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단
2024년 하반기 한반도 정세 진단과 전망
北 ‘대남 적대 전략’ 강화로 긴장 고조
연말 美 대선 결과가 가장 큰 변수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오물 풍선 살포와 핵·미사일 도발 등으로 한반도에
긴장을 조장하면서도 올해 초 예고했던 헌법 개정을 포함한 남북관계 관련
조치들은 아직 시행하지 않고 있다. 연말로 예정된 미국 대선 결과에 따라 변화할
가능성을 암시하는 것일까. 남북관계를 중심으로 올해 하반기 한반도 정세를
전망해봤다.
북한은 올해 상반기 김성남 노동당 국제부장의 사회주의 우호국 순방, 푸틴 방북과 러·북 신조약 체결, 주요국 대사 신규 임명 등을 통해 대외 전략의 영역을 단계적으로 확장해왔다. 북한 대외 전략 변화의 배경에는 미·중 갈등 지속과 우크라이나 전쟁 장기화, 중동 정세 악화 등 국제 정세 전반이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작용하고 있다는 판단이 자리 잡고 있다. 유럽과 중동에서 2개의 전선이 펼쳐지면서 북한의 도발에 대한 국제사회의 대응 여력이 줄어들고, 대북 압박을 지속하기 위한 미국의 역량도 소진돼가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반면, 2024년 1월 김정은의 최고인민회의 연설을 통해 지시했던 영토 조항 포함 헌법 개정과 같은 남북관계 차원의 정책들은 6개월이 넘도록 시행하지 않고 있다. 북한은 지난해 연말 노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를 통해 남북관계를 ‘교전 중인 2개의 국가’라고 선언한 직후, 대남 사업 기구를 폐지하고 비무장지대(DMZ) 내 최전방 감시초소(GP)를 복원한 바 있다. 4월부터는 군사분계선 주변에서 대전차 방벽 건설, 동해선 철도 제거, 지뢰 매설 작업 등이 잇따라 목격됐다. 또 5월 말부터는 10여 차례에 걸쳐 오물 풍선을 날려 보내며 대남 심리전을 지속하고 있다. 노동당 통일전선부와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등 대남 사업 기구들을 폐지한 대신 외무성에 대남 사업 조직을 신설할 것이라는 예상도 빗나갔다. 7월 말 압록강 범람으로 인한 수해 발생 이후 대한적십자사의 구호물자 지원 제안조차 거부하며 김정은은 “적은 변할 수 없는 적”이라며 노골적인 비난 세례를 퍼부었다.
北 ‘해상 국경선’ 언급은 처음
김정은이 예고했던 헌법 개정을 포함한 남북관계 관련 조치들은 하반기 한반도 정세를 전망하는 데 핵심적 변수로 작용할 가능성이 커졌다. 2019년 3월에 최고인민회의 14기 대의원 선거가 실시됐으므로 대의원 임기 5년을 감안할 때 새롭게 구성되는 15기 최고인민회의는 상반기 중 출범했어야 한다. 그러나 북한은 별다른 이유를 밝히지 않은 채 최고인민회의 차기 대의원 선거 일정에 대해 침묵하고 있다. 김정은이 지난 1월 최고인민회의 연설에서 헌법 개정 문제를 ‘다음번’ 최고인민회의에서 심의해야 한다고 언급한 것을 감안하면 하반기 중으로는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 공고 → 선거 → 15기 1차 회의 소집’ 등 일련의 과정을 통해 헌법 개정 문제를 마무리할 가능성이 있다. 미국 대선이 치러지는 11월 이전에 15기 대의원 선거를 치르고자 한다면 늦어도 9월 초까지는 선거 공고가 이뤄져야 한다.
물론 북한이 미국 대선 결과에 따라 대외·대남 전략을 다시 설계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최고인민회의 구성을 내년으로 미루고 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북한이 이러한 시나리오대로 움직일 경우 하반기 남북관계는 상반기와 같은 수동적 대치 국면이 지속될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미국 대선 국면으로 말미암아 우리 정부가 대북정책에 대해 상대적으로 무관심할 수밖에 없는 국면을 활용해 북한이 남북관계의 적대적 성격을 제도화하겠다고 나설 가능성에 주목해야 한다.
