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북·미관계는 “미국이 우리의 인내심을 오판하면 새로운 길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다”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신년사로 시작했다. 2019년 2월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은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빅딜 요구와 북한의 단계적 해법과 제재 해제 요구가 맞서면서 공동성명도 없이 노딜로 끝났다. 같은 해 4월 시정 연설을 통해 김정은 위원장은 ‘일방적인 강도적 요구를 전면에 내들고 관계 개선에 인위적인 장애를 조성하고 있는 미국의 시대착오적인 오만과 적대시정책’과 그에 편승하고 있는 한국정부를 비판했다. 북한은 핵과 ICBM 발사 중지 및 미군 유해 송환 등 싱가포르 공동성명에 따라 주동적인 신뢰구축 조치를 취했는데 ‘미국 대통령이 직접 중지를 공약한 군사연습이 재개되는 등’ 적대시 정책이 재연되는 데 대해서 불쾌감을 표시하며, 연말을 시한으로 미국에 북·미 협상의 ‘새로운 계산법’을 요구했다.
지난 6월 30일 판문점에서 남·북·미 정상이 회동하면서 북·미 협상의 동력이 살아났지만, 10월 스톡홀름 실무협상 역시 결렬되었다. 북한의 협상대표 김명길 북한 외무성 순회대사는 현장에서 싱가포르 회담 이후에도 “미국은 열다섯 차례에 걸쳐 우리를 겨냥한 제재 조치들을 발동하고 대통령이 직접 중지를 공약한 합동군사연습마저 하나둘 재개했으며 조선반도 주변에 첨단 전쟁 장비들을 끌어들여 우리의 생존권과 발전권을 공공연히 위협”했다고 비판하며 협상 중단을 선언했다. 이에 미 국무부는 ‘창의적인 아이디어’에 관한 논의가 있었다고 애써 긍정적 평가를 내렸지만, 북한 외무성 대변인 담화는 “생존권과 발전권을 저해하는 대조선 적대시 정책을 완전하고도 되돌릴 수 없게 철회하기 위한 실제적 조치를 취하기 전에는 이번과 같은 역스러운(역겨운) 협상을 할 의욕이 없다”고 못 박았다.
북한의 연말 시한을 앞두고 12월 15~17일 비건 미 국무부 대북정책특별대표 겸 부장관 내정자가 서울을 방문했다. 비건 대표는 미국은 북·미협상에서 북한이 인위적으로 설정한 연말 시한에 구애받지 않고 “타당성 있는 단계적 접근과 유연한 조처를 담은 균형 잡힌 합의”를 추구할 것임을 밝혔다. 서울 외교부 청사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는 “우리는 여기에 와 있고 당신들은 우리와 어떻게 접촉할지 알고 있다”며 북측에게 판문점 실무협상을 공개적으로 제안했다. 하지만 판문점 접촉은 이뤄지지 않았고 비건 대표는 빈손으로 서울을 떠났다.
하노이 이후 계속 어긋난 북·미관계의 원인
2019년 북·미관계는 끝내 하노이 노딜 이후의 교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렇다면 하노이 노딜의 이유는 무엇인가? 대북 강경론자인 볼턴 국가안보보좌관이 개입하며 협상을 망쳤다는 해석도 있지만 가장 직접적이고 결정적인 요인은 트럼프다. 미국 조야의 반대를 무릅쓰고 북한과 싱가포르 정상회담을 추진한 것도 트럼프고, 하노이에서 노딜을 결정한 것도 역시 트럼프다. 북한에 게 CVID나 FFVD라는 이름으로 ‘선비핵화’를 요구하는 것은 볼턴뿐 아니라 워싱턴 주류의 공통적인 문법이고, 9월 볼턴이 해임된 이후에도 북·미 협상의 교착은 이어지고 있다. 워싱턴 주류는 기본적으로 불량국가 북한이나 ‘이단’ 트럼프 모두에게 비판적이며, 트럼프의 지지층도 불량국가 북한에 대한 불신은 워싱턴 주류와 같은 생각을 공유한다. 코헨 청문회를 배경으로 고조된 워싱턴의 반(反)트럼프 기류와 미국 사회의 뿌리 깊은 반북 정서를 고려해 트럼프는 하노이에서 국내정치적으로 수용되기 어려운 북한과의 ‘나쁜 거래보다는 결렬이 낫다’는 정치적 계산을 했을 것이다.
