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통일 Vol 2052023.11.

동화 속 풍경처럼 아름답고 전원적인 강원 인제군 서화리 마을. 북한 내금강과 거리는 불과 20km에 불과하다.

걸어서 155마일

⑩ 강원도 인제군

통일 꿈꾸는 영화 속 마을
하루하루 ‘살아가는 기적’을 찍다

무더위가 이듬해를 기약하고 물러갈 즈음, 낙엽이 곱게 물들고 찬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봄은 소걸음으로 다가오고 가을은 잰걸음으로 달아난다고 하던가. 바삐 달아나는 가을을 뒤쫓아 강원도 깊고 깊은 첩첩산중으로 향했다.

겨울이 긴 만큼 강원도 인제군의 가을은 일찍이 찾아온다. 북위 38도, 위도상 국내 최북단에 위치한 인제군으로 가는 길은 가을빛이 현란했다. 하늘을 찌를 듯 쭉쭉 뻗은 자작나무 아래엔 키 작은 생강나무의 붉고 샛노란 단풍이 울긋불긋하다. 길가에서 하늘거리는 코스모스와 누렇게 익어가는 벼도 가을 낭만과 운치를 한결 더한다.

인제군은 6·25전쟁 당시 38선을 경계로 북한군 제12사단이 주둔했던 지역이다. 인천상륙작전 직후 국군이 되찾았고, 1·4후퇴 때 다시 적에게 내주고 말았으나 국군은 반격작전을 펼쳐 무너진 중동부전선을 회복하고 북진 기반을 구축하게 된다.

6·25전쟁 최대 격전지 중 하나였던 인제군 서화리는 1955년까지 군사작전 지역으로 활용되다 1958년 3월부터 민간인이 들어가 살게 됐다. 동쪽으로 고성군, 서쪽으로는 양구군, 북쪽으론 휴전선에 인접해 있다. 서화리는 서화 1리와 서화 2리로 나뉜다. 서화 2리는 휴전선 앞 민간인이 거주할 수 있는 인제군의 최북단 마을이다. 북한 내금강과의 거리는 불과 20㎞에 불과하다.

인제 최북단 접경마을 서화리
서화 2리에 들어서면 전방 분위기가 물씬 난다. 다른 접경지역도 그렇지만 서화 2리도 지형이 독특하다. 동부전선 양구의 험한 지형과 중부전선 철원의 평야 지형이 반씩 섞인 모양새다. 곡선형 철책을 따라 늘어선 군부대와 삭막한 콘크리트 포장 구간이 적지 않지만, 가운데 평탄한 곳에는 수풀이 우거졌다. 그 덕에 첩첩산중에도 서화 2리를 찾아가는 길은 비교적 수월했다.

서화 2리에는 191가구 307명이 거주한다(2023년 9월 기준). 서화 2리 이장 박찬수 씨는 이곳을 기반으로 농사를 지어온 부모의 뒤를 이어 정착한 2세대다. 도시에서 30년 동안 직장생활을 마무리한 뒤 2021년 이곳으로 내려왔다. 유년을 보낸 곳이라 그의 기억 저편에는 마을 주민들이 산과 들, 개천에서 대전차 지뢰를 잘못 밟아 사망하거나 다치던 사고가 또렷하게 남아 있다. 박 씨는 “고사리, 더덕 등 나물을 캐러 산에 올라갔다가 일을 당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말했다.

도시에서의 직장생활을 마무리하고 서화 2리로 귀향한 뒤 마을이장을 맡고 있는 박찬수 씨.

이 마을엔 65세 이상 노년층이 많다. 10대와 청년층은 30여 명밖에 안 된다. 주민의 절반이 군인을 포함해 도시에서 온 사람들이고, 땅은 대부분 외지인 소유다. 외지인에게 땅을 임대해 농사를 짓는 이가 적잖다. 주민들은 농사도 짓지만 휴가나 외박 나온 군인을 상대로 음식업이나 숙박업에 종사한다.

