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탈주민 정착 이야기
전남 강진 은영수산 이은영 대표
“북한 여군에서 남한 어부로
바다에서 ‘부자의 꿈’ 일구다”
새벽 4시 30분. 어부가 잠을 깬다. 달빛은 밝고 바람은 차다. 전라남도 강진군 마량 앞바다는 전복을 실어 나르는 배로 문전성시를 이룬다. 그 바다에 면한 마량리는 우리나라 서남부 최남단에 들어선 어촌마을이다. 완도 다도해와 제주도를 연결하는 청정해역을 끼고 있어 돔, 농어, 우럭, 주꾸미 등 바다낚시의 보고로 불린다.
은영수산 대표 이은영(52) 씨에게 마량리 바다는 몸으로 일군 터전이다. 그의 회사는 전라남도 강진군 마량리 바다에서 가두리로 전복을 키운다. 전복 선별이며 포장 등의 작업은 마량항에서 자동차로 5분 거리에 마련된 집 옆의 작업장에서 진행한다.
이 씨의 하루는 바다와 양식장, 작업장을 부지런히 오가면서 시작된다. 이제 이 씨는 누가 봐도 똑소리 나는 바다 사람이 다 됐다. 양식장 일은 이 씨 남편 김성호(58) 씨 담당이지만, 뭍에 가져온 뒤에는 이 씨가 공을 넘겨받는다. 이제 갓 수확한 전복은 작업장으로 옮겨 크기별로 선별한 뒤 전처리 과정을 거친 뒤 납품할 예정이다. 전복 포장이며 판매, 고객 응대 대부분을 이 씨가 도맡는다. 어느덧 은영수산은 약 3306㎡(1000평)의 양식장에서 거두는 연간 매출이 20억~30억 원. 강진군에서 전복 양식 생산량 2위, 전라도에서는 다섯 손가락 안에 들 만큼 양식장이 제법 자리를 잡았다.
어느 삶이 방향 잡은 대로만 흘러갈까. 이 씨는 바닷가로 시집을 오기 전만 해도 해산물을 만질 줄도 몰랐다. 전복은 우리나라에서는 널리 알려진 수산물이지만 이 씨에겐 낯선 존재였다. 전복 양식 초창기에는 그날 바다에서 따온 전복을 곧바로 고객에게 전달했다가 시들어 죽는 사고가 번번이 발생하는 등 시행착오도 많았다. 만 3년을 꼬박 키운 전복을 제대로 팔아보지도 못하고 버려야 했던 아픔도 겪었다. 그럼에도 전복에 이 씨 가족의 내일을 걸었기에 포기할 수는 없었다. 전복의 특성을 이해하고 깨닫고 나서 수조에서 2~3일 전복을 적응시킨 뒤 고객에게 전달했더니 문제가 단박에 해결됐다. 이 씨는 전복을 키운 지 8년 만에 자타공인 전복 전문가가 됐다.
황해북도 사리원에서 나고 자란 이 씨가 남편을 따라 강진 마량리에 정착해 바닷일을 시작한 것이 15년 전. 이 씨는 “나에게 두 번째 삶을 선물해준 바다에서 새로운 가족을 만들며 단단히 뿌리내리는 중”이라고 말했다. 어떻게 북녘에서 온 그가 이곳 강진 바다에 정착해 살게 됐을까.
식당 취업 후 자본주의 사회의 주인의식 터득
사연은 25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씨의 아버지는 북한에서 2급 기업소에서 당 비서로 일했다. 이 기업소에 근무하는 노동자만 줄잡아 4000명에 달할 정도로 규모가 제법 컸다. 이 씨 부모는 맏딸을 대학에 진학시키기 위해 엄하게 키웠다. 부모의 사랑과 보호가 한창 감수성 예민하던 이 씨에게 억압처럼 느껴졌다. 그때 이 씨 눈에 들어온 것이 입대였다. 군대는 나라를 지키는 병사들이 모인 곳이기에 자부심과 긍지를 느끼며 복무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이 씨는 1992년 돌연 군대에 입대했다.
