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통일 Vol 2112024.9·10

임진왜란 때 노량해전이 펼쳐진 곳에 세워진 웅장한 노량대교(오른쪽)와 미국 금문교를 빼닮은 아름다운 자태의 남해대교(왼쪽).

파랑길에서 만나는 통일④

남해 남파랑길-하동

조국 위해 산화한 무명용사·학도병
바닷길 따라 잊혀진 역사 되찾다

하동은 섬진강을 사이에 두고 영호남이 만나는 곳이다. 그런가 하면 섬진강변에서 시작되는 우리 땅의 새봄을 처음으로 맞이하는 곳이다. 섬진강은 전북 진안에서 발원해 하동 앞바다로 내려가는데, 남파랑길 47코스는 남해대교와 노량대교 부근에서 출발해 섬진강을 따라올라 전남 광양으로 넘어가는 섬진교 아래에서 끝맺는다. 길이 27.6km에 이르는, 남파랑길 90개 코스(우회 코스 제외) 중에서 가장 길지만 비교적 경사가 야트막하고 호젓해 걷기에 부담이 없다. 여행자를 맞이하는 시점인 남해대교와 노량대교는 옛날 임진왜란 당시 노량해전이 일어난 장소로, 특히 노량대교는 이순신 장군의 학익진을 모티브로 디자인됐다. 노량대교 홍보관 옥상에 오르면 왼편으로 남해대교, 오른편으로 노량대교의 웅장한 모습을 한눈에 담을 수 있다.

두 다리 아래에 자리한 노량항은 몇몇 어선들이 평화롭게 오가고 크고 작은 식당들이 늘어선 여느 어촌 항구들과 다를 바 없다. 지금이야 한가롭게 보이지만 74년 전 6·25전쟁 때에는 호남 전선에서 밀려들어온 국군 부상자들을 긴급히 배에 태우고 부산으로 보내는 중요한 거점이었다.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고통스러워했을 장병들로 가득했던 흔적은 다 지워지고 없지만 그때의 모습이 그려지며 적이 숙연해지고 먹먹한 기분이 든다.

신월습지와 하동포구 사이에 천연 생태를 간직한 대나무숲이 널찍이 펼쳐져 장관을 이룬다.
걷거나 바라보거나 그리고 기억하거나
하동의 새벽은 신월습지(섬진강습지공원)에 물안개가 낀 대나무 숲 사이로 잠시 나타나는 철새 떼로부터 시작된다. 이른 시간, 조용한 섬진강에는 여름 철새인 후투티를 비롯해 할미새, 오리 떼 등 갖가지 새들이 잠들어 있다. 해가 떠오르고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가 들리자 어느새 잠이 깬 듯 새들은 후드득 어디론가 날아가버린다.

남파랑길을 걷다 보면 만나게 되는 섬진강은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풍광도 아름답다. 길게 드리워진 섬진강은 길을 따라 걷는 사람들에게, 자전거 하이킹을 하는 사람들에게 친근한 길 안내자가 된다.

신월습지에서 위로 조금만 걸으면 하동포구를 끼고 있는 목도공원이 나온다. 평일이라 그런지 사람은 한적하고, 물 위를 유유자적 휘젓고 다니는 오리들이 사람 수보다 더 많다. 그 길을 따라 곧장 걸으니 1시간여 만에 하모니 철교에 이르고, 넓어진 길로 이어지며 키 큰 소나무가 들어찬 하동송림(천연기념물 제445호)이 나온다. 여기는 조선 영조 대에 도호부사였던 전천상이 강바람과 모래바람으로 농사를 망치는 것을 막기 위해 1500여 그루의 소나무를 심어 오늘날 숲을 이룬 곳이다. 국내에서 손에 꼽히는 노송 숲인데, 앞쪽 섬진강과 넓은 백사장이 잘 어우러져 지나는 사람들이 발걸음을 쉬어가는 명소다. 백사장 앞까지 바닷물이 섞여 들어오기도 해서 내륙에 있는 해수욕장이라 해도 틀리지 않을 터다.

6·25전쟁 때 하동전투에서 다친 수많은 부상병들을 태운 선박들이 노량항에서 출발했다.
하동송림에서 북쪽으로 난 얕은 언덕에서 바라보이는 하동공원에는 처음 공원이 만들어지기 전부터 있었던 충혼탑, 섬호정이 있다. 현재 개축된 충혼탑은 6·25전쟁 때 이 땅을 지키려다 숨진 용사들을 기리기 위해 1985년 세워졌다. 전쟁 초반 하동 사람들은 변변한 무기 없이 북한의 침략에 맞서 싸웠고, 특히 많은 청년과 학도병들이 전사하거나 부상하는 등 처절한 사투를 벌였다.

예부터 하동은 섬진강을 사이에 두고 영호남을 가르는 요충지였기 때문에 16세기 말 임진왜란 때는 왜군의 호남 진출을 저지하는 자연 보루였고, 6·25전쟁 때는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하기까지 시간을 벌기 위한 지연전이 펼쳐진 지역이었다. 지금도 6·25전쟁 당시의 계동전투와 화개전투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때 국군은 육군참모총장을 지냈던 채병덕 장군이 미군과 함께 하동 사수를 위해 맞섰으며, 채 장군이 전사하고 한미 양국 군인 400여 명이 목숨을 잃었지만 결과적으로는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할 시간을 벌 수 있었다.