한때는 이 마을에 식당, 카페, 숙박시설 등 상가가 70곳에 이를 정도로 성업한 적도 있었다. 근래 들어 장병 출타 가능 지역 범위가 완화돼 속초까지 외박이 가능해지면서 이곳 상권 사정은 예전 같지 않다. 통일은 이곳 주민의 희망이다. 남과 북이 통일되면 인제군이 인적, 물적 교류의 중심지로 떠오를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박 씨가 매봉산 중턱을 가리키며 한번 올라가보길 권했다.

서화 2리 마을 주민들과 마을영화를 만드는 신씨 가족. 왼쪽부터 이은경 씨, 신하늬 양, 신하륵 군, 신지승 씨.

“도시에서 직장생활을 하다가 명예퇴직 후 마을로 돌아온 이들이 적지 않아요. 그들을 인적자원으로 삼아 평화 및 생태 관광사업을 추진하면 얼마나 좋겠어요. 저 휴전선만 없다면 여기서 최단 거리로 금강산을 갈 수 있다고요. 산에 올라가 마을을 한번 굽어보세요.”

차량으로 완만한 매봉산 언덕길을 500m쯤 올랐을까. 덕세산과 명당산, 매봉산 줄기가 마을을 호위무사처럼 늠름하게 지키고 있는 풍광을 처음 마주한 이들은 하나같이 탄성을 연발한다. 아득한 옛날부터 우리 민족이 터를 잡은 땅인데도, 반듯하게 난 길 사이로 민가가 줄지어 늘어선 풍광은 어딘가 모르게 이색적이다. 그 앞으로 자리한 군부대가 눈에 띈다. 어디선가 전쟁에 대비하는 평시훈련이 불쑥 시행될 것만 같다. 순식간에 수천 시간을 뛰어넘어 6·25전쟁 일대의 한복판에 들어선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주민이 연기자이자 스태프인 마을영화
산란했던 마음은 인북천을 자분자분 걷는 동안 차분해졌다. 인북천은 북한 지역과 남한 지역을 모두 지나는 하천이다. 걸음을 멈춘 채 두 팔을 벌려 심호흡을 하니, 서화 2리를 스치는 물소리에 귀 기울이는 여유가 생겼다. 졸졸졸 흐르는 냇물을 따라가면 심적교가 나온다. 인북천의 물빛은 한층 맑고 푸르다.

접경지역 산골인 서화 2리가 세간에 주목받게 된 것은 ‘마을극장 DMZ’가 들어서면서부터다. 서화면 서화길 13-17번지에 자리 잡은 마을극장은 신지승·이은경 씨 부부가 2017년 겨울 조성했다. 영화감독인 신 씨가 마을극장 DMZ가 주최하는 ‘끄트머리 국제마을영화제 집행위원장’을 맡고, PD인 이 씨가 마을극장 DMZ를 도맡아 운영하고 있다.

6 ·25전쟁에 참전한 미국 리빙스턴 소위의 자유 수호의 투혼과 넋이 서려 있는 리빙스턴교.

마을극장 DMZ는 신 씨 부부와 이란썽 쌍둥이 남매인 신하륵 군과 신하늬 양이 사는 살림집이자 복합문화공간이다. 이곳을 거점으로 영화를 제작·편집·상영하고 각종 행사를 개최한다. ‘레지던스’라는 문패를 달고 작가가 머물며 작업할 수 있는 공간도 제공한다. 강원도 DMZ 테마 관광벤처 육성사업에 선정되면서 전국 각지에서 시민들의 발길이 줄을 잇는다.

6 ·25전쟁 당시 인제 지구의 공방전에서 산화한 호국영령들의 넋을 기리고 승전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인제지구 전투 전적비.

신 씨는 독립영화를 찍다 2001년부터 마을영화라는 장르를 개척했다. 영화판에서 인연을 맺은 이 씨와 가정을 꾸린 뒤 경기도 양평에 정착했다. 그때 마을 주민과 가까워지며 마을 공간을 배경으로 주민이 출연하는 영화를 제작하게 됐다. 제주에서 경남 창녕에 이르기까지 전국 각지 100여 곳의 마을을 돌며 만든 마을영화가 100편을 훌쩍 넘는다.