양강도 혜산시 부대에 배치받았다. 그로부터 6년 7개월이 흘렀다. 이 씨는 부모 아래에서 누리던 안온한 생활을 포기한 자신의 선택을 이내 후회했다. 군인들도 고난의 행군(1996년부터 1999년 사이에 일어난 대기근과 체제 붕괴 위기)은 피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소련이 붕괴하자 부대 물자 지원이 뚝 끊겨 생활과 부대시설이 처참한 수준으로 전락했다. 당시 군에서 외화벌이 사업으로 식량을 구하기 위해 중국을 오가는 경우가 흔했다. 이 씨도 나진·선봉에서 중국으로 넘나들기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그곳에서 일본인을 비롯한 외국인 장사꾼들과 접촉할 기회가 많아졌다. 그 시절 그들의 생활도 지근거리에서 엿볼 수 있었다. 그제야 이 씨는 북한에서 세뇌받은 교육이 잘못된 것임을 비로소 깨달았다. 제대 3개월을 앞두고 북한을 떠나겠다고 결심하며 마음의 보따리를 싼 것도 이 무렵이었다. 1998년 이 씨를 포함한 14명이 북한을 집단 탈출했다. 중국으로 넘어갔다가 다시 북으로 돌아가지 않고 한국행을 택했다. 2001년의 일이었다.
이 씨가 남한 사회에 정착하며 자본주의 사회의 주인의식을 제대로 배운 건 동네 식당 종합원으로 취직하면서부터다. ‘하면 된다’는 정신으로 근무하자 식당 사장이 이 씨를 눈여겨보기 시작했다. 사장은 이 씨에게 경영 비전과 경영 방침을 가르쳐줬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성과를 얻고자 하는 개인의 욕구를 충족시키고 잠재된 역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이끌어줬다. 한층 안정적인 모습으로 남한 사회에 적응하려던 그 시절 자신의 모습을 떠올릴 때면 스스로도 인생의 진한 맛을 느낀다.
결혼 후 강진에 정착, 빚 갚고 전복 양식 도전
“그때 경험이 내가 자본주의 체제에 녹아들게 된 계기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열심히 일하는 대가로 성과를 얻을 수 있다는 것, 정보 자체가 돈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됐죠.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도 대한민국이라는 세계 속에 발돋움할 수 있었습니다.”
국적을 바꿔도 타지에서의 생활은 외로웠다. 그때 지인의 소개로 운명적으로 만난 이가 남편 김 씨다. 첫눈에 반한 두 사람은 400km 넘는 거리를 오가며 연애를 했다. 사실 이 씨가 가정을 꾸리게 된 데는 북에 남은 어머니의 권유가 컸다. 탈북자 대부분이 북한에서의 삶과 가족을 버리고 탈출한 일을 마음에 죄로 담아두고 있다. 이런 혼란이 마음의 병으로 연결된 경우가 많다. 이 씨도 다르지 않다.
“남한에 정착한 뒤 부모님을 이곳으로 모시고 오려고 20년 넘게 설득하며 부단히 애를 썼어요. 내 마음대로 가족을 버리고 남한으로 온 데 대한 미안한 마음을 사과하고 싶었어요. 한국으로 올 기회도 많았는데, 결국 성사되지 않았고요. 어느 날 어머니가 ‘네가 남한에 정착해 돈을 번다 해도 마음을 둘 데가 없어 자꾸 나에게 연락하는 것 같으니, 이제는 가정을 꾸리면 좋겠다’고 하시더군요. 그 얘기가 내 마음을 움직여 남편과 부부의 연을 맺게 했죠. 이후 어머니가 10년간 없던 병이 생겨서 나를 그리워하며 돌아가셨다는 얘기를 듣고 많이 울었습니다.”