비건의 협상안 자체도 북한이 북·미 협상의 기본으로 삼고 있는 싱가포르 공동성명에만 근거하고 있지 않다. 하노이 회담을 앞두고 1월 비건이 스탠포드 대학 연설에서 밝힌 협상의 기조는 전통적인 대북 선비핵화 요구와 거래의 달인으로서 트럼프가 제시하는 북한의 ‘밝은 미래’, 그리고 싱가포르 합의가 뒤섞인 것이었다.
“우리는 북한 협상 상대에게, 북한이 최종적이고 완전하게 검증된 비핵화(FFVD)에 대한 공약을 이행하는 것을 전제로, 북한의 밝은 미래와 한반도 평화의 새로운 기회들을 작년 여름 싱가포르에서 양국 정상이 합의한 모든 공약들과 함께 동시에 그리고 병행적으로 추진할 준비가 되어 있다.”
북한 입장에서 ‘밝은 미래’라는 약속은 너무나 추상적이어서 의미가 없으며, 선비핵화 요구는 미국의 전통적인 대북 적대시정책의 재판일 뿐이다. 북·미 양국은 싱가포르 공동성명을 읽는 방식도 다르다. 미국은 각 항의 합의를 동시 병행추진의 대상으로 본 데 반해, 북한은 순차적으로 새로운 북·미관계를 통해 한반도 평화체제를 구축하고 그 틀에서 비핵화를 이행하는 것으로 읽는다. 이러한 해석의 차이에 더해서, 싱가포르 공동성명이 이후 북·미 협상의 기반이 되고 있는 ‘쌍중단’을 공식적으로 명확하게 규정하고 있지 않다는 점도 이후 북·미 협상 교착의 주요한 원인이다. 북한은 2018년 4월 제7기 3차 노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를 통해서 핵무력 완성을 선언하며 핵실험과 ICBM 발사 중단을 일방적으로 선포했고, 미국도 트럼프가 싱가포르 회담 직후의 기자회견에서 값비싼 워게임의 중단을 일방적으로 발표하면서 ‘쌍중단’의 일환으로 한미연합군사훈련이 조정되기 시작했다. 북한의 모라토리엄은 외교협상장에서 그 대가가 명확하게 규정되지 않았고 트럼프의 선언은 미 국방부나 동맹들과의 협의를 거치지 않았다.
돌이켜보면, 싱가포르 공동성명이 채택될 때부터 북한이 원하는 ‘쌍중단’과 상응조치,
정상 간 북·미 협상의 진전에 반하는 미국의 변화가 존재했고, 이는 2019년 들어 더욱 강화되었다.
북·미 협상 방해한 미국의 변화
돌이켜보면, 싱가포르 공동성명이 채택될 때부터 북한이 원하는 ‘쌍중단’과 상응조치, 정상 간 북·미 협상의 진전에 반하는 미국의 변화가 존재했고, 이는 2019년 들어 더욱 강화되었다.
첫째, 정치적으로 2020년 대선국면에서 트럼프의 정치적 위기 혹은 그를 둘러싼 정치적 분열의 심화다. 트럼프가 하노이 회담에 집중하지 못하게 만든 코헨 청문회는 트럼프의 개인 비리뿐 아니라 2016년 미국 대선에서 러시아의 개입 및 트럼프 선거캠프와 러시아의 연계에 관한 조사의 일환이었고, 이를 주도한 것은 2018년 중간 선거에서 하원을 장악한 민주당이었다. 2019년 4월 공개된 뮬러 특검 보고서는 트럼프를 직접 기소하지 않았다. 하지만 트럼프가 7월 우크라이나 대통령과의 통화에서 정적 바이든 전 부통령의 흠결을 잡으려고 우크라이나에 대한 원조를 중단하는 등 압박을 가했다는 ‘우크라이나 스캔들’이 터지면서 민주당은 탄핵을 진행하고 있다. 공교롭게도 9월 북한이 실무협상에 응하겠다고 밝힌 직후 펠로시 하원의장이 탄핵 조사를 시작했고, 북한의 연말 시한은 하원의 탄핵 표결과 겹친다. 대선 국면에서 탄핵은 대외정책 전반의 중요성과 트럼프의 대북정책에 대한 집중도를 떨어뜨리며, 정치적 목적을 위한 트럼프의 대외정책 ‘딜’에 대한 경계를 고취시키고 있다.
