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 온 이웃
제주시협의회
‘평화와 미래를 향한 울림음악회’
자문위원과 북한이탈주민
‘ᄒᆞᆫ디어울령합창단’ 창단
제주지역 합창단·군악대와 함께
감동의 하모니 선사
7월 19일 오후 7시 제주문예회관 대극장. 관람석 800석이 꽉 들어찬 가운데 남녀 30여 명으로 구성된 조금 ‘특별한’ 혼성합창단이 무대에 올랐다. 남성은 5명 뿐, 대부분 여성인 데다 30대부터 60~70대로 보이는 단원까지 연령대도 다양해 보였다. 지휘자가 등장하자 큰 박수와 함께 웅성이던 객석이 순간 조용해졌다. 곧이어 첫 합창곡이 시작됐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로 시작한 ‘고향의 봄’ 노래는 어느 샌가 북한 가곡 ‘임진강’으로 바뀌었다. “임진강 맑은 물은 흘러 흘러 내리고, 뭇 새는 자유로이 넘나들며 날건만, 내 고향 남쪽 땅 가고파도 못 가니, 임진강 흐름 아 원한 싣고 흐르느냐~.” 그러다 다시 “울긋불긋 꽃 대궐 차린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라는 고향의 봄 후렴구로 끝을 맺었다.
우리나라 가곡 고향의 봄과 북한 가곡 임진강을 합쳐 편곡한 곡이었다. 합창단원과 관객은 아름다운 선율 따라 흐르는 노래 가사 한 구절 한 구절에 깊은 감동을 주고받으며 하나가 됐다. 이어 플롯 연주에 맞춰 영화 포카혼타스 삽입곡인 ‘바람의 빛깔’을 협연한 합창단은 ‘아리랑’을 부르며 관객들의 큰 박수를 이끌어냈다. 이 합창단은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제주시협의회 소속 자문위원(20명)과 지역 북한이탈주민(17명) 등으로 구성된 ‘ᄒᆞᆫ디어울령합창단’으로, 창단 첫 무대는 성공적이었다.
“무대 서는 게 소원”… 탈북민들 더 적극적
이날 행사는 ‘북한이탈주민의 날(7월 14일)’ 지정을 기념해 민주평통 제주시협의회(회장 이용탁)가 주최·주관한 ‘ᄒᆞᆫ디어울령합창단 창단 & 평화와 미래를 향한 울림음악회’. 노래를 마치고 내려오는 합창단 단원들의 얼굴엔 만감이 교차하는 듯했다. 첫 무대를 무사히 마쳤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이들 사이로 벅찬 감동에 눈시울을 붉히는 이들도 보였다.
‘ᄒᆞᆫ디어울령합창단’ 창단을 이끈 이용탁 회장은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먼저 온 통일’인 북향민들과 함께한다는 취지로 용기를 냈다”며
“합창단원들의 한 줄기 빛이 주변을 밝히기에는 부족할지라도 그 빛의 존재 이유를 알리기에는 충분하다”고 말했다.
민주평통 제주시협의회가 합창단 창단 논의를 처음 시작한 것은 올해 초다. 윤석열 대통령이 1월 16일 국무회의에서 통일부에 ‘북한이탈주민의 날’ 제정 지시와 함께 민주평통에 탈북민 멘토 역할을 더욱 적극적으로 해 나가도록 주문하면서다. 합창단의 일원으로 직접 참여한 이용탁 회장은 “평화의 섬 제주도에서 북한이탈주민의 날 제정을 기념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뭘까 고민하다가 제주도에 사는 북한이탈주민들을 밖으로 나오도록 우리가 먼저 한번 다가가보자, 함께 공유할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해보자고 해서 생각해냈던 게 바로 합창단”이라고 말했다.
합창단 창단 작업은 제주시협의회 여성분과위원회에서 맡았다. 송경미 여성분과위원장은 먼저 여성위원회 소속 자문위원들을 대상으로 단원들을 모았다. 여기에 청년 자문위원 몇 명과 이 회장은 물론 송 위원장도 함께하기로 했다. 관건은 탈북민들이 얼마나 참여할지였다.
현재 제주지역에 거주하는 탈북민은 340명 정도로 알려져 있다. 제주시협의회 자문위원으로 활동하는 탈북민을 통해 지역 탈북민들에게 합창단 참여 의사를 확인한 결과 의외로 관심이 많았다.