북한이 지난해 노동당 제8기 9차 전원회의를 통해 천명한 남북 간 적대 관계를 조만간 공식화할 경우 하반기 한반도 정세는 다시 한번 갈등의 파고에 휘말릴 가능성이 크다. 무엇보다 북한이 헌법에 영토와 영해, 영공 조항 신설을 명분으로 남북한 국경선을 명시할 경우 군사적 충돌의 잠재 요인으로 작용하게 될 것이다. 김정은은 이미 지난 1월 최고인민회의 연설을 통해 ‘한반도와 부속도서’라는 우리 헌법 3조의 영토 조항을 문제 삼으며 자신들의 주권 행사 영역을 명확히 규정하겠다고 선언했기 때문이다.
올해 1월 15일 평양 만수대의사당에서 진행된 북한 최고인민회의
제14기 제10차 회의 장면. 상반기 중에 새롭게 구성돼야 할
제15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가 아직도 실시되지 않고 있다.
(평양 노동신문=뉴스1)
특히 남북 간 실질적 해상경계선 역할을 해온 북방 한계선(NLL)을 무시한 채 자신들이 주장하는 ‘해상 국경선’을 헌법에 명시할 경우 서해상 무력 충돌 가능성이 현실화할 수도 있다. 김정은은 이미 지난 2월 NLL을 ‘유령선’이라고 주장하며 서해 연평도와 백령도 북쪽에 별도의 해상 국경선을 언급한 바 있다. 북한은 과거에도 NLL을 인정하지 않았지만 ‘해상 경계선’이나 ‘해상 분계선’ 등의 용어를 사용했을 뿐, 해상 국경선을 들고 나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北 ‘9·9절’ ‘10·10절’ 대남 비난 공세 강화?
북한은 자신들이 주장하는 해상 국경선의 구체적 위치나 좌표를 언급한 적이 없다. 김정은이 지난 2월 해상 미사일 사격시험장을 방문한 자리에서 “서해에 몇 개의 선이 존재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고 주장하며 “우리가 인정하는 해상 국경선을 적이 침범할 경우에 무력 도발로 간주할 것”이라고 강변했을 뿐이다.
현재로서는 북한이 2007년 주장하고 나선 ‘서해 경비계선’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4년 전 북한군 총격으로 사망한 해양수산부 어업지도원의 시신 수색 당시 NLL 남측의 ‘경비계선(북한 주장)’ 북방지역에 걸친 우리 해경의 작전 범위를 문제 삼으며 ‘해상 군사분계선 무단 침범 행위’라고 주장한 바 있기 때문이다. 북한이 자신들의 해상 국경선을 어디에 설정하는지와 관계없이 서해상의 군사적 긴장지수는 높아질 것이다.
DMZ 군사분계선 일대에서 북한이 대전차장벽으로 보이는 장애물을 설치하고 지뢰를 매설하는 등 군사적 긴장 수위를 높이는 것도 하반기 남북관계의 전망을 더욱 어둡게 한다. 북한은 지난 8월 초 신형 전술탄도미사일 발사대를 ‘국경 제1선 부대’에 인수·인계하는 장면을 공개하면서 하반기 대남 위협지수를 높이기도 했다. 지난 5월 발사 직후 공중 폭발한 군사정찰위성 ‘만리경-1-1호’ 추가 발사도 예정돼 있다. 김정은은 정찰위성 발사 실패 이후 국방과학원을 방문해 “실패에 겁을 먹고 위축될 것이 아니라 더 크게 분발하게 될 것”이라며 추가 발사를 예고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광복절 경축사를 통해 남북 당국 간 실무 차원의 ‘대화 협의체’ 설치를 제안했다. 군사적 긴장 완화 방안을 포함해 경제 협력, 인적 왕래, 문화 교류, 재난과 기후변화 대응 등 어떠한 사안이라도 격식에 구애받지 말고 대화에 착수하자는 것이다. 이러한 제안에는 남북 간 군사적 긴장이 한반도 정세 불안을 야기할 뿐만 아니라 북한 주민들의 민생 개선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인식이 자리 잡고 있다. 우리 정부의 수해 지원 제의를 거부한 채 ‘쓰레기’ 발언 등으로 대남 비난에만 몰두하던 북한은 이번에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다.