신 씨 가족은 2017년 양평 자택이 불에 타면서 강원도 속초, 강릉을 거쳐 인제로 흘러들어오게 됐다. 이 과정을 영화로 찍은 다큐멘터리 ‘길 위의 빛들’은 2019년 DMZ국제다큐멘터리국제영화제에 초청받았다. 마을 주민들은 연기자이자 스태프가 됐다. 살면서 영화라고는 경험한 적 없던 어르신들도 마을영화의 배우가 됐다. 다큐멘터리 영화 ‘살아가는 기적’은 서화리 마을 주민들이 주연으로 참여한 작품이다.

“남북, 어울려 살아야 평화 이야기도 할 수 있어”
신 씨가 기획한 끄트머리 국제마을영화제는 마을과 지역을 테마로 한 세계 최초 영화제다. 2018년 서화 2리에서 조촐하게 시작한 마을영화제가 2020년부터 국제마을영화제로 커졌다. 9월 개최한 4회 끄트머리 국제마을영화제에는 외국인 영화감독 7명이 참여하기도 했다.

한국DMZ평화생명동산은 DMZ의 가치를 세계화하고자 하는 목적을 갖고 조성됐다.

신 씨는 “마을극장 DMZ는 단순히 문화예술 콘텐츠를 제작하는 곳이 아니라 한반도의 가능성과 희망을 불어넣는 보금자리”라면서 “북한을 마주한 접경마을에서 찍은 마을영화를 전 세계인과 관람하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 신 씨 머리 위로 가을볕이 쏟아진다. 그는 오늘도 남북한 주민들이 어울려 평화를 이야기하는 ‘끄트머리 남북마을영화제’를 상상한다.

“철조망으로 남과 북을 막으면 더는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겠죠. 하지만 그 상태가 온전한 평화는 아니죠. 사람들이 어울려 살아갈 수 있는 상태라야 평화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거예요. 남과 북에서 만든 마을영화를 함께 감상하며 축제를 벌이는 날이 오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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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빙스턴교
6·25전쟁 당시 유엔군으로 참전한 미 제10군단 소속 리빙스턴 소위의 이름에서 유래됐다. 리빙스턴 소위의 부대는 1951년 6월 10일 인제지구 전투에 참가해 적군의 기습을 받아 후퇴하던 중 교량이 없어 홍수로 불어난 인북천을 맨몸으로 건너다가 적의 공격에 사살됐다. 후배들의 죽음을 안타깝게 여기던 리빙스턴 소위가 부인에게 교량을 지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의 부인은 1957년 12월 4일 길이 150m, 폭 148m 길이의 목제 다리를 놓았다. 붉게 색칠돼 일명 ‘붉은 다리’라고도 불린다.
인제지구 전투 전적비
6·25전쟁 당시 중동부전선의 군사적 요충지였던 인제지구의 공방전에서 산화한 호국영령들의 넋을 기리고 승전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전적비다. 인제읍 시가지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군축령 중턱에 위치해 있다. 전적비는 육군 제3군단이 1958년 3월 인제 내린천과 소양강이 만나는 곳에 세웠으나 1986년 합강교 인근 도로 확·포장 공사로 군축공원으로 옮겨졌다가 1995년 또다시 도로가 개설되면서 현재 위치로 이설됐다. 2022년 6월 25일 인제군은 군민들에게 기증받은 꽃나무와 꽃 모종으로 전적비 옆에 호국영령들의 보훈화원을 조성했다.
한국DMZ평화생명동산
6·25전쟁 서화지구 전투가 벌어진 인제군 금강로 1630번지에 조성된 공원이다. 비무장지대(DMZ) 일원의 생태계와 역사, 문화를 올바르게 보전하면서 지역 주민의 삶의 질을 높이는 방향을 모색하며, DMZ의 가치와 역사성, 역설성, 다중성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만들어졌다. 대암산 용늪과 자연 생태 늪이 있는 서화면에 자리 잡고 있어 DMZ의 자연과 생명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독특한 단지 구성과 구성은 한반도의 단절과 소통을 표현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