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민 정착 이야기Ⅰ
제주 ‘복희네농장’ 김복희 대표
“탱글탱글 익어가는 귤처럼
정착의 꿈도 익어갑니다”
북한 사람들이 생전에 꼭 한번 가보고 싶은 곳이 제주다. 쉽게 맛볼 수 없는 귤은 매우 귀한 대접을 받는다. 청귤이 익어가는 제주에서 감귤 농사를 지으며 새로운 인생을 일궈나가는 북한이탈주민이 있다. ‘복희네농장’ 대표 김복희 씨(46)다.
“사실은 과일 농사를 짓는다고 하면 그냥 꽃이 피고 열매 맺고 수확할 때나 좀 바쁠 것 같다고 막연하게 생각했었어요. 그런데 막상 와보니 1년 365일 쉬는 날이 전혀 없어요. 아침에 나와서 나무가 어디 이상한 데가 없는지, 조경수는 물을 잘 먹는지 매일매일 꼼꼼하게 돌봐줘야 해요. 그러다 보니까 귀농·귀촌을 결심할 때 어느 정도 여유롭게 즐기면서 농사를 지을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더라고요(웃음).”
지금이야 웃으며 말하지만, 2020년 제주로 내려와 농장 일을 시작했을 때는 암담하기 그지없었다. 천상낙원이라는 환상을 품고 내려왔는데 실제로는 수려한 바닷가 풍경이 지척임에도 불구하고 갈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그런 그가 부지런히 전지가위를 놀리며 과실에 눈을 떼지 않는 모습을 보니 진짜 농사꾼의 모습이다.
‘엄마’라는 이름으로 딸과 함께 한국행 결심
평안남도 남포시 출신인 김 씨는 1996년 겨울 중국으로 건너왔다. 처음에는 탈북을 의도한 것이 아니라 실종된 아버지를 찾을 겸 고모가 살던 집에 들러 도움을 받고 돌아올 생각이었다. 1990년대 중반만 해도 국경 경비가 그리 삼엄하지는 않았고, 중학교 시절에 아버지를 따라 중국에 넘어갔다 온 적도 있었다. 당시 북한은 고난의 행군 시절이라 주민들의 삶은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때였다. 배급은 진작에 끊겨서 조개잡이를 하고 장마당에서 장사를 해봤지만 끼니를 잇기 어려웠다.
“중학교 졸업반 때 경험했던 중국에서의 생활이 북한과 비교가 되지 않았어요. 먹을 것이 있었고 구경할 것도 많았고, 방송에서 보여주는 세계도 완전히 달랐죠. 다시 북한에 돌아와 2년을 살다 보니 점점 지옥같이 느껴졌습니다. 이것저것 다 해봐도 나아지지 않는 삶 때문에 결국 강을 넘을 수밖에 없었던 거죠.”
언젠가 다시 돌아올 생각에 충분한 준비 없이 떠난 길이었다. 예상보다 여정이 길어지면서 노잣돈은 금세 떨어졌고, 가지고 있던 옷가지를 팔아도 한 끼 때우기가 버거웠다. 고향을 떠난 지 한 달 만에 동상 걸린 다리를 끌고 어기적어기적 기어가며 꽁꽁 언 두만강을 넘었다. 워낙 기력이 쇠하고 정신마저 없던 터라 두만강에서 바로 보이던 고모네 집도 서너 시간이 돼서야 찾을 수 있었다.
완전히 탈진한 그를 고모는 정성스럽게 보듬으며 회복을 도왔다. 어느 정도 몸이 회복되자 그는 고모의 말을 따라 하얼빈에 있는 먼 친척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탈북자들이 늘어나면서 중국 공안들의 감시가 점점 조여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허드렛일을 하고 아이들을 돌봐주다가 2000년 조선족 남성을 만나 결혼했다. 그해 딸이 태어나면서 일자리를 찾아 나섰고, 중국어도 열심히 배웠다. 다행히 남성 가족들이 신분증명서를 만들어줘 북송에 대한 큰 걱정 없이 살 수 있었다.
그렇게 23년 동안 중국에 살며 많은 일을 했다. 한 직장에서 10년간 관리자로 일하기도 했고, 직접 점포를 얻어 식당을 운영한 적도 있었다. 큰 탈 없이 중국 생활에 적응하며 살던 그에게 별안간 새로운 인생의 변곡점이 생긴 것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 때문이었다. 한창 꿈 많은 17살의 나이, 진로는 어떻게 정할까 고민하던 딸은 한국 유학을 희망했다. 평생 못다 한 공부에 대해 아쉬움이 컸던 그도 딸의 희망을 응원하고 싶었다. 이윽고 2017년 말, 그는 결단을 내렸다. 한국영사관에 전화를 걸어 한국행에 대한 도움을 요청한 것이다.
제대로 딸을 뒷바라지하겠다며 함께 한국에 들어온 김 씨는 의욕적으로 일을 하며 새로운 사회에 다시 적응하기 시작했다. 평일에는 식당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일하고, 쉬는 날에는 알바를 찾아다니며 악착같이 살았다. 한국행을 고사했던 중국에서의 남편과는 얼마 지나지 않아 관계가 정리됐다. 그러던 어느 날 자신했던 건강에 문제가 생기자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하는 회의감이 생겼다. 그러던 차에 지인의 소개로 지금의 남편을 만나게 됐다.
“다정한 성격에 외모도 좋고(웃음). 제주도에서 과수원을 한다는 말에 혹하고 끌렸죠. 그게 진짜 혹이 될 줄은 몰랐지만요.”
제주에서 통일 심는 사람이 될 터
남편은 절대 손에 물을 묻히지 않게 해주겠다고 약속했지만, 막상 농장을 들여다보니 가만히 지켜볼 수만은 없었다. 처음에는 발길에 거치적거리는 것들을 치우다가 과수원 정리를 하게 됐고, 조금씩 일을 맡다 보니 그 없이는 농장 일이 안 될 정도가 됐다.
사실 4000평 농장을 가꾼다는 것은 혼자로는 어림없는 일이다. 당도 높은 신품종을 들여오고 농사를 지으며 주문, 판매, 유통까지 하는 데에 그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다. 제주 관광객 대상의 체험농장 프로그램도 운영하고, 얼마 전에는 관상용 작물까지 손을 뻗었다. 스스로 안빈낙도의 삶을 살고 싶다면서도 계속 일거리를 늘리는 중이다. 남편과 시아버지는 물론, 인근 주민들도 그의 추진력에 혀를 내두른다. 지역사회에서 수여한 표창패도 여럿이다.
“한국에서 살며 알게 된 북한이탈주민들에게 열심히 사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요. 열심히 일하고 현재에 충실하면 된다고, 어제보다 나은 오늘을 살 수 있다고 증명하고 싶어요. 언젠가 통일이 되면 북녘 동포들이 제주에 와 성공의 꿈을 꾸고, 낙원의 행복을 얻을 수 있도록 힘 닿는 데까지 노력할 거예요. 딸에게도 엄마의 열정이 전해졌으면 좋겠어요. 힘내자, 우리 딸!”
글·사진 이 종 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