2019년 6월 30일 서울역 대합실을 찾은 시민들이 판문점 군사분계선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트럼프 대통령의 만남을 바라보고 있다. ⓒ연합
둘째, 정책적으로 북한에 대한 선비핵화와 제재의 관성이 강력하게 작동하고 있는데다가, ‘쌍중단’과 상반되는 대규모 군비증강이 진행되고 있다. 예를 들어, 미 의회는 2018년 12월 아시아 안심법안(Asia Reassurance Initiative Act)을 통해서 기존 동맹체제 및 북한에 대한 제재를 유지할 것을 규정했다. 미 국무부 스틸웰 동아태차관보는 2019년 10월 상원 외교위원회 청문회에서 “최대 압박과 관여 정책을 통한 북한의 평화로운 비핵화는 아시아 안심법안의 규정이기도 하고 트럼프 정부의 방침 이기도 하다”라고 언급했다. 한편, 미 국방부는 2018년 1월의 국방전략과 2월의 핵태세보고서에서 중국과 러시아, 북한을 주요 위협으로 규정하고 기존의 INF 등 국제 군축 레짐이나 대내 재정적 제약에서 벗어나 강대국 전쟁에 대비하는 압도적인 군사력 건설을 목표로 설정했다. 그리고 그 구체적 지역전략으로서 인도·태평양 전략을 6월 초 발표했다.
6월 이후 북·미 협상의 교착은 미국과 중국 및 러시아와의 전략적 경쟁, 인도·태평양 전략을 배경으로 한 한미 동맹의 긴장을 동반하고 있다. 미국은 북한에 대한 ‘최대의 압박과 관여’를 유지하는 한편 한국에 대해서도 인도·태평양 전략 차원에서 한일정보보호협정(GSOMIA)의 유지와 호르무즈 해협 파병 등을 요구하는 동시에 한미 방위비 분담금의 대폭 증액을 압박하고 있다. 인도·태평양 전략의 틀에서 ‘쌍중단’과 싱가포르 공동성명에 따른 북·미협상의 공간은 대단히 제한적이며, 한미동맹의 긴장은 북한의 연말 시한에 대한 공동 대응의 집중도를 떨어뜨리고 있다. 게다가, 중국과 러시아는 대북 정책에서도 미국에 맞서는 공동전선을 구축해 12월 유엔안보리에서 대북제재 해제 결의안을 제출했다.
2020년 남·북·미가 직면할 진실
2020년 북한의 새로운 길은 2018년 4월 노동당 전원회의의 결정을 기준으로 보면, 미국의 대선 국면에서 트럼프 정부와의 협상을 통한 제재 해제의 기대를 버리고 자력갱생을 도모하는 최소에서부터, 핵실험과 ICBM 시험 발사를 재개하며 핵능력을 대폭 증강하는 최대까지 예상해볼 수 있다. 어느 경우든 북한은 미국의 협력 없이 자신이 원하는 ‘생존권과 발전권’을 보장받지 못한다는 ‘진실’에 직면할 것이다. 미국 역시 중국과 러시아가 대북 국제 제재 전선에서 이탈하는 상황에서 현재와 같은 ‘최대의 압박과 관여’를 유지하지 어렵고, 코피작전이든 예방전쟁이든 북한에 대한 군사적 옵션도 작동하지 않는다는 ‘진실’에 마주할 것이다. 한국의 경우에는 기존 한미 동맹의 재조정 없이는 북·미 협상의 교착이나 미·중경쟁 속에서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을 지켜낼 수 없다는 ‘진실’에 직면할 것이다.
중앙대학교 정치국제학과 교수