문제는 전문가가 없다는 것. 더욱이 예산 자체가 없으니 합창단을 이끌 지휘자와 반주자 등 전문가 섭외는 물론 당장 연습 장소를 마련하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그 때문에 주변 사람들 대부분이 합창단을 이끌어가기 쉽지 않을 것이라고 우려했다. 이 회장은 “합창단 이야기를 꺼내니까 탈북민들이 ‘무대에 서는 게 소원’이라며 관심이 너무 많았고, 한번 내뱉은 이상 끝까지 해보자고 마음먹고 방법을 찾았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이 회장은 먼저 제주여자중·고교 졸업생들로 구성된 도내 최초의 동문 합창단인 ‘제주카멜리아코러스’ 김경순 단장을 찾아가 자문하고 도움을 청했다. 탈북민과 함께하는 합창단의 취지에 크게 공감한 김 단장은 자신의 합창단을 이끌고 있는 장호진 제주호은아트센터장을 소개해줬다. 장 센터장은 이탈리아 유학파 출신으로 지역 내에서 다양한 활동을 펼치는 음악인 중 한 사람이다. 그 역시 전후 사정을 듣고 순수 재능기부 차원에서 흔쾌히 합창단 지휘를 맡기로 했다. 나중에는 자신이 운영하는 아트센터를 연습공간으로 제공하기까지 했다.
“北 아들에 엄마 모습 꼭 보여주고 싶어”
4월 21일 창단한 합창단이 7월 음악회 무대에 오르기까지 남은 기간은 불과 3개월 남짓. 민주평통 자문위원들이나 탈북민들 모두 각자 생업에 종사하는 이들인지라 한자리에 모여 새롭게 편곡된 노래를 익히며 호흡을 맞추기엔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었다. 더군다나 전혀 다른 환경에서 살아왔던 이들이기에 서로 마음을 열고 소통하는 게 쉽지 않았다. 이 회장의 이야기다.
“처음에는 식사할 때도, 간식을 먹을 때도 딱 나눠졌어요. 탈북민들이 자기들끼리만 모여서 먹으니까 자문위원들이 끼어들기 어려웠죠. 그럼 합창을 하는 의미가 없잖아요. 그래서 제가 가운데서 노력을 많이 했죠. 그랬더니 어느 순간 벽이 확 무너지더라고요. 연습할 때 탈북민들이 북한 음식도 만들어 와서 같이 나눠먹으면서 이제 언니, 동생 하는 사이가 됐죠.”
합창단 단원들은 처음엔 매주 이틀씩 모여 연습을 했다. 그러다 행사 일정이 다가오면서 연습 일정을 더 늘렸다. 음악회 무대에 오르기까지 30회 가까이 연습하는 동안 낙오자는 단 한 사람도 없었다. 특히 탈북민 단원들의 열정이 대단했다.
제주문예회관 대극장 관람석(800석)을 가득 메운 관객들은 조금은 ‘특별한’ 공연에 큰 박수와 환호로 응원을 보냈다.
송경미 위원장은 “탈북민들 중에는 메이크업 아티스트 하시는 분도 있고, 약국에서 근무하는 분도 있고, 또 어떤 분은 하루 정말 하루 벌어서 하루 사시는 분도 있다”면서 “그런데 이들 모두 합창 연습에 전념하기 위해 생업을 잠시 쉴 정도로 열정을 쏟았다”고 말했다.
한 탈북민 합창단원은 “합창 드레스도 처음 입어보고, 헤어 메이크업도 처음 받아본다”면서 “아직 아들이 북한에 있는데 너무 보고 싶고, 이곳에 데리고 와서 엄마가 이렇게 잘 사는 모습을 꼭 보여주고 싶다”고 말해 듣는 이들을 안타깝게 했다.
이날 음악회에는 제주카멜리아코러스 합창단과 제주도내 전·현직 교직원들이 만든 ‘파하마 색소폰 앙상블’, 지역 청소년들로 구성된 ‘호은아트 청소년 뮤지컬’, 제주 해병대 ‘제9여단 군악대’ 등이 참여해 함께 무대를 채워나갔다. 이 연주팀들도 북한이탈주민의 날 제정과 음악회에 대한 관심을 모으기 위해 이 회장이 직접 섭외했다.