새 가족을 만들며 이 씨의 인생은 예전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던 모습으로 천천히 변하게 됐다. 강진마량면에 처음 들어온 것이 2011년. 당시 남편 김 씨에게는 3억 원의 빚이 있었다. 김 씨는 강진 마량해에서 주꾸미와 문어를 잡았는데 수익은 쏠쏠했다. 주꾸미를 수확해 판 대가로 하루 만에 135만 원이 수중에 들어오는 걸 보고 이 씨는 입을 다물 수 없었다고 한다. 김 씨를 설득해 주꾸미 수확 횟수를 늘렸다. 하루에 두 번, 한 달에 스무 날을 꼬박 주꾸미를 수확하며 빚을 모조리 갚았다. 그러고는 2015년부터 전복 양식사업에 뛰어들었다. 정부의 양식사업 장려책을 믿고 내린 결정이었다. 정부 지원금과 은행 대출금을 상환하기 위해 부부는 새벽 4시 30분이면 ‘물을 보러’ 어김없이 바다로 나갔다.
전남 강진군 마량리에 자리 잡은 김성호 · 이은영 부부.
김 씨 부부는 사업 규모가 확장되자 북한이탈주민과 외국인 노동자, 주민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했다. 강진군에서 지원하는 탈북민 어촌 정착 프로그램의 멘토로도 참여해 정착 경험을 전수하고 있다. 지금도 이들에게 전복 양식 경영 방침과 노하우를 공유한다.
“정착 당시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받은 정착지원금이 3000만 원이었습니다. 그때 얼마나 황홀하고 감사하던지요. 무일푼이던 저에게는 큰돈이었으니까요. 지금 이 자리에 있을 수 있던 건 정착지원금 덕분이라고 생각해요. 수익 일부를 쪼개 사회에도 환원하기로 결심했고, 정착지원금의 10배 넘는 금액을 보육원에 기부했습니다. 2021년엔 강진군민장학재단에 저소득층 학생을 위한 장학금을 기탁했어요.”
군 생활을 하며 객지에서 보낸 20대와 탈북해 대한민국에 정착하기까지 떠돌아야 했던 30대를 지나 이씨는 40대에 들어서야 비로소 한곳에 마음을 붙일 수 있었다. 그의 나이 마흔다섯에 얻은 늦둥이 아들의 재롱을 보는 것은 예전에 없던 기쁨이고 재미다. 이 씨는 “부모가 돼봐야 제 부모 마음을 가늠할 수 있다는 말을 실감한다”고 했다.
바다 농사 짓다 보니 인생도 무르익어
아이가 깨기 전 아침 일찍 일어나 살림하는 것도 예전에 없던 재미다. 요즘은 움직이는 데마다 흔적을 남기는 아들 덕에 치워도 치워도 할 일은 끝이 없다. 바다를 낀 둔덕에서 따사로운 볕 아래 빨래를 너는 즐거움을 알게 된 것 역시 강진에 터를 잡고 나서다.
“북에서 자랄 때도, 군복무를 할 때도 줄곧 도시에서 살았던 터라 이렇게 자연과 가까이 지내는 일은 처음 겪는 일이거든요. 이제는 시골살이의 즐거움을 알 것 같아요. 얼핏 단조로워 보이는 일상이 부침 많은 삶을 겪은 내가 늘 꿈꾸던 최고의 행복이라는 사실도요.”
이은영 대표가 운영하는 ‘은영수산’은 강진군에서 전복 양식 생산량 2위, 전라도에서는 다섯 손가락 안에 들 만큼 제법 자리를 잡았다.
이 씨에게는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 1차 산업인 바다 농사에 대한 정부의 지원책이 지금보다 촘촘하게 마련되는 것이다. 농업인보다 유통사가 이득을 보는 지원금 구조도 속히 손봐야 할 대목이라는 게 이 씨 생각이다. 이 씨가 진정 바라는 것은 농업인이 자긍심을 누릴 수 있는 세상인 것이다.
“전복은 만 3년은 길러야 출하를 할 수 있기에 그전까지는 수입을 기대하기 어려워요. 수익이 없는 상황에서 투자를 이어가야 하는 데다 전복 가격이 떨어질라 치면 마음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죠. 같은 업종에 종사하는 이들 가운데 주저앉은 경우도 숱해요. 이런 와중에 전복 양식을 시작한 지 5년 차부터 양식장은 일손이 모자랄 정도로 크게 성장했어요. 내 노력만으로 일군 것이라고 할 수 있나요. 정부와 지자체, 주민들의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도 이 씨는 수평선을 박차고 붉은 해가 떠오르면 일터로 발걸음을 옮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