기념관 사무총장 자리가 빈 것은 그에게 기회였다. 올해는 대한간호협회가 탄생한 지 100주년이 되는 뜻깊은 해라 나이팅게일 탄생일인 5월 12일에 맞춰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성대하게 통일 및 문화 행사를 개최하기도 했다. 박 간사는 "파독 근로자들의 결속과 우애를 증진시키는 일에 앞장서온 경험을 토대로 민주평통 북유럽협의회 자문위원 활동에 매진하겠다"고 밝혔다.
“파독 근로자 2~3세 한국 방문 프로그램 필요”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조국 근대화 업적과 유산을 전파하며 동포 2세대들에게 한국의 긍지를 심어주고 갈 길을 제시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1960년대, 1970년대 우리가 보낸 돈이 한강의 기적 토대가 됐듯, 우리의 평화통일 활동이 남북통일의 불씨가 되기를 바랍니다. 앞으로도 조국과 동포사회에서 자유민주주의에 기반한 남북통일 여론을 조성하는 데 앞장서겠습니다.”
박 간사의 바람은 재외 한인 간호사들이 고국에 저렴하게 묵을 수 있는 숙소가 마련되는 것이다. 국위 선양과 국가 경제 발전을 위해 머나먼 독일에서 갖은 고생을 한 파독 간호사들이 이제는 70대 중반, 80대 초반으로 연로한 세대로 접어들었다. 오랜만에 고국을 찾아와도 남아 있는 부모 형제가 없으니 마땅히 지낼 만한 곳을 찾기 힘든 실정이다.
“파독 근로자를 위한 공동거주지가 마련된다면 고국에 입국할 분들이 적지 않을 겁니다. 대부분 독일의 연금을 받고 있으니 고국이 거처를 제공해준다면 월세를 내더라도 돌아가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에요. 파독 근로자들의 2세, 3세를 위한 한국 방문 프로그램도 마련되면 좋겠어요. 차세대의 정체성 확립에 큰 도움이 될 거예요. 한국과 독일에 거주하는 젊은이들이 교류하면서 대한민국 발전에 기여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