잊힌 역사를 찾는 과정에서 만난 하동
우리가 하동 지역에서 벌어진 일련의 전투들을 꼭 기억해야 할 이유는 먼저 앳된 10대 나이로 입대한 183명의 학도병들이 최초로 전장에 투입된 전투라는 점이다. 특히 이들이 아직 영남 지역에 닿지 못한 북한군을 막기 위해 여수, 광양, 순천 등에서 온 전남 지역 학생들이었다는 점도 잊어선 안 된다. 화개전투에서 18살 나이로 참전한 고병현 옹(94세)은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회고한다.

“순천에서 무기도 없이 기초 훈련을 받고 남원에 와서야 소총을 받았지. 전주에 올라가니 이미 북한군이 점령해 있었고, 남원과 구례를 거쳐 하동까지 후퇴했어. 여기서 화개전투를 치렀지. 화개가 어딘지도 몰랐고, 무조건 가라니까 왔어. 7월 25일 나는 식사 당번이 되어 주먹밥을 만들고 있는데 별안간 총소리가 나더라고. 부리나케 뛰어가니 벌써 우리 또래 친구들이랑 군인이 40명쯤 쓰러져 있었어.”

6·25전쟁 때 하동전투에서 다친 수많은 부상병들을 태운 선박들이 노량항에서 출발했다.
3시간 정도 치러진 전투에서 학도병 70여 명이 전사했고, 남은 이들은 낙동강 방어선으로 이동해 숱한 전투에서 산화돼갔다. 하동은 9월 28일 북한군 점령에서 벗어났지만, 그동안 군경은 물론이고 하동 사람들 모두 극악의 고초를 겪어야 했다. 이때 소중한 목숨을 잃은 군인들을 추모하고 기억하기 위해 격전지 중 하나였던 적량면 동산마을에 2022년 호국공원이 들어섰다. 지금은 채병덕 장군과 미군, 무명용사와 학도병을 기리는 비석과 장병 동상이 간간이 찾아오는 이들을 맞고 있다.

남파랑길 47코스의 종점인 섬진교는 하동전투 때 북한군의 도하를 막기 위해 미군에 의해 폭파된 것을 1986년에 다시 세운 것이다. 처음에 경남.(가운뎃점)전남의 편리한 연락과 이동을 위해 가설(‘동아일보’ 1933년 9월 21일자)됐다가 한때는 두 지역의 진출을 막기 위해, 시간이 지나서는 다시 잇기 위해 재건립되기까지 5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섬진교는 우리 역사가 어떻게 격동하며 흘러왔는지 말해주는 것 같다.

하동송림은 예부터 홍수 범람을 막은 자연 방파제이자 유사시 적군을 막던 교두보였다.
어느덧 섬진강 물결이 노랗게 금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찰박찰박 소리를 내며 강물이 백사장의 하얀 모래를 담금질하는 모습은 마치 꿈결 같다. 가슴속까지 스며드는 노을 빛깔이 수면을 천천히 물들인다. 하나둘씩 자취를 드러내는 별자리에 저마다 숨겨진 이야기가 주르륵 펼쳐질 것 같다.

·사진 이 종 철 기자 | 자료 제공·하동군청

함께 둘러보면 좋은 하동 여행지


호국공원
호국공원이 위치한 지역은 경남 진주로 가는 길목에 있어 6·25전쟁 당시 국군과 미군이 북한군과 치열하게 공방전을 벌인 곳이다. 공원 중앙의 기념탑은 참전 용사뿐만 아니라 국토 수호를 위해 희생된 하동군민의 넋을 기리기 위해 건립됐다. 기념탑 양옆으로 무명용사와 미군의 추모 동상이 세워져 있고, 채병덕 장군과 한미 양군의 비석 등이 나란히 놓여 있다. M577 장갑차와 L60(T) 40㎜ 함포, P7 상륙장갑차 등 우리 육·해군이 사용했던 장비들이 전시돼 있다.
화개장터·하동십리 벚꽃길
해마다 봄철이면 활짝 핀 벚꽃을 보기 위해 전국에서 온 상춘객을 맞이하느라 북적이지만 1950년 7월, 섬진강을 도하한 북한군을 막기 위해 우리 군인과 학도병들이 처절한 전투를 벌인 곳이 여기 화개장터 부근이다. 7월 13일 전남 여수, 순천, 광양, 보성, 강진 등 17개 중학교에서 180여 명의 학생들이 혈서를 쓰고 자원입대해 군복도 없이 학생복 그대로 전선에 투입됐다. 6·25전쟁의 무수한 전투 중 처음으로 학도병이 참전한 전투가 바로 화개전투다. 해마다 7월 25일이면 화개전투에서 전몰한 학도병들을 기억하는 추모제가 진행되고 있다.
스타웨이 스카이워크
6·25전쟁 때 남편을 잃고, 뒤이어 세 살 아들까지 잃은 아픔을 딛고 문학 창작 활동을 시작한 박경리는 하동 평사리를 배경으로 한국 근현대사를 관통하는 대작 ‘토지’를 집필하며 문단의 큰 주목을 받았다. 스타웨이 스카이워크는 남파랑길 47코스의 끝 지점에서 화개장터로 가는 19번 국도 중간에 있다. 이곳에 오르면 ‘토지’의 주 배경지인 평사리 들판의 장대한 모습, 도도하게 흐르는 섬진강이 유유히 산자락을 돌아나가는 수려한 풍광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