음악회 연주 중반에는 지난해 민주평통이 주최한 ‘2023 청소년 통일골든벨’ 결선대회에서 최우수상을 차지한 고민서 학생(오현고 2)이 등장해 관객들에게 통일 공감대 형성을 위해 동참해줄 것을 당부했다. 이어 마지막 순서에 다시 무대에 오른 ᄒᆞᆫ디어울령합창단은 제9여단 군악대의 연주에 맞춰 제주카멜리아코러스 합창단과 ‘터’와 ‘아름다운 나라’ 두 곡을 부르며 큰 박수와 환호 속에 피날레를 장식했다.
“한 줄기 빛 존재 이유 알리기에 충분”
이날 행사에는 고충홍 민주평통 제주지역회의 부의장과 동승철 사무차장 등 내부 인사를 비롯해 이상봉 제주도의회 의장, 진명기 제주특별자치도 행정부지사, 김광수 제주도교육감, 김완근 제주시장 등 제주도내 주요 인사들이 대거 참석해 북한이탈주민의 날에 대한 깊은 관심을 나타냈다.
이용탁 회장은 음악회에 앞서 진행된 기념식 개회사를 통해 “감히 합창단이라고 말씀드리기에는 부족하지만 그럼에도 다름을 인정하고 ‘먼저 온 통일’인 북향민들과 함께한다는 취지로 용기를 냈다”며 “합창단원들의 이러한 한 줄기 빛이 주변을 밝히기에는 부족할지라도 그 빛의 존재 이유를 알리기에는 충분하다”고 이번 행사에 담긴 의미를 강조했다.
이에 진명기 행정부지사는 오영훈 제주도지사를 대신해 “제주도정은 북한이탈주민의 성공적 사회 정착을 위한 일정 비율 공직 채용과 ‘행복한 가정 만들기’ 사업, 사회 정착 프로그램 등 더욱 촘촘한 지원 정책으로 북한이탈주민의 미래를 빛낼 수 있도록 온 힘을 다하겠다”고 약속했다. 이어 김광수 교육감은 “통일 이후 남북주민 통합과 북한이탈주민에 대한 포용적인 사회 문화를 만들기 위한 교육을 실시하고, 북한이탈주민에 대한 미래세대의 공감대 확산을 위해 교육과정 속에서 통일과 나라사랑 교육 내실화와 교수의 전문성 함양을 지원하겠다”고 말했다.
+ 북한이탈주민 합창단원 미니 인터뷰 +
“통일을 위해서라면 뭐든 할 생각”
강윤구 자문위원 (평양)
1988년 탈북해서 중국과 미안마, 태국, 러시아 등 여러 나라를 30년 가까이 돌아다녔죠. 제가 한국에 들어온 건 2017년 8월입니다. 중국 의대 교수로 있던 2016년 9월에 북한 평양에 몰래 들어갔다가 우리 집안이 나 때문에 공개 총살을 당한 걸 뒤늦게 알고 너무 억울해서 다 정리해서 한국으로 오게 된 겁니다. 저는 지금 민주평통 자문위원과 제주하나센터 자문위원, 북한민주화위원회 제주본부장 등을 맡고 있습니다. 제가 자문위원이다 보니 이번에 탈북민들이 합창단에 참여하는 데 역할을 했는데요. 노래는 잘 못하지만 통일을 위해서라면 뭐든 할 생각입니다.
“합창하며 남북 하나 되는 것 같아”
박정옥 합창단원 (함경북도 청진)
2000년 탈북해서 4년 후에 북송됐다가 2007년 다시 탈북해서 중국에서 5년 정도 지냈습니다. 처음 탈북했을 때 중국 사람에게 시집을 가서 딸을 하나 낳았는데, 그때는 그게 인신매매라는 것도 몰랐어요. 다시 탈북해서 중국에서 딸과 같이 살다가 또 북송되면 영영 못 돌아올 것 같아 2012년에 딸을 중국에 두고 혼자 한국으로 넘어왔습니다. 저는 호텔에서 중국어 통역을 도와주면서 일하고 있습니다. 합창 연습을 하면서 만남이 우선 좋았고, 남북이 하나 되는 것 같아서 좋았어요. 통일만 되면 정말 좋겠다고 항상 생각하죠. 이번 기회에 서로 마음의 문을 열고 사랑으로 다가가서 함께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글·엄 상 현 기자 | 사진·한 용 환 기자·제주시협의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