북한이 남북관계의 긴장을 고조시키며 대남 비난 강도를 높이는 것은 하반기 북한의 대내외 정세 판단에 따른 전략적 계산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대내적으로 북한은 올해 상반기 내내 김정은 우상화를 본격적으로 추진하며 1인 리더십을 공고히 했다. 북한이 최대 명절로 중시해온 김일성 생일 행사에서는 ‘태양절’ 명칭이 사라졌고, 노동당 중앙간부학교 준공식에서는 김정은의 초상화가 김일성·김정일 초상화 옆에 나란히 걸린 장면이 공개됐다. 8월 신의주 수해에서도 ‘노동신문’ 보도의 초점은 재해를 입은 주민들보다 김정은의 ‘애민 행보’에 맞춰졌다. 수해 현장에서도 김정은은 남한을 향해 고강도 비난 발언을 지속했다.
김정은이 최고인민회의 연설을 통해 ‘남북한은 전쟁 중’이라는 메시지를 발신한 이상 남북관계를 긴장 국면으로 몰고 가면 갈수록 통치 기반 공고화에는 ‘실보다는 득’이라는 계산법이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9월 9일 정권 수립 기념일과 10월 10일 노동당 창건 기념일을 계기로 김정은 우상화를 뒷받침하기 위한 대남 비난 공세는 더욱 고조될 가능성이 크다. 또 10월 17일은 김정은이 ‘새 시대 5대 당 건설노선’을 제시한 지 2주년으로, 사상과 조직 등 당의 기강을 강화하기 위한 내부 행사를 대대적으로 개최할 것으로 보인다.
한반도 정치·군사적 긴장 불가피할 듯
2024년 하반기 북한의 대외 전략 시계는 미국 대선 결과에 대비한 대미 전략 정비, 러·북 신조약 후속 절차 이행, 대중 관계 회복을 위한 환경 정비 등으로 더욱 분주하게 돌아갈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북한은 이러한 대외 전략의 확대 균형을 도모하기 위해서도 대남 전략의 비중을 줄여가는 동시에, 대남 적개심 고취를 위해 내부 선전·선동을 강화할 것으로 예상된다. 윤 대통령의 광복절 대북 제안을 수용하기보다는 거부 또는 무시전략으로 일관할 것으로 예상되는 이유도 이러한 배경에 따른 것이다.
7월 27일 미네소타주 세인트클라우드에서 열린 선거 유세를 마무리하는 공화당 대통령 후보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 (AP=뉴시스)
11월 미국 대선에서 트럼프 후보가 당선될 경우 김정은과의 정상회담을 예고하고 있는 상황에서 북한은 러시아가 주도하는 국제기구 가입 가능성을 시사하며 대미 협상력을 높이고자 할 것이다. 러·북 신조약 제7조는 양국 중 어느 한 나라가 가입하고 있는 국제 및 지역기구에 가입하는 것을 ‘협조하며 지지한다’고 명시한 바 있다. 지난해 김정은의 러시아 방문 직후부터 러시아 측 고위 관계자들은 러시아가 주도하는 국제 및 지역기구에 북한이 참여할 경우 한반도 정세 안정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주장을 펼쳐오기도 했다. 노동신문도 구소련 공화국 중심의 집단안보조약기구(CSTO)나 브릭스(BRICS)와 같은 러시아 주도 국제협력기구의 활동을 보도하며 국제 질서 내 반미 블럭 강화라는 논조를 강화하고 있다. 오는 10월말 러시아 카잔에서 열리는 브릭스 정상회의를 전후해 러시아가 북한의 참여 가능성을 타진할 수도 있다는 전망이 나오는 이유다.
2024년 하반기 북한은 대외 전략 확대와 대남 적대시 전략 제도화라는 목표를 관철함으로써 김정은의 지도력 기반을 강화하고자 할 것으로 예상된다. 러·북 신조약 체결 이후 사회주의 우호국 간 단결과 러시아 주도 국제 협력 시스템에 편승하려는 시도도 가시화할 수 있다. 북한이 국제사회의 인도적 지원과 대화 제의를 거부한 채 자력갱생과 대남 적대 관계 프레임을 공고화할수록 한반도의 정치·군사적 긴장은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성 기 